변정수의 알쓸신서 ⑬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동아시아|2023

인천투데이=변정수 도서평론가|출판물을 ‘비평’하는 입장에서 볼 때, 얼핏 범박해 보이는 이 책의 제목은 매우 ‘모범적’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세 개의 굵직한 키워드를 집약해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타인의 고통’. 이 책에는 저자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만나고 대화하고 연구하고 연대한 다양한 고통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누군가가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아무 일도 없는 양 외면하거나 대수롭지 않은 양 무시하는, 아니 심지어 엄살이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하는 잔혹한 세상을 인간의 사회라고는 할 수 없을 테다.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으로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마땅히 눈을 열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다음은 그 고통을 대하는 태도다. 타인의 고통이 사회적 관심사가 되면서 ‘공감’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회자되곤 한 지도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주제를 핵심으로 다루는 게 분명한 이 책에는 뜻밖에도 그 상투적인 단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고통은 타인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결코 똑같이 느낄 수 없다는 처연한 사실을 넌지시 또는 또렷한 문장으로 힘주어 환기한다.

실은 ‘공감’이 불가능하기에 겸손하게 더 눈을 크게 열고 더 깊이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싸구려 ‘공감’이 아니라 진지한 ‘응답’일 수밖에 없다. 뱀발을 덧붙이자면, ‘응답(response)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시민의 사회적 ‘책임(responsibility)’의 참뜻일 테다.

그리고 이 책은 활동가, 연구자, 작가 등 다양한 자리에서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려 애쓰고 있는 사람들과 나눈 주옥같은 이야기들로 그득하다. 게다가 이 ‘인터뷰’들은 흔히 간과되곤 하는 인터뷰의 본질적 속성에 충실한 전범이기도 하다.

인터뷰란 단순한 ‘질의응답(QnA)’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복수의 시선(view)이 교차(inter-)하며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글이라는 교과서적인 가르침을 새삼 일깨운다.

이 두 키워드만으로도 큰 울림을 낳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테지만, 이 책에서 내 눈길을 가장 집요하게 사로잡은 키워드는 얼핏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소하고 부차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공부’이다.

저자는 공부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 즉 연구자이다. 그것이 저자가 서 있는 자리이고, 저자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 즉 ‘공부’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려 애써 왔다. 이 책은 물론 학술적인 연구 보고서가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이 저자가 공부한 결과를 상세히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신 공부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모르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공부의 ‘목표’가 아니며 그저 부수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공부하는 일의 핵심은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집요한 질문들로 온통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이 책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세상을 향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 이전에 저자 스스로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 책의 행간을 따라 읽다 보면, 저자의 공부가 전자의 측면에서 힘을 가질 수 있는 건 후자의 측면에 충실한 덕이라는 진실의 일단이 새삼스럽게 일깨워진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저자의 미덕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제 공부의 한계를 끊임없이 자각하고 성찰하는 자의식이야말로 이 책이 전해주는 가장 큰 감동의 원천이다.

심지어 “질병보다 건강이, 죽음보다 삶이 낫다”는 관념조차도 의사이자 보건학자라는 자신의 자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대목은 이 책에서 저자의 치열한 자의식이 가장 빛나는 대목으로 꼽을 만하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는 저자가 수행하는 보건학이라는 학문의 정체를 풀어 설명한 수사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이 어떤 공부든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공부로서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는 무거운 질문으로 읽힌다.

*알쓸신서는 알아두면 쓸데있는 신비한 서적 이야기의 줄임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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