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번외편 ②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1930년 7월 23일 신문에 인천 월미도 카페 ‘미가도’ 지점 여급이 현금 29원을 훔쳐 상인천역 방향으로 달아나다가 잡혔다는 기사가 실렸다.

눈에 띄는 점은 신문에 등장하는 여급이 평양 출신으로 경성의 여고보 졸업으로 문맹률이 높던 당시로서는 굉장히 많이 배운 신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카페 미가도는 1928년 기사를 보면 평양 남문정에도 존재했고 월미도의 카페 역시 지점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현재 카페의 체인점 문화는 오래전부터 이미 존재했다. 카페를 드나드는 젊은 층을 모던보이, 모던걸이라 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에 걸맞게 직원도 보통학교 이상을 졸업한 글을 깨우친 여성이 대다수였다.

통상 여급이라 불리던 직원은 여고보를 졸업하거나 전문학교를 나온 여성까지 있었으니 세칭 ‘모던카페’라는 신문화의 상징적 장소 표현이 당연하게 느껴진다.(삽화사진)

삽화.
삽화.

당시 카페 여급의 월급은 15원 정도가 평균이었고 월급 외 팁이 수입원으로 화장품과 의상비 지출이 많았으며 통상 경성의 카페에서 월급 포함 지출을 뺀 실수입 40원 정도였다. 다양한 차별이 존재하던 조선인 여성에게 매월 40원 수입은 큰돈이었다.

영화 ‘밀정’에 등장하는 친일경찰의 경우 월급 외 부수입이 있었겠으나, 친일파 실제 인물로 1933년 서무과 고원으로 월급 26원을 받다가 1938년 친일경찰이 됐을 때인 1938년 부산경찰서 형사 겸 순사 월급으로 38원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앞의 명치제과 카페 글에서 여직원 모집 공고에 사진을 첨부한 여고보 졸업 나이의 일본인, 조선인 여성 모집 광고가 나왔던 사실을 상기하면 사진과 나이 조건이 이해된다.

카페에서 일한다고 모두가 같은 수입을 올리지 못했겠지만 1930년대 군산에 미두취인소가 들어서자 카페가 급증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당시 카페는 유흥과 퇴폐의 기능을 수행하며 많은 돈이 흘러가던 길목 중 하나였다.

1931년 10월 7일 매일신보.
1931년 10월 7일 매일신보.

1931년 10월 7일 매일신보(사진)는 미인좌, 아리랑 두 카페에 10원씩 벌금이 부과됐다는 기사를 냈다. 내용을 보면 아리랑은 외국인인 러시아 여자, 미인좌는 독일 여자를 불법 고용했다는 것이다.

미인좌가 개업할 때 이미 신문에서는 일본에서 온 미인들이 많은 카페라는 광고성 기사가 다뤄졌는데 독일여자 고용이 불법이라며 경성 경찰서는 벌금 10원을 부과했다. 벌금 액수만 보더라도 매우 형식적인 처벌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는 미인좌가 오사카에 본점을 둔 일본 자본의 경성지점인 때문이다.

미인좌는 일본 본토에서 미인들을 공수했다고 광고하고 당시 일본에서 인기 있던 여배우의 이름을 사용한 미녀들이 서빙을 했다. 카페 미인좌의 이용가격을 보면 밀크쉐이크 한 잔에 35전으로 당시 설렁탕 10전, 고기가 듬뿍 들어간 장국밥 15전에 비교하면 매우 높은 가격이었다.

경성의 미쓰꼬시 백화점은 4층 건물로 지하매장 포함 연면적 2300평, 일본 오사카점은 8층 6600평이나 오사카보다 영업이 잘돼 매출은 미쓰꼬시 동경본점 다음으로 높은 2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일본의 대륙 진출로 철도를 포함한 기반시설 확충공사가 많았고 각종 산업 확대로 일본 자본은 경성과 상해를 넘어 유럽 고가미술품 시장의 신흥부자인 큰손이었다. 당시 경성 시내의 카페 영업 형태는 다양했으며 초반에는 주로 일본인 거주지역인 남촌을 중심으로 번성하다가 점차로 조선인 거주지인 북촌으로 반경을 넓혀갔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영토가 대만과 조선을 넘어 만주국을 세우는 번성기에 카페는 그야말로 활황을 맞이했다. 카페에 출입하는 학생 수가 눈에 띄게 늘어가자 일본이나 조선에서 사회적 이슈가 된다.

‘환락경歡樂境인 카페-와 카페-출입出入의 학생문제學生問題’(1932년 7월)에서 중동학교 교무주임 안일영은 학생의 카페 출입을 통제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경찰에서는 조선인 학생의 카페 출입으로 풍기문란이 있더라도 무슨 일인지 묵인하는 경향이 있어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한다.

학교당국은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영업의 자유라는 답변만 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해답이 중외일보 기사(1930년 2월 4일)에 있다.(사진)

중외일보 1930년 2월 4일자.
중외일보 1930년 2월 4일자.

우측 기사 ‘불량학생不良學生 거절책’ 내용은 카페에 출입한 학생 백여 명을 경찰서에 호출 훈계 후에 석방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카페 업주는 학생 출입을 거절할 명분을 확보, 경찰서와 협조 총독부 방침을 따르겠다는 내용이다.

기사 내용에서 중요한 사실은 단속지역이 일본인 거주지역 남촌 일대 카페였으며 일본인 학생 지도를 목표로 했으나 카페 출입자 중 예상치 못했던 일부 조선인 학생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불량학생 거절책’ 왼쪽 편의 기사를 보면 휘문학생 다수 등교, 연희전문 등교, 이화여전 개교협의 제목이 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시작돼 일방적인 일본학생 편들기에 항의 등교거부를 포함 시위가 전국적인 확산 과정에 나온 기사인 까닭으로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학생의 카페 출입은 단속했지만 조선 학생만큼은 퇴폐적으로 흐르는 일을 오히려 권장하고 싶었던 상황이다.

앞선 기사의 명동백작 이봉구가 20세 무렵 일본 경찰의 물고문과 강압적 조작수사에 몰려 고생하던 때 학생답게 공부하던지 연애나 하라는 충고(?)를 들었다는 회고와 일치하는 내용이다. ‘실사實査 1年間 대경성大京城 암흑가暗黑街 종군기從軍記, 카페·마작·연극·밤에 피는 꼿’(별건곤 1932년 1월 1일) 내용을 보면 이해가 쉽다.

인사동 계명구락부 아래 층에 파라다이스(樂園)라는 카페가 문을 여럿다. 개업 축하연에는 모 법률뎐문학교 교장각하가 에로 녀급의 섬섬옥수로 따르는 술잔을 들고 청산류수지변으로 일장 축사를 베프신 유명한 카페이다.

주인 마님이 눈은 댁군하고 몸집이 호리호리한 카나리야 가튼 미인-중청도 명망 가의 딸 이라는 김영자 대구에서 일흠을 날리든 강영주 노계화 이라는 기생 출신이며

1932년 발표된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의 주인공 M은 방탕한 생활을 했는데 “50전 혹은 1원만 생기면 즉시로 우동집이나 유곽으로 달려가는 그이엇습니다”라는 대목이 있다. M이 달려간 유곽은 매춘을 업으로 하는 곳이니 방탕한 생활과 부합되나 우동집은 조금 어색한 느낌이 있다.

글에 나오는 우동집은 단순히 음식만 먹는 장소가 아니다. 유곽이 일본에서 유래된 매춘의 집단촌이라면 우동XX집은 소규모 장소이며 빙수氷水XX집이라는 이름으로도 존재했고 형태는 다양했다.

따라서 일본 경찰이 명동백작 이봉구에게 연애나 하라고 했던 충고는 현재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단순한 연애만은 아니다. 일본은 조선의 청년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며 살기보다는 퇴폐적인 생활에 탐닉하는 것이 통치에 편했다.

조선총독부의 방침은 폭력과 당근을 동반했기 때문에 서점이건 카페건 그들의 뜻을 거스르며 사업적 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낙랑파라’와 같은 카페는 문화 예술적 측면에서 카페의 순기능을 이어갔다.(사진 조선중앙일보 1936년 3월 7일)

조선중앙일보 1936년 3월 7일.
조선중앙일보 1936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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