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특수잉크노동조합 의형제 원권식과 윤경락

인천투데이=김영숙 시민기자ㅣ손위나 아래로 지내다 친구가 되는 사이가 있다. 친구가 되니 가까워질 때가 많다. 그러나 반대인 경우는 어떨까? 이들을 보니 이 또한 괜찮은 관계가 아닐까 싶다. 친구에서 존중하는 선·후배 관계로 변모한 두 사람은 삼십 년 지기다.

20대 때 같은 회사에서 만나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옹다옹 살아가는 사람들. 한국특수잉크공업주식회사(이하 특수잉크)에 입사해 노동조합, 노동단체, 진보정당 활동을 30년째 해오고 있는 원권식(59) 씨와 윤경락(60) 씨다. 둘의 공통점 중 하나는 고향이 강원도라는 것. 원 씨는 강원도 영월, 윤 씨는 강원도 고성이다. <기자 말>

한국특수잉크 노동자 윤경락(왼쪽)씨와 특수잉크노조 출신 원권식 전 노동자교육기관 대표.
한국특수잉크 노동자 윤경락(왼쪽)씨와 특수잉크노조 출신 원권식 전 노동자교육기관 대표.

초대 위원장 되다

군대를 제대한 원 씨는 한 달 뒤인 1988년 10월, 주안에 있는 자동차 휠을 만드는 회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2주밖에 다니지 못했다. 대표이사한테 의자를 집어던졌더니 그다음 날 출근카드가 없더라는 것이다.

“당시 다 주는 근속수당을 아주머니들한테만 안 줬다. 노조도 없던 회사였는데 남자 직원들이 여자 직원들한테도 주라고 파업을 했다. 다음날 사장이 얘기하자고 해 한 직원이 다른 회사는 준다고 하니까 ‘그렇게 좋으면 거기 가세요’라고 비꼬는데 열 받아서 그랬다.”

그러고 입사한 회사에는 노조가 있었지만 직원들이 어용이라고 했다. 어용이 무슨 말인지 몰라 국어사전을 찾았다. 내친김에 노동조합과 근로기준법도 찾았다. 노조에 관심이 생겼지만 특수잉크에 근무하던 형이 자기네 회사로 오라고 해 1990년 1월에 그리로 옮겼다.

하지만 출근 첫날부터 반장한테 불려가 싫은 소릴 들어야 했다. 원 씨가 일하던 부서 반장이 동갑이라 말을 텄는데 그걸 주위에서 뭐라고 했다. 당시 회사에는 원 씨와 동갑내기가 많았다. 밤새 술마시다 출근하던 날도 많았다. 그랬던 친구들이 어느 날부터 종적을 감추더니 약속이 있다고 점점 원 씨를 멀리했다.

“어느 날 몰래 뒤쫓아가 친구들 앞을 막았다. 노조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모인 거라고 하더라. 왜 나만 뺐냐고 했더니 아무한테나 반말하고 욕을 해서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단다. 그 자리에서 주먹다짐으로 한바탕 싸웠다.”

그날 본 영화가 ‘파업전야’였다. 여성 노동자에게 빨갱이라고 괴롭히는 걸 보고 화가 나서 막걸리병을 집어 던졌는데 그게 화근(?)이 돼 초대 위원장 됐단다. 입사 1년 만인 1991년 1월 13일 노조를 결성했다. 3월경, 원 씨는 임단협으로 노조 전임자가 됐지만 총회 당일 위원장 선거를 다시 하자는 일부 조합원들의 말을 들어야 했다. 노조 결성식 때보다 조합원 수가 3배 늘었는데 초기에 선출한 위원장은 대표성이 부족하다는 논리였다.

“총회 때 친한 친구들이 출근을 안 했다. 회사 관리자가 고기를 사주면서 친구들을 회유했는데 그 꼴 보기 싫다고 안 나왔다. 회사에서 지목한 후보한테 3표 차이로 졌다.”

초대 위원장으로의 임기는 2개월이었다.

한국특수잉크노조 활동 시절 원권식 조합원이 윤경락 조합원의 머리카락을 삭발하고 있는 모습.
한국특수잉크노조 활동 시절 원권식 조합원이 윤경락 조합원의 머리카락을 삭발하고 있는 모습.

철의 규율, 청송회

원 씨는 위원장을 그만뒀지만 민주적 집행부가 한 명이라도 있어야할 것 같아 쟁의부장을 했고 민주노조를 되찾기 위해 청송(靑松)회를 만들었다. 푸르른 소나무처럼 변하지 말자는 의지를 담아 지은 이름이다. 한 달에 한 번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친목을 다지고 평소에는 경조사를 챙겼다. 그중 가장 중요한 규율은 신입사원을 일주일 안에 꼭 만나는 것이었다.

“일이 힘드니까 3일을 못 버티고 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3일이 지나도 회사에 나오면 계속 다닐 사람이었다. 일주일 안에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청송회의 철의 규율이었다.”

어느 날 직원 몇 명을 휴게실로 오라는 사내방송이 나왔다. 모두 교섭위원이어서 원 씨는 노조와 회사가 조인식을 하겠다는 생각에 그 장소로 뛰어갔다. 교섭도 마무리를 안 한 상태였기에 위원장에게 항의했고 위원장은 겁에 질려 며칠 출근을 안 했다.

“청송회 사람들이 신입사원들 만나서 다 노조 가입시켰다. 회사 눈치를 보며 가입 안 하던 사람들이 총회 전날 회사 편에 선 사람들만 회식을 시켜주는 걸 보고 다 썼다. 총회 때 우리가 이겼다.”

원 씨는 초대 위원장에서 3대 위원장이 됐고 4대와 5대 때는 조합원 100% 찬성으로 위원장을 계속했다. 원 씨가 2대 위원장을 할 때부터 윤 씨는 조직부장으로, 3대부터는 사무국장으로 함께했다.

한국특수잉크 노동조합 활동 당시 1995년 사진.
한국특수잉크 노동조합 활동 당시 1995년 사진.

오리지널이 들어왔다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했던 윤 씨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 연애편지를 대신 써줬다. 인천에 올라오자마자 인천노동자문학회 회원이 됐다. 주안역 근처 전봇대에 붙어있는 전단지를 보고 찾아갔다. 특수잉크도 전봇대 구인광고를 보고 갔다.

윤 씨의 누나는 1985년 구로동맹파업 때 지지동조 파업을 하다 6개월 구속됐다. 당시 노조 간부였던 누나의 나이는 25세였다. 얼마 전 민주화보상법 대상에도 포함됐다.

“누나네서 소모임을 많이 했는데 심상정 국회의원도 그때 만났다. 누나와 같이 살다가 시골에 가니까 아버지가 누나를 빨갱이라고 하더라. 누나가 하던 거 해보고 싶어서 인천에 왔다.”

1992년에 입사한 윤 씨는 청송회 철의 규율에 따라 일주일도 안 돼 원 씨와 만났다. 둘의 첫 만남이 궁금했다.

“경락 형 옆 부서에 있는 청송회 회원한테 미리 들었다. 누나 얘기를 듣고 ‘오리지널이 들어왔다’고 하더라. 둘이 술 한잔하는데 너무 착해 보였다. 술도 잘 못 마셨는데 잠깐 바람 쐬고 온다고 하더니 집에 갔다.”

“같은 부서에 노조 간부가 있었다. 담배 피우고 있는데 옆 부서의 누군가 말을 걸더라. 딱봐도 위장취업자였다. 누나와 살 때 많이 봐와서 한눈에 알았다. 내가 선을 잘 맞춰야 할 거 같다고 했다. 수준들을 잘 맞추는 게 같이 살고 이기는 길이라고 했다. 청송회를 같이 만들었고 노조 집행부도 같이 했다.”

노조 사무국장이었던 윤 씨는 1999년 1월 6대 노조 위원장이 됐다. 원 씨가 5대 임기를 마치자마자 회사는 그를 반장으로 진급시키고 조합원 자격을 없애기 위해 바로 계장까지 승진시켰다. 그러나 원 씨는 원천징수 안 되는 조합비를 별도로 내며 노조 부위원장으로 활동했고 파업할 때도 함께 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손

노조 부위원장이었지만 회사 중간관리자였던 원 씨는 고민이 많았다. 회사 안에서만이 아닌 인천지역에서 더 많은 노동자들을 만나야겠다는 결심으로 퇴사하고 민주주의 민족통일 인천연합(이하 인천연합) 노동위원장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했다.

한국특수잉크 초대 노동조합 위원장 원권식
한국특수잉크 초대 노동조합 위원장 원권식

단체 상근하면서 출근하듯이 노동조합을 방문해 연대투쟁했다. 그러다 또 다른 도전과 마주했다. 2006년 3월, ‘변혁의 눈으로 노동해방을 여는 노동자교육기관(이하 교육기관)’ 창립대회 때 대표 역할을 맡았다.

“창립대회 때가 기억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해본 적이 없어서 떨리고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대표 인사말로 내 손을 이야기했다. 특수잉크에서 일할 때 허구한 날 유기용제를 만지니까 휴지로 닦아 불을 붙이면 불이 났다. 화학가루가 묻어있어 손가락 한 마디에 티눈이 예닐곱 개 있어 한 손에 40여 개가 박혀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이 안 쥐어져서 칼로 티눈 구멍을 도려내면 피가 쏟아졌다. 그때 누가 악수하자고 하면 나도 모르게 손을 감췄다. 그 당시 주안 노동자 쉼터인 ‘골목집’이 있었는데 동갑내기 김영미가 상근을 했다. 영미네 놀러가 남편인 한상욱 선배를 처음 봤다. 악수하자고 했는데 내가 못 내미니까 덥석 잡으면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손을 갖고 계시는군요’라고 하더라. 노동자 손으로 못 만드는 것이 없고 만들다가 거칠어진 이 손이 가장 아름답지 않냐고 말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세상에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 처음 봤다. 충격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활동할 수 있었던 힘 중 하나가 그때다. 사람을 확 바꿔버리는 말이었다. 잊어버릴까 봐 집에 오자마다 써놨다.”

원 씨는 이 사연을 교육기관 창립대회 때 인사말로 대신했고 그 자리에서 사연을 들은 신현수 시인이 ‘원권식의 손’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다.

원권식 노동자의 손
원권식 노동자의 손

노동을 오래 했으면

원 씨는 2014년 정의당 구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거주지뿐만 아니라 직장인 교육기관이 있던 지역이었다. 당선될 생각보다는 정의당을 알리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 용기냈다. 그런 원 씨를 보는 윤 씨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회사 나가고 교육기관 대표할 때 저 인간은 뭐 먹고 사나, 생활은 어떻게 하나 궁금했다. 최저임금도 안 되는 상근비로 빠듯하게 사는 게 걱정됐다. 나 같으면 누가 시킨다고 못 한다. 권식이는 열정이 있으니까 할 수 있었던 거다.”

한국특수잉크 윤경락 노동자
한국특수잉크 윤경락 노동자

윤 씨는 취미가 많다. 어릴 때부터 고향 저수지에서 낚시를 배워서 배낚시, 바다낚시 모두 좋아한다. 그러나 물고기를 많이 잡고 싶은 욕심은 없다. 잡으러 가는 준비만 해도 좋단다. 잡히면 좋고 안 잡혀도 상관없다고 했다.

“커피 마시는 것도 좋아한다. 회사에서도 블랙커피를 수시로 마시고 쉬는 날에는 집 근처나 공원 앞 카페에 간다. 어떨 땐 책 한 권 들고 간다.”

윤 씨의 말에 원 씨는 얼굴도 커피색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놀린다. 개구쟁이들 같다. 윤 씨의 취미는 또 있다. 찜질방 투어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탕에 간다. 예전엔 찜질방에 자주 갔는데 코로나 때 찜질방이 없어져서 목욕탕에 간다. 땀을 빼니까 좋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유기용제나 안료가 피부에 스며들어서 땀을 빼야 나온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를 위해 찜질방을 간다.”

윤 씨의 말에 원 씨도 맞장구를 친다. 잉크 안료가 밀가루보다 몇백 배는 가늘고 부드러워 웬만해선 몸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원 씨의 응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퇴직 전에 문집을 내볼까 한다는 계획도 들려줬다. 생각 잘 했다는 원 씨의 응원이 이어졌다.

“예전엔 살아가는 얘기, 세상 보는 얘기, 집안 얘기 등을 일기처럼 많이 썼다. 그런데 그게 다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가끔 쓰지만 어떤 형태로든 책을 내고 싶다.”

지금까지 원 씨의 얘기를 묵묵히 듣던 윤 씨의 계획에 열망이 느껴졌다. 원 씨는 어떤 계획이 있을까.

“노동을 오래 했으면 좋겠다. 교육기관 상근할 때 새벽에 학교 급식 식재료 배달을 했다. 한 초등학교 조리장이 늘 따뜻하게 맞이해 대화를 많이 했다. 어느 날 자신이 하는 일을 비관적으로 얘기하길래 ‘조리장님이 만든 밥 먹고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이 나와요. 누구보다 훌륭한 손을 갖고 있어요. 직업에 대해 자신 있게 생각하세요.’라고 예전에 내가 들은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해 자신한테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 처음 봤다고 하더라.”

교육기관 대표를 지난해 그만둔 원 씨는 요즘 마트에서 일한다. 지금까지 노동단체 상근을 했던 그는 경제적으로 집에 도움을 준 게 1년 됐다고 한다. 손과 발이 저리고 몸이 많이 피곤하지만 가능한 오랫동안 노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특수잉크노동조합 원권식(왼쪽) 초대 위원장과 윤경락 6대 노조위원장.
한국특수잉크노동조합 원권식(왼쪽) 초대 위원장과 윤경락 6대 노조위원장.

아침에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아이들한테 많이 하는 말이 ‘가장 일찍 일어나는 새가 가장 많은 먹이를 먹는다’였다. 나도 그렇게 산다. 부모한테 배운 게 습관이 됐다.”

원 씨의 말에 윤 씨가 농촌 출신이라 비슷하다고 했다. 휴가 때 시골에 가면 부모님이 그 새벽에 밭에 다녀오신다고 한다. 본인도 새벽에 일어나지만 참 부지런하시단다. 윤 씨의 말에 원 씨는 그의 얘기를 한다.

“학교 식자재 배달했을 때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그때 경락이 형이 새벽에 출근하는 모습을 종종 봤는데 기분이 좋더라. ‘오늘 로또 사야겠다’고 페이스북에 올린 적도 있다. 30년을 같이 살았다. 내가 위원장일 때 사무국장을 했고 교육기관 대표로 있을 때 형은 회원으로 내 옆에 있었다. 정의당 구의원 후보로 나왔을 때는 당원으로 내 선거운동을 도왔다. 나는 대표를 많이 했는데 형은 꾸준히 돕는 역할을 주로 했다. 그러나 한 번도 변하지 않고 한결같았다. 그 꾸준하고 성실한 모습에 고개 숙여지면서 미안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예전엔 친구로 지내면서 말을 놨는데 어느 순간 형을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에 형이라고 불렀다.”

원 씨가 진지하게 말하자 민망했는지 윤 씨가 너스레를 떤다.

“시골에서는 1년 선배가 제일 무섭다. 처음엔 뭐 저런 새끼가 있나 생각했다. 한동안 적응 못했다. 근본이 없는 사람이다.(웃음)”

지금은 형이라 들어도 별 감흥이 없단다. 아니 친구인지 형인지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여전히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서로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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