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석 보훈부 장관 “열린 자세로 재평가 생각”
죽산기념사업회 “명예회복 관련 발언 처음...환영”

인천투데이=박규호 기자│국가보훈부가 죽산 조봉암 선생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고인 사망 후 훈장을 수여)할 뜻을 시사했다. 죽산기념사업회는 환영한다고 밝혔다.

박민석 국가보훈부 장관은 지난 13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열린 자세로 죽산에 대해 한번 재평가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죽산 조봉암 선생 묘역. 
죽산 조봉암 선생 묘역. 

박 장관은 “죽산은 초대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며 토지개혁 1등 공신 역할을 했다”며 “이것이 결국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기반이 됐다고 많은 전문가가 언급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진보당 사건 등 죽산의 정치적 행보 같은 부분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죽산 조봉암은 1899년 인천 강화군에서 태어난 항일 독립운동가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다.

죽산 조봉암은 1948년 남한이 단독으로 치른 5.10 초대 민의원(=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됐다. 제헌 의원으로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했고,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주도했고 1950년 국회 부의장에 선출됐다. 

죽산이 이끈 토지개혁은 훗날 대한민국 산업화의 기틀이 됐다. 죽산은 정부가 당시 강제로 땅을 뺏는 것이 아니라 지주에게 농지채권을 주는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시행하게 했다.

지주들이 이 채권으로 땅을 살 땐 시중 가격의 30%만 쳐줬다. 하지만 지주들이 일제 적산을 매입할 땐 채권 가격 그대로 인정했다. 지주들은 정부로부터 적산을 매입했고, 이는 자본축적의 토대가 됐다. 농민들에겐 무상에 가깝에 토지를 분배했다.

토지개혁 성과와 국민의 지지를 토대로 1956년 무소속으로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죽산은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를 노선으로 내걸고 30%가 넘는 지지(=216만표)를 얻었다.

이 같은 지지로 토대로 죽산은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했다.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1958년 1월 죽산에 간첩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죽산은 간첩 누명을 쓰고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2011년 1월 대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리면서 복권됐다.

죽산기념사업회는 박 장관이 죽산의 서훈 추서를 시사하자 늦었지만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대환 죽산기념사업회 부회장은 <인천투데이>와 통화에서 “죽산기념사업회는 박 장관이 서훈 추서를 시사하자 긴급회의를 열었다”며 “역대 보훈처장이나 정부 보훈 책임자가 죽산의 명예회복에 관련된 말은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박 장관이 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하겠다고 시사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이다”며 “진일보한 생각이다. 박 장관의 발언을 높이 평가하며 환영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박 장관은 해당 인터뷰에서 사견을 전제로 재평가를 이야기했다”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죽산의 온전한 명예회복을 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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