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 한국 이민사 120주년
②-하 고된 노동 속 고국 독립에 헌신
가처분소득 25% 독립운동 자금 모금
하와이 독립유공자 인정 80여명 뿐
“하와이 독립운동 재조명 할 적기다”

인천투데이=김현철 기자│

‘디아스포라’는 특정 민족이 자의 또는 타의로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인천의 경우 1883년 개항 이후 당시 제물포항 인근(현재 중구)에 중국인이 형성한 차이나타운부터 시작해 연수구 함박마을엔 구한말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의 후손(=고려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외국인이 인천 곳곳에서 집단을 형성해 거주하고 있다.

120년 전 인천은 대한민국의 이민사가 시작된 곳이다. 인천은 대한민국 이민사가 시작한 도시이자, 하늘·바닷길로 들어온 다양한 정체성을 보유한 이주민이 정착해 살아가는 도시다. 그래서 인천을 ‘디아스포라’의 도시로 부른다.

대한민국 이민사 120주년을 기념해 이민을 떠났던 당시 동포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현재 그 후손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펴본다. <기자말>

[연재] 한국 이민사 120주년

1. 인천에서 시작한 한국 이민 역사

2. 고된 노동에도 고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민자들

3. “한국에도 MIT 같은 공대가 있어야 한다”

4. 이민 1세대 후손은 120년 후 어떻게 살고 있나

1919년 하와이 만세운동을 했던 자유극장터. 독립기념관은 이곳을, 한인들은 이곳 맞은 편 주차장이 만세운동을 한 곳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19년 하와이 만세운동을 했던 자유극장터. 독립기념관은 이곳을, 한인들은 이곳 맞은 편 주차장이 만세운동을 한 곳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와이에 전해진 하얼빈역 총성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했다는 소식이 하와이 교민에게 전해졌다.

안 의사 의거 전부터 하와이 교민들은 십시일반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있었는데 안 의사 의거 소식이 전해진 뒤 모금에 참여하는 교민들이 늘었다.

이 같은 내용은 1911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신한국보사>가 발간한 안 의사의 한글 전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신한국보사> 홍종표 주필이 쓴 ‘대동 한인 안중근’이라는 책에 안 의사 의연에 동참한 사람의 의연 금액 목록이 나와 있다.

▲오하우섬 446명(738달러 25센트) ▲카우아이섬 478명(1126달러 70센트) ▲마우이섬(236명 439달러 20센트) ▲하와이섬(435명 616달러 85센트) 등 1595명이 3236달러를 모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안중근 의사 구제공동회’에 송금했다.

당시 하와이에 거주한 한인을 4533명으로 추산하는데 한인의 35%가 기부자로 이름을 올린 셈이다.

‘대동 한인 안중근’은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사연구소장이 지난 2002년 입수해 연구한 뒤 2003년 공개하며 세상에 드러났다. 하와이 초기 이민자인 이선일 목사 가족이 보관하다 한인이민사를 연구하던 이 소장에게 건네면서다.

이 책은 미주는 물론 국내·외에서 사실상 최초로 간행한 안 의사의 전기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하와이 공동묘지에서 발견한 독립운동 흔적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 소재 오하우 공동묘지엔 유독 한글이 쓰여 있는 묘비가 많다. 묘비엔 고인의 이름, 출생·사망일은 물론 본적과 사진까지 새겨져 있다.

이들의 묘비를 자세히 읽어보면, 고인이 생전 독립운동에 헌신한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천과 밀접한 인물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민찬호, 김노디 등을 꼽을 수 있다. 민찬호(1877~1954) 목사의 묘비는 눈에 띄는 흰색이다. 1905년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2대 목사로 부임했고, 이승만(1875~1965) 박사와 함께 동지회를 창립했다.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 소재 오하우 공동묘지 내 민찬호 목사 묘비.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 소재 오하우 공동묘지 내 민찬호 목사 묘비.

민 목사는 이 박사가 한인감리교회를 나와 한인기독교회를 만들 때 함께 만든 한국기독학원의 학감을 지냈다. 한인기독학원을 만들 때 진 빚을 갚기 위해 1923년 학원 학생과 함께 고국방문단을 이끌고 국내 각지를 순방했다.

오케스트라와 야구단이 대표적이었는데 야구단이 방문해 야구경기를 펼친 곳이 인천 웃터골(현 제물포고등학교)이다.

민 목사는 해방 직전까지 독립의연금, 군수금 명목으로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정부는 공훈을 인정해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민 목사는 이 박사의 측근으로 불리지만 이 박사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내각에 참여하지 않았다.

정부가 202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한 김노디(1898~1972) 선생의 묘비도 찾아볼 수 있다. 김 선생도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 소재 오하우 공동묘지 내 김노디 선생 묘비.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 소재 오하우 공동묘지 내 김노디 선생 묘비.

김 선생은 3·1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4일부터 사흘 동안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한 제1차 한인회의에 대의원로 참석해 서재필(1864~1951) 박사에 이어 두 번째로 조국 독립을 주제로 연설했다.

민 목사와 함께 한인기독학원 교사로 일하며 1923년 고국방문단으로 인천을 방문했다. 주로 대한부인구제회에서 활동했으며, 조국이 독립한 뒤 이승만 박사와 함께 귀국해 대한민국 초대 외자구매청장(조달청장)을 지냈다.

하와이 교민이 낸 성금을 종자돈으로 만든 인하대학교 초대 이사를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인천과 하와이를 연결하는 인물로 평가받은 이유에서다. 인하대의 이름 중 ‘인’은 인천, ‘하’는 하와이를 의미한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을 재현한 모습. (사진제공 한국이민사박물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을 재현한 모습. (사진제공 한국이민사박물관)

“하와이 동포 중 독립자금 안 낸 사람 없어”

이민 초기 당시 하와이 한인 대부분은 독신 남성이었다. 이들이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고 받는 월급은 17달러였다.

고된 노동과 합숙생활로 취사가 어려워 외식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한 달에 11달러가 필요했다. 세탁비 등으로 3달러를 소비하면 남는 가처분소득은 4달러에 불과했다.

이 중 1달러를 독립자금으로 납부했다. 가처분소득의 25%를 납부한 셈이다. 하와이에서만 1920년대까지 독립자금 300만달러를 모았다.

1920년대 이후 1945년 조국이 독립하기까지 하와이 교민들은 독립자금 납부를 멈추지 않았다. 이 기간 납부한 독립자금도 수백만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한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은 “독신 남성의 경우 4달러 중 1달러를 납부했는데, 가정을 꾸린 경우 아내가 집안일을 맡아 상대적으로 삶에 여유가 있었다”며 “그런 가정은 독립자금을 더 납부했다. 하와이 교민 중 독립자금을 안 낸 사람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고 설명했다.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사연구소장.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사연구소장. 

동포들의 노력에 비해 더딘 유공자 발굴

지난해 8월엔 이민 1세대가 독립자금을 납부했음을 증명하는 영수증과 납부자 명단이 하와이 현지 교회에서 발견됐다. 이들 영수증을 보면 ‘의무금’이라고 쓰여 있다. 정기 납부를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민간 차원의 독립운동가 발굴을 지속하고 있지만, 정부 지원은 더딘 실정이다. 하와이 내 공동묘지 탁본 작업 등도 비슷한 맥락이다.

2018년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 중 ‘옥고 3개월 이상’이 폐지된 뒤 유공자를 찾는 범위가 해외로 넓혀졌지만, 하와이는 지난해부터 본격화했다.

이전까지는 ‘대동 한인 안중근’을 공개한 이 소장이 사실상 도맡아서 했다. 이 소장은 하와이 호놀룰루시 도시계획국 공무원으로 퇴직했는데, 그의 전공을 살려 1900년대 초 도면과 현재 도면을 비교해 한인들의 독립운동 근거지를 찾는 작업을 하고 있다.

1907년 미국 하와이에서 단체 24개 대표 30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5일 동안 회의한 끝에 ‘한인합성협회’를 창립했다. 당시 '한인합성협회' 회관 모습. (자료제공 크리스찬 헤럴드) 
1907년 미국 하와이에서 단체 24개 대표 30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5일 동안 회의한 끝에 ‘한인합성협회’를 창립했다. 당시 '한인합성협회' 회관 모습. (자료제공 크리스찬 헤럴드) 

‘한인협성회관’, ‘한인기독학원’ 등의 터를 찾은 사람도 이 소장이다. 현재는 당시 동포들이 건물을 사고팔았던 토지거래 내역 등을 토대로 독립운동 흔적을 찾고 있다.

이 소장은 “1990년대 초 한인 이민사 90주년이 됐을 때 10년 후면 100주년인데 지금부터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며 “30년을 했는데 아직 찾거나 연구할 자료가 많이 남았다”고 설명했다.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하는 인원은 최소 3500여명이다. 현재까지 포상받은 유공자는 82명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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