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 한국 이민사 120주년
②-상 고된 노동 속 고국 독립에 헌신
노동자 자치조직이 독립운동 단체로
하와이 독립운동 불 지핀 ‘3·1 운동’

인천투데이=김현철 기자│

‘디아스포라’는 특정 민족이 자의 또는 타의로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인천의 경우 1883년 개항 이후 당시 제물포항 인근(현재 중구)에 중국인이 형성한 차이나타운부터 시작해 연수구 함박마을엔 구한말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의 후손(=고려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외국인이 인천 곳곳에서 집단을 형성해 거주하고 있다.

120년 전 인천은 대한민국 이민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인천은 대한민국 이민사가 시작한 도시이자, 하늘·바닷길로 들어온 다양한 정체성을 보유한 이주민이 정착해 살아가는 도시다. 그래서 인천을 ‘디아스포라’의 도시로 부른다.

대한민국 이민사 120주년을 기념해 이민을 떠났던 당시 동포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현재 그 후손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펴본다. <기자말>

[연재] 한국 이민사 120주년

1. 인천에서 시작한 한국 이민 역사

2. 고된 노동에도 고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민자들

3. “한국에도 MIT 같은 공대가 있어야 한다”

4. 이민 1세대 후손은 120년 후 어떻게 살고 있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을 재현한 모습. (사진제공 한국이민사박물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을 재현한 모습. (사진제공 한국이민사박물관)

이민자들, 사탕수수 농장 내 자치조직 결성

한국 첫 이민자들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나가사키에 들러 신체검사와 비자발급을 마쳤다. 1902년 12월 29일 나가사키를 출발해 1902년 12월 31일 고베, 1903년 1월 3일 요코하마를 경유해 1903년 1월 13일 미국 하와이에 발을 내딛은 86명이 한민족 이민사에서 첫 공식 이민자로 기록되고 있다.

121명이 제물포항을 출발했지만, 19명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탈락했고, 남은 102명 중 16명은 하와이에서 실시한 선상검사에서 탈락해 송환됐다.

이후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저지른 을사늑약 전까지 64차례 이민이 이뤄졌고 이 때 하와이 땅을 밟은 한인은 7415명이다.

이들은 호놀룰루항에서 2km 떨어진 오아후역으로 가 기차를 타고 와이알루아 사탕수수 농장으로 향했다. 한인들은 농장 인근 모쿨레이아 캠프에 모여 살았다.

각 농장주들은 노동자끼리 뭉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인을 비롯해 중국인, 일본인, 필리핀인, 포르투갈인 등을 섞어서 고용했다. 서로 대화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 때 한인들은 각 농장 단위로 10명 이상 모이면 자치조직을 만들었는데 ‘동회’라고 불렀다. 초기 하와이 한인 사회는 ‘동회’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와이나이(지역) = 박기장(동장) ▲니와이 = 승용환 ▲와이알루아 = 이종열 ▲하아마누 = 이원식 ▲하킬라우 = 최성찬 ▲호노키아 = 강순종 ▲코나남부 = 강승진 ▲코나북부 = 최성원 ▲코나본동 = 이대진 ▲카파아 = 김경순 ▲하나 = 박용택 ▲파야 = 장영환 등이다.

각 동회는 동장과 사찰을 선임하고 공공질서와 친목을 유지했다. 동장은 동회의 대표이며, 사찰은 사무를 관장하는 사람이었다.

1907년 미국 하와이에서 단체 24개 대표 30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5일 동안 회의한 끝에 ‘한인합성협회’를 창립했다. 당시 '한인합성협회' 회관 모습. (자료제공 크리스찬 헤럴드) 
1907년 미국 하와이에서 단체 24개 대표 30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5일 동안 회의한 끝에 ‘한인합성협회’를 창립했다. 당시 '한인합성협회' 회관 모습. (자료제공 크리스찬 헤럴드) 
당시 한인합성협회가 있었던 자리. 
당시 한인합성협회가 있었던 자리. 

각 동회를 중심으로 정치성 띄는 단체 결성

1904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 내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된 제1차 한일협약과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했다는 소식이 하와이 한인들에게 전해졌다.

일제는 을사늑약 이후 하와이 내에서 한인들이 일본인의 일자리를 뺏는 것을 우려해 한인 이민을 전면 금지 시켰다.

하와이 한인들에겐 대한제국이라는 정부를 대신해 스스로를 보호하고 일제의 지배·간섭에 대응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됐다. 이에 각 동회는 보다 정치성을 띄는 단체로 확대개편했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단체는 홍승하를 대표로하는 신민회였다. 결성 시기는 1904년 가을로 추정한다. 이들의 목적과 활동은 ‘구국정신 고취’와 ‘항일운동’이었다.

이를 이어 1907년까지 한인단체 24개가 만들어지는데 이들의 주요 구호를 보면 ‘항일운동’, ‘일화배척’, ‘환난상구’, ‘대동단결’, ‘대한제국부흥운동’, ‘인재양성’ 등이다.

이들은 1906년 2월 15일 전체 재미한인과 ‘배일(일본을 배척)’을 결의하고,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하기로 뜻을 모았다.

1907년 조국에서 고종의 퇴위 소식이 들려오자 하와이 한인들은 본격적으로 조직 건설에 매진했고, 단체 24개 대표 30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5일 동안 회의한 끝에 ‘한인합성협회’를 창립했다.

하와이 한인 여성단체 ‘자녀 교육에서 독립운동으로’

당시 하와이 한인 여성 중엔 ‘사진신부’가 많았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가족을 제외한 한인 이민을 금지하며 생긴 풍습이다. 예비남편의 사진만 보고 고국을 떠나 이민을 시작한 여성이 ‘사진신부’이다.

1924년 미국이 동양인배척법을 만들며 ‘사진신부’가 금지되기 전까지 하와이로 건너간 ‘사진신부’는 1000여명으로 추산한다.

사진신부와 사진신랑. 
사진신부와 사진신랑. 

이들은 한인 교회를 거점으로 여성단체를 만들어 자녀교육에 힘쓰는 한편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08년 무렵 신명부인회를 조직하는데 재미 한인 최초 여성독립운동 단체이다.

1909년엔 여성 교육 등을 목적으로 부인교육회가 생긴다. 남녀 평등, 자녀 교육, 여성의 자기계발 등을 강조했고 구국운동을 지향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재판을 받게 된 안중근 의사을 위해 재판 경비를 모금하기도 했다.

이후 1913년 4월 19일 이들 단체 2곳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단체 2곳 등 단체 4곳이 합심해 대한인부인회가 발족한다. 황마리아 등을 주축으로 자녀의 국어 교육을 장려하고, 가정 내 일본 제품을 배척하는 하며 선교 활동에 많은 힘을 쏟았다.

국가기록물 제12호로 지정한 '대한독립선언서'. 1919년 대한부인구제회가 이를 재인쇄해 판매했다. (자료제공 독립기념관)
국가기록물 제12호로 지정한 '대한독립선언서'. 1919년 대한부인구제회가 이를 재인쇄해 판매했다. (자료제공 독립기념관)

하와이에서 이어진 3·1 만세운동

1919년 하와이 교민들에게 조국에서 벌어진 거사가 전해졌다. 1919년 3월 1일부터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3·1 만세독립운동이다.

하와이에선 1919년 4월 2일 첫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같은 해 6월 15일 1800명이 당시 하와이 자유극장 터에 모여 조국에서 벌어지는 독립운동을 도울 계획을 의논했다.

1919년 하와이 만세운동을 했던 자유극장터. 독립기념관은 이곳을, 한인들은 이곳 맞은 편 주차장이 만세운동을 한 곳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무렵 대한인부인회와 사진신부 심영신, 이희경 등은 국내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하와이 각 지방 부녀대표자 41명을 소집해 부녀공동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후원을 결의했다. 2차 대회에서 이들은 대한부인회를 해소하고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한다.

이들은 단체 목적으로 ▲하와이 부녀사회 운동역량 집중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독립전쟁 출정군 구호를 위한 적십자대 훈련 ▲항일독립 외교선전 후원 등을 내걸었다.

대한부인구제회는 당시 대한독립선언서 3000장을 재인쇄한 뒤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했는데, 당시 기술로는 파격적으로 컬러로 인쇄했다. 2000달러를 벌었는데 1500달러는 3·1 만세운동 사상자를 위해, 500달러는 자신들이 별도로 모은 돈 300달러를 보태 독립군에 지원했다.

다음 편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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