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미추홀도서관 똘레랑스 인문사회특강 (1)
17세기 차간칸과 보그도이칸의 전쟁과 평화
청과 러시아 근대 평화조약 네르친스크 회담

인천투데이=방의진 기자│

‘변경’이라는 말은 나라 경계가 되는 변두리 땅이라는 의미다. 역사적으로 변경은 다양한 문화가 모여드는 곳이라 이곳을 잘 활용하면 창조의 공간이 됐다.

변경은 접촉이 빈번히 일어나는 경계지라는 점에서 ‘메트로폴리스’와도 맥을 같이 하지만 개념은 다르다. 메트로폴리스는 중심지에 있는 대도시나 항구가 여기에 속하지만, 변경은 작은 변방이다.

17세기 러시아와 청은 변경을 이용해 서로의 문화를 수용했던 나라다.

박지배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17세기 유라시아 청과 러시아 관계를 강의했다. 17세기 러시아와 청나라 두 제국이 어떻게 조우하고 충돌했는지, 그 가운데서 어떤 방식으로 상대 문화를 수용했는지가 주제다.

이번 강의는 인천시 미추홀도서관이 주최하는 똘레랑스 인문사회특강으로, 주제는 '유라시아 역사문화 기행'이다. 4월 7일부터 4월 21일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3번에 걸쳐 진행한다.

지난 7일 열린 1강 주제는 ‘17세기 차간칸과 보그도이칸의 전쟁과 평화’이다. 2강은 ‘잊힌 전선:제2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한반도’이고, 3강은 ‘시베리아 횡단철도, 대륙을 건설하다’가 주제다.

지난 7일 진행한 똘레랑스 인문사회특강 1강을 정리했다.<기자 말>

변경에서 성장한 청과 러시아, 두 제국의 만남

청과 러시아는 중심지가 아닌 변경에서 성장한 나라다.

러시아는 유럽이지만 아시아 특성도 있다. 러시아 황제 차르는 서방 국가 관계에서 ‘바실레우스’라는 칭호를 표방했다. 바실레우스는 동로마 황제 칭호다. 러시아가 기독교(동방정교회)를 적극 수용했기 때문에 이같은 칭호가 가능했다.

러시아는 내륙 아시아에서 킵차크 칸국의 계승자였다. 킵차크 칸국은 남러시아에 성립한 몽골왕조인데,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다.

이는 청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청 황제는 남쪽에서 중국 대륙을 다스린 중화황제였으나 북쪽 초원에서 몽골 종족이 섬기는 황제였다. 

청과 러시아는 여러 문화가 혼합된 변경지역에서 발전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후에 양국은 조우하고 충돌하게 된다. 

20세기 러시아제국 지도. 강의자료 중 갈무리.
20세기 러시아제국 지도. 강의자료 중 갈무리.

16~17세기 러시아-청나라 조우와 충돌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상황을 보면, 러시아와 청은 한창 세력을 넓혀가던 때였다. 당시 러시아는 동쪽으로 팽창하고 있었고, 청나라는 서쪽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16세기 러시아는 현재 러시아 도시인 카잔과 아스트라한을 점령한 후 동쪽으로 팽창한다. 17세기 중엽 아무르에서 청과 조우했다. 아무르는 현재 러시아와 중국을 국경으로 흐르는 강이다.

17세기 여진족(만주족)이 세운 청은 명나라를 정복하고 아무르로 북진한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러시아와 군사 충돌이 벌어진다.

아무르에서 전쟁을 벌이지만 러시아 군대 카자크는 얼마 안 가 점차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식량 보급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시아 군대는 식량을 얻기 위해 송화강을 침투했는데 여기에 조선군이 파병되기도 했다. 국내엔 나선정벌로 알려진 전투다.

수년째 계속되는 전투에 러시아와 청나라는 지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양국이 외교협상과 평화 대화 필요성을 느끼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와 중국 충돌 이미지. 강의자료 갈무리.
러시아와 중국 충돌 이미지. 강의자료 갈무리.

외교문화 차이 진통, 스파파리 사절단에서 합의

청과 러시아의 만남은 시도가 여러번 있었다. 하지만 의례 문제와 외교문화 차이로 진통을 겪었다.

1654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보낸 공식 사절단이 청을 방문한다. 바이코프가 이끈 사절단이 청나라를 방문했는데, 이들은 ‘고두’라는 외교문화 때문에 황제를 만나지 못 했다.

고두는 머리를 조아려 경의를 표하던 예다. 사절단은 러시아 황제에게도 절하지 않았고, 기독교라는 종교 문제로 고두를 할 수 없었다.

1675년 러시아는 다시 철저한 준비를 마쳐 청을 방문한다. 스파파리 사절단인데, 2년동안 준비하고 1년 2개월만에 북경에 도착했다. 하지만 준비가 철저했음에도 의례문제와 외교문화 차이 극복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청과 러시아는 국서 대우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다. 스파파리 측은 국서를 황제에게 직접 건네고 싶다고 했고, 청은 러시아 측에 관리를 거쳐 국서를 건네라고 했다.

한 달간 외교 의례 논쟁을 이어갔다. 결국 양국은 합의에 성공했고, 황제에게 직접 건네는 방식은 아니지만 국서를 특별대우하고, 고두를 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러시아와 청 만남은 성사됐지만 외교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청이 외교문화 차이를 극복하고 공식으로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러시아와 청 평화로 들어서는 길목, 네르친스크 회담

1689년 8월 러시아와 청 대표단이 네르친스크 회담을 했다. 이는 중앙유라시아 두 제국이 맺은 국제조약이다.

러시아와 청은 국경선을 잘 긋고 영토를 분명히 하자는 것을 주제로 논의했다.

앞서 1665년 러시아 군대가 아무르 상류에 요새 알바진을 건설했다. 청나라는 아무르 유역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러시아를 공격하게 된다.

네르친스크와 알바진 위치. 강의자료 갈무리.
네르친스크와 알바진 위치. 강의자료 갈무리.

러시아는 알바진을 사수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청도 이에 지쳐가던 중, 양국은 회담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양국이 합의한 회담이 네르친스크 회담이다.

러시아와 청나라 대표단은 1689년 네르친스크라는 변경에서 회담을 했다. 

이 조약은 유럽 나라와 중국이 맺은 최초 근대 조약이라는 평가가 있지만, 중앙유라시아 두 제국이 맺은 국제조약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게 더 타당하다. 

세부사항을 보면 유럽이나 서유럽 방식으로 맺은 조약이 아니라 내륙 아시아 혼종이었기 때문이다.

네르친스크에서 만난 청과 러시아. 강의자료 갈무리.
네르친스크에서 만난 청과 러시아. 강의자료 갈무리.

변경지역에서 발달한 두 제국은 변경에서 모여 회담을 평등하게 진행했다.

러시아와 청 대표단은 말에서 내리는 것도 동시에 했는데, 이는 내륙 아시아 문화였다. 말에서 먼저 내리면 아랫사람이라는 문화가 있었다. 러시아도 이 문화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존중해 서로 동등하게 진행했다.

또, 대표들만 의전용 의자에 앉고 나머지 대표단은 뒤로 서는 문화가 있는데 이건 러시아 문화다. 

박지배 교수는 “러시아와 청나라 두 제국이 조우하고 충돌하는 가운데 어떤 방식으로 상대방 문화를 수용하고 자신 문화를 섞어 융합하고 공존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의미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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