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언 법무법인 위공(송도)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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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ㅣ2022년 새해가 밝았다. DNA의 숙주인 인간은 세상의 물질과 접촉하며 그에 반응해 천고의 역사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새해의 운세는 점집보다는 역사 속에서 찾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오늘 회고해 볼 역사는 중국 진나라의 멸망에 대한 얘기다.

진군법과 진나라의 약진

중국에 최초의 통일정치체제가 성립한 시기는 기원전 221년이다. 전국시대 국가 7개 가운데, 서쪽의 제일 변방에 있던 약체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진나라의 법률체제 때문이었는데 이 법제를 완성한 사람은 기원전 338년 사망한 상앙이다.

상앙은 조선의 조광조처럼 홀연 임금에게 전권을 받아 나라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상앙은 부모자식과 형제자매가 같은 방에서 자지 못하게 하고, 성인남자가 한 집에 2명이 있으면 분가하게 했다.

직업을 갖게 장려하고 놀고먹는 자는 귀족이나 부유한 자들이라고 해도 모두 노예로 삼아 황무지를 개간하게 했다. 또 20등급의 상벌고과를 정해 전공과 포상을 엄격히 행하였다. 그 밖에도 도량형을 통일하고 지방정부 체계를 수립했다.

역사가들은 이걸 ‘상앙의 변법’이라고 불렀다. 사실상 이는 거의 모든 면에서 국가 체제와 연관한 것들이었다.

진나라는 이 법에 따라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효율적인 군사제도를 정비함으로써 백전백승을 거뒀다. 체제혁신으로 진보를 향해 내달린 끝에, 120년 만에 전국 7웅 중 가장 약체국가가 중국을 통일했다.

진보의 끝과 승상 이사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 진나라 모든 백성들은 군사 제도 내로 편입됐다. 엄격한 상벌 적용을 받았다. 7국을 통일하기 위한 거대한 전투들이 연이어졌다. 어떤 전투에선 적군 30만명을 죽이기도 했다.

진시황은 통일과 동시에 북방의 경계를 보호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과 시황릉이라는 거대한 궁궐 건축에 백성을 동원했다. 이 시스템은 발전과 진보를 위한 것이었는데, 그 1차 목적을 이룬 다음에는 어디로 이 역량을 쏟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나라를 전국 7웅의 맹주로 만들어낸 백성은 더는 견딜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정답은 ‘멈추는 것’이었다.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진보’의 내용이 달라지는 정책의 변화가 필요했다.

진시황을 보좌하며 행정을 총괄했던 승상 이사는, 과중한 노역과 엄격한 법 집행으로 힘들어진 백성이 궁지에 몰려 이판사판으로 행동 하고 있음을 제대로 파악했다. 이에 그는 행정부를 대표해 제국의 정책을 알맞게 조정함으로써, 노역을 경감하고 형법을 완화하는 내용을 담아 진시황 2세에게 상서문을 올렸다.

승상 이사는 상서문에서, 고대 중국의 성왕 요임금과 우임금을 본받아 부지런히 일하고 힘을 다해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위난을 겪은 제국을 부흥시켜주기를 기대했다.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진2세가 이 상서문에 반대한 것이다. 진 2세는 이렇게 답문을 내렸다.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요는 장식 없는 허름한 집에서 질그릇에 밥과 국을 말아먹으며 정치를 했다. 역참의 객실과 문지기의 음식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는 황하의 막힌 곳을 뚫어 바다로 통하게 했는데, 이 일을 하면서 우는 정강이의 털까지 닳아 없어지고 손발에 못이 박혔다.

노예라 할지라도 그 수고로움이 이처럼 가혹하진 않을 것이다. 이런 일들은 우매한 이들이 억지스럽게 하는 일이지, 총명하고 현명한 이가 하는 일이 아니다.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천하의 이로움을 오래도록 향유하되 천하로 인해 고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 2세는 진나라가 진보를 추구하는 과정과, 그 정점에 있던 아버지 진시황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지켜보며 자랐다. 그는 아버지가 중국을 통일했지만, 그 후 세상에 오래 전해질 덕행이나 글이 없는 것도 보았다. 그래서 진시황이 자신을 남기기 위해 거대한 궁궐과 성곽과 묘지를 짓는 것도 보았다.

진 2세는 시황제의 묘지에 시황제의 후궁 중 자녀가 없는 비빈을 죄다 순장했다. 또 능묘의 도굴을 막기 위한 각종 기계장치의 비밀이 장인들에게 누설될 것을 염려해 장례를 마친 뒤 능묘의 문을 모두 폐쇄하고, 장인을 모두 산 채로 매장했다.

그리고는 당대의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행정부의 각료들에게, 나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 외에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갈등이 잘 진정됐다면 진나라는 꽤 오래 지속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승상 이사는 이 갈등을 진정시킬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자신이 진나라의 발전노선, 진보노선의 집행자였다. 공리주의자였다.

이사는 효과를 위해선 무슨 절차든 동원하는 것을 칠순까지 해온 노회한 정치가였다. 그는 정치의 본질이 권력이며, 권력이 정견보다 우선이고 정치의 본질은 도덕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사는 정책전환이 필요함을 잘 알면서도 권세와 이해득실을 위해 진 2세에게 ‘독책을 행하길 주청하는 상서’를 다시 올린다. ‘독책’이란 조선의 연산군처럼 신하의 허물을 계속 추궁하는 감찰정치를 말한다.

진2세는 독책을 실시했다. 나중엔 ‘사슴을 보여주며 이건 말(지록위마)’이라고 한 후, 사슴이라고 말한 신하들을 나중에 숙청했다.

진나라는 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반란군보다 군사적으로 월등했다. 진승, 오광의 난을 가볍게 평정했다. 초나라 항우와 싸움에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독책을 실시 중인 진 2세 정부는 진압군을 지원하지 못했다. 결국 진나라는 진시황 사망 4년 만에 멸망했다.

대한민국에 다시 돌아온 질문, 진보란 무엇인가

진나라가 2200년 전에 맞았던 질문이, 이제 한반도 대한민국에 다시 돌아왔다. 올해는 1882년 임오년으로부터 140년이 되는 해이다. 1882년 조선이라는 나라는 대충 망한 나라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군이 해체되고, 군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흥선군과 고종파의 대립이 결국 청ㆍ일 등 외세의 조선 병탄으로 연결됐다.

외세의 침략, 민족 내부의 분단과 전쟁을 거쳐, 대한민국은 2021년 1945년 해방된 세계 여러 나라들 중 유일하게 G10에 가입하는 영예를 누렸다. 그 참혹한 터널을 빠져나와 선진국을 추월하기 위해, 대한민국은 ‘왜’라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고 달려왔다.

성장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기조로 달려온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20대가 묻는다. ‘저희는 당신들이 얘기하는 가치를 믿지 않는데요?’ 이들에겐 독립운동, 경제발전, 민주화 과정에서 정돈된 기성세대의 담론이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지는 것인지’ 우리의 자식들이 질문하는데, 우리는 해줄 얘기가 없다. 아니 지금까지 경제성장 조차 과연 유지가 가능한 것인지 10년 뒤가 불안하다.

2022년 대선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전 국민이 얘기하는 선거가 됨이 마땅하다. 그런데 기자들은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김건희의 기자회견에서, 기존 언론의 기자들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삼프로 티비’라는 유튜브 매체가 후보들에 대한 질문과 검증을 대신했다. 윤석열, 최재형 등 정부 고위 관료 출신들은 대선후보로 나섰으나 아무런 정책을 얘기하지 못했다. G10을 만들어 냈던 기존의 사회조직들이, 이제는 미래를 어떻게 이끌어 갈 지에 대해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반면, 아무런 공식 직함이 없는 국민 개개인은 곳곳에서 깜짝 놀랄 내공을 보여준다. 국민의 잠재력을 조직할 플랫폼이 있다면, 대한민국은 실로 웅비할 저력을 갖추고 있다고 곳곳에서 사람들의 목격담이 들려온다.

어느 후보를 지지할지를 정하는 것보다, 이 저력을 어떻게 조직할지가 더 중요한 질문 아닐까. 국민들은 우매한 백성을 이끌어줄 ‘초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어느새 전통적인 국가기구를 대체할 정도로 성장한, 국민 개개인은 자신들의 저력을 발현할 수 있게 국가가 판을 깔아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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