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송 옹 무덤에 한줌 흙으로 묻혀
덕적군도 돌며 주민 8만여 명 진료

인천투데이=박소영 기자│“틀림없이 죽을 때 이 땅에서 묻힐 것입니다”

‘서해안 슈바이처'로 불리는 메리놀 선교회 최분도 신부(본명·Benedick Zweber)가 1990년 본국 소환 공문을 받고 한국을 떠날 때 한 말이다.

지난해 고 서재송(비오, 오른쪽)ㆍ인현애(크리스티나, 왼쪽) 부부와 고 최분도(가운데) 신부(사진제공 인수호 신자)
지난해 작고한 고 서재송(비오, 오른쪽)ㆍ인현애(크리스티나, 왼쪽, 올해 작고) 부부와 고 최분도(가운데) 신부(사진제공 인수호 신자)

최 신부가 선종(善終,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음) 20년 만에 한국 땅에 흙으로 묻혔다.

최 신부의 사제서품 60주년을 맞아 그의 동료사제들은 2019년 6월 미국 메리놀 외방선교회를 방문해 최 신부 무덤에서 흙을 퍼와 서재송(세례명·비오) 부부 무덤에 같이 넣었다. 올해 1월 서재송 선생의 부인 고 인현애 여사 장례식 하관 때 넣었다.  

서재송 옹은 해외 입양인의 대부이자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이끌었으며, 최 신부와 막역한 사이였다. 

서재송 옹과 최  신부는 1960년대부터 동구 송현동, 부평구 부평동에서 아동복지시설을 운영하며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혼혈아동 등 고아들을 보살폈다.

서재송 옹은 지난해 별세해 10월 덕적도성당이 있는 인천 덕적도 서포리 해안가 동쪽 산에 묻혔다. 이곳은 생전 최 신부가 묫자리로 쓰길 원한 곳이다.

인천 굴업도핵폐기장 무산 주역 덕적도 서재송 옹 별세

최분도 신부(사진제공 인수호 신자)
최분도 신부(사진제공 인수호 신자)

“최분도 신부님은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 한 줌의 흙으로나마 한국에 묻히셨다”

최 신부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심장병 수술을 받은 인수호(세례명·미카엘) 신자는 3월 26일 해안성당에서 열린 ‘최분도 신부 20주기 추모 미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최 신부는 1932년 1월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출생한 미국인으로 1959년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

최 신부는 1956년 한강에서 익사 직전의 아이들을 구하려다 선종한 친형을 보고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인천 답동·송림동·백령도본당에서 보좌로 사목하던 최 신부는 1962년 서해도서 22개 공소를 관할하는 연평도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생전 아이들을 보살피는 최분도 신부(사진제공 인수호 신자)
생전 아이들을 보살피는 최분도 신부(사진제공 인수호 신자)

1964년 최 신부는 낡은 미군 함정을 개조해 '바다의 별'이라는 병원선(船)을 처음 출항시킨 뒤 덕적군도를 돌며 8만여 명을 진료했다.

또한 1966년 덕적도본당에 부임한 최 신부는 덕적도에 '복자 유베드루' 병원을 세워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살폈다.

최 신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섬마을 주민을 위한 자가 발전기를 설치해 불을 밝히고 상수도를 설치하는 등 생활수준 향상에 힘썼다.

최 신부는 부모를 잃은 아이, 소아마비를 앓은 아이, 혼혈아이 1600여 명을 미국으로 입양시키기도 했다. 이런 공로로 1971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최 신부는 덕적도 생활을 마친 뒤 1976년 인천 송림동본당으로 발령받아 민주화 운동에도 힘썼다.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학생·지식인을 도왔고,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의 탄압을 받을 때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1990년 미국으로 돌아간 최 신부는 1997년 러시아로 선교활동을 떠났다가 척수 골수암을 얻어 투병생활을 했다. 최 신부는 2001년 3월 미국 뉴욕 요양원에서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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