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분도 신부와 함께 고아 1600여명 보살핀 입양인의 아버지
빈소 인천길병원장례식장... 발인 10월 24일 장지 덕적도 선산

인천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 핵폐기물처리장 반대 운동을 주도한 인천의 어른이자, 입양인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덕적도 서재송 옹이 22일 자정 무렵 별세했다.

고 서재송 옹의 생전 모습.
고 서재송 옹의 생전 모습.

고 서재송 옹은 1994년 12월 김영삼 정부가 굴업도 핵폐기물처리장 건설계획을 발표하자, 주민들과 함께 1년 여간 인천과 서울 등을 오가며 수백차례 집회를 개최하고, 200여 일 동안 농성도 진행했다.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 과정에서 주민들이 여럿 구속되고, 부상을 당한 시민과 대학생도 수십명에 달했다. 인천시민과 덕적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 투쟁에 정부는 1년여 만인 1995년 12월 핵폐기장 고시를 철회했다. 서재송은 당시 대책위 공동대표였다.

서재송 옹은 또한 한평생을 전쟁고아를 비롯한 고아들의 입양사업에 몸바쳐온 입양인의 아버지로 통한다. 그는 스물한 살에 부산수산대학교에 입학했다가 한국전쟁 발발로 군에 입대해 전투에 참가하면서 참상을 목격했다.

군 제대 후 고향 덕적도에서 교사와 이장과 면 서기 등을 하다가 메리놀외방선교회 최분도(Benedict Zweberㆍ미국 출신) 신부를 만나면서 삶이 바뀌었다.

최분도 신부는 1959년부터 30여년 동안 천주교 인천교구 사제로 있으면서 서해 섬 지역에서 가난한 이, 버려진 아이들, 병든 노인, 노동자 등 소외된 이들을 보살폈다. 서해 낙도에 '병원선(船)'과 병원을 개원하고, 유신과 신군부에 맞선 민주화 투쟁을 지원했다.

그런 최 신부가 바다 일을 하다가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을 한두 명씩 데려오기 시작했고, 서재송 옹이 집은 그렇게 고아원이 됐다. 입소문이 번져 다른 지역에서도 도움을 요청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 소아마비를 앓은 아이, 혼혈아이까지 그의 손을 거쳐 입양된 이들이 1600여명에 달한다. 나이가 좀 들었거나 장애를 가진 경우는 미국 가톨릭 신자들을 대상으로 편지를 1000통씩 보내 입양했다.

서재송 옹은 입양 후에도 사후관리와 자료를 꼼꼼히 챙겼다. 그는 1982년부터 최 신부와 함께 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을 2년에 한 번 꼴로 만났다.

고 서재송 옹의 빈소는 인천길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10월 24일이며, 장지는 고향 덕적도 선포리 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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