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규 인천대이사장 (사)인천사람과문화 제76회 인천마당 강연
친일재산환수 했더니 멀쩡한 광복회관 부수고 새로 지어 ‘한심’
미군기지 빵공장 나사하나 가져가지 말라고 했고 그러기로 했다

인천투데이=김갑봉 기자 | 최용규 국립대법인 인천대학교 이사장이자 캠프마켓 시민참여위원회 위원장이 인천대학교를 민족대학, 통일 주도 대학으로 육성하고 부평미군기지(캠프마켓)를 인천시민을 위한 문화예술의 요람으로 조성하겠다고 재차 강조했다.

최 이사장의 인천대학 민족대학 육성과 캠프마켓 문화예술 요람을 향한 꿈은 오래된 미래다. 그는 틈만 있으면 이 꿈을 지속적으로 얘기했다.

그는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이사장 신현수)가 지난 22일 저녁 주최한 76회 인천마당 강연에서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최 이사장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거듭 지속해서 반복하는 이유는 자신과의 약속을 다지는 일이고,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용규 이사장은 충남 서천 출신이다. 대부분 가난해 가난이 흠이 아니던 시절 서천군 장항에서 태어났다. 집안 사정이 중학교를 보낼 형편이 못됐다. 장항초등학교 졸업 후 인천의 한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형을 믿고 인천에 올라왔다. 시험을 치르고 송도중학교에 입학하며 인천과 연을 맺었다.

대학을 나와 인천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중 지방자치가 부활한 1991년 인천 북구(현 부평구)에서 초대 인천시의회 의원을 지냈다. 그 뒤 1995년 초대 민선 부평구청장을 지냈고, 2000년~2008년 부평을에서 16~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17대 국회를 끝으로 정계를 떠났다. 국회 내 한ㆍ우크라이나친선협회 회장을 맡으며 재러시아 동포들의 실상을 보고 뜻한바가 있어 우크라이나로 떠났다. 우크라이나에서 돌아와 인천시의 요청과 추천 등으로 캠프마켓시민참여위원장과 국립대법인 인천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아래는 강연 일부를 정리한 내용이다.<편집자 주>

국립대법인 인천대학교 최용규 이사장
국립대법인 인천대학교 최용규 이사장

시의회 본회의 때 “굴업도 핵폐기장 결정하고 엠바고 걸었죠?”

초대 시의원을 할 때다. 1994년 12월 어느 날 ‘정부가 굴업도에 핵폐기물처리장을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기자들이 하는 소리였다. 얘기는 공보처 차관과 국정원 인천지부장, 기무사 인천담당, 인천의 언론사 대표 등을 모아두고 굴업도에 핵폐기물 처리장을 만들기로 했고, 언론 통제를 지시했다는 얘기였다.

공보처 차관이 엠바고를 걸어 놨으니 못 쓰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시의회로 끌고 갔다. 본회의장에서 시정질문 때 시장한테 ‘자유공원 한식당에 식사하러 간적 있죠?’라고 물으니 답을 못했다. ‘굴업도에 만들기로 했고 엠바고 걸었죠?’ 물었더니 또 답을 못했다. 그 뒤 인천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시민사회단체와 주민들이 나서 결국 막았다.

부평미군기지 얘기다. 시의원하면서 미군기지가 도시발전을 저해한다고 생각했다. 1995년 7월인가 8월에 초대 민선 인천시장(고 최기선)이 초도 방문으로 부평구를 방문한다고 할 때다. 겁도 없이 내 제안을 들어주면 업무보고를 하겠다고 했다. 최 전 시장은 통이 컸다.

제안을 들어준다니 업무보고를 마치고 최 전 시장과 함께 산곡동 경남아파트 310동 꼭대기에 같이 올랐다. 브리핑판을 설치하고 설명을 하며 시장한테 반환받자고 했다. 그랬더니 ‘나도 참여할게’라고 했고, 그 브리핑 사진이 지역언론 1면에 실렸다.

친일재산환수 했더니 멀쩡한 광복회관 부수고 새로 지어

시민들의 반환운동과 더불어 구청장으로 일하면서 난개발을 위해 도시계획을 변경했다. 원래 미군기지 일부는 산곡동 우성아파트 2차와 3차 용지였다(그래서 현재 우성 1ㆍ2ㆍ3차라고하지만 1단지만 있다). 공원과 공공시설만 들어설 수 있게 그 때 도시계획을 변경했다. 인천사람으로서 부평사람으로서 긍지 가지고 있다.

그렇게 일하다 국회에 갔다.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이 미군기지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할 때였다. 근본적으로 뿌리를 뽑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친일재산환수법)’을 만들고 조문을 직접 다 썼다. 2005년 12월 국회를 통과했다(송병준 후손은 재산환수 소송에서 패소했다).

이 법으로 정부가 회수한 친일파의 재산이 수천억 원 규모가 된다. 친일재산환수법을 만들며 법에 ‘회수한 재산은 독립유공자 선양사업에 쓰게’ 했다. 그런데 훗날 정부가 멀쩡한 광복회관 부수고 새로 짓는 데 썼다. 독립유공자를 위해 쓰자고 했는데 한심한 일이다.

국립대법인 인천대학교 최용규 이사장
국립대법인 인천대학교 최용규 이사장

미군기지로 남아있어 후대한테 물려줄 수 있게 된 역설

부평구청장 할 때 부산 하야리아 미군기지를 방문했다. 거기는 다 부수고 그 위에 2~3미터 높이로 성토했다. 그게 부평에 반면교사가 됐다. 부평 미군기지 건물은 가급적 허물지 않고, 활용방안을 찾기로 했다.

역설적으로 미군기지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기 때문에 후손들한테 물려줄 수 있게 된 역설이 있다. 같은 부평 미군기지지만 한국군이 주둔했던 곳은 현재 동아, 경남, 한양 아파트 등이 있다. 월남에서 철수한 부대가 공수부대와 백마부대가 잠시 눌러 앉고 있다가 나중에 다 팔아먹었는데, 역설적으로 미군기지는 시민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부평미군기지를 인천 문화예술의 요람으로 만들고 싶다. 인천의 유능한 문화예술인이 있어도 마땅히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다 서울로 간다. 그래선 인천은 척박하다. 예술인이 인천에서 뭘 하려고 해도 잘 유지가 안 된다. 캠프마켓이 예술의 용광로가 되게 하겠다.

부평구가 최근 문화도시로 선정돼 190억 원을 지원 받고, 도성훈 인천교육감이 한국대중예술고등학교(전 인천하이텍고등학교)를 부평미군기지로 이전하기로 공약 했다. 인천대는 미군기지에 칸막이 없는 예술대를 집어넣을 계획이다. 인천문화재단을 유치하는 방안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미군기지 빵공장 나사하나 가져가지 말라고 했고 그러기로 했다

한 때 제주도에 가면 ‘빛의 벙커’라는 종합예술이 있었다. 인천에도 이를 할 줄 아는 젊은이가 있다. 인문학과 예술, 과학, 공학, 정보통신의 통섭과 융합 교육이 필요하다. 미군기지를 ‘빛의 벙커’보다 훨씬 더 수준 높은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 예술대학에 통섭학과가 필요하다.

미군기지 인접한 주안장로에 6000여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이 있는데, 미군기지엔 이 예배당의 네배에 달하는 공간이 있다. 미술관도 되고 음악당도 되고 다 된다. 미군기지 각종 시설을 활용할 수 있는 문화예술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향후 특히 활용방안이 기대되는 건물이 미군 제빵공장이다. 빵공장은 주한미군에 전체 장병들에게 보급하던 빵을 생산하던 시설로, 그 자체로 보존가치가 높은데 지금도 가동하고 있다. 오는 6월 한국 정부한테 이관하기로 했고, 12월 인천시로 이관된다. 미군한테 나사하나 가져가지 말라고 요청했고, 안 가져가기로 했다.

학생들이 이곳에서 제빵 실습할 수 있고, 굴곡진 근현대사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는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인천에서 후원금으로 빵을 만들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들에게 운영을 맡기고, 여기서 생산하는 빵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고 추가로 발생하는 수익은 장학금과 예술인 지원금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국립대법인 인천대학교 최용규 이사장
국립대법인 인천대학교 최용규 이사장

“인천대를 민족대학 통일대학 글로벌 인재대학으로”

인천대 이사장을 맡아 달라고 했을 때 거두절미했다. 역대 이사장이 모두 박사와 총장 출신인데 자격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랬더니 다시 요청이 왔고 지역의 원로들이 박사가 아니어도 열린 사람이 맡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하기에 맡았다.

얼마전 언론 인터뷰에 인천대를 민족대학, 통일 주도 대학, 글로벌 인재 육성 대학으로 키우겠다고 했고, 제 페이스북에도 올렸다. 자랑하는 게 아니라 제 자신과 약속을 대중 앞에 공표하면서 저를 더 담금질 하는 것이다.

정치를 자퇴하고 국회 한ㆍ우크라이나친선협회 인연으로 우크라이나로 떠났다. 연해주에서 항일운동 하던 한민족이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고, 거기서 더 흘러간 사람들이 재우크라이나동포 고려인들이다.

제게 동포들이 자기를 러시아말로 ‘사바카’라고 했다. 개라고 했다. 자신들이 어렸을 적 할아버지, 어머니한테 조선말을 듣고 잘아 무슨 말인지는 아는데 할줄을 모른다고 탄식하며 ‘사바카’라고 했다. 재외 동포로써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민족성을 요구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었다. 이들을 만나며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체화했고, 이들을 비롯한 민족을 위한 일을 찾자고 마음먹었다.

“현재 독립운동가 발굴하는 데 200년... 20년 내 끝내야”

다시 인천대 얘기다. 인천대가 국내 국립대 중 가장 늦게 국립대가 됐다. 그래서 더 민족문제에 적극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독립유공자를 약 10만 명으로 추산해도 정부가 1년에 500명도 발굴하는 걸 보면 200년 돼야 발굴 할 수 있다. 나라가 이러면 안 된다.

그래서 인천대가 먼저 나섰을 뿐이다. 정부가 1년에 500명 정도 발굴할 때 인천대 독립운동연구소가 1년여 만에 2376여명을 발굴했다. 특히, 올해는 송도고등학교 독립운동가 97명을 발굴해 의미가 남달랐다. 보훈처와 인천대가 손잡고 발굴하기 시작하면, 국내 다른 대학과 연구소도 같이 나설 것이다. 독립운동가 발굴 10~20년 안에 끝내야 한다.

남은 핵심 과제가 남북, 남북중러 합작 대학 완성이다. 중국 옌볜대학, 러시아 극동연방대학, 인천대학 등이 중국 훈춘에 합작대학 ‘두만강대학’을 설립키로 했다. 6월에 중국 정부의 승인 날 예정이다. 인천대가 통일에 앞장서는 대학으로 발돋움 하는 데 한발 자욱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두만강대학이 개교하면 북한 대학과 적극 교류를 할 예정이다. 김일성종합대학이든 원산농업대학이든 남측이 지닌 농업과 바이오기술을 활용해 북한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데 인천대가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겠다. 같이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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