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고려 삼별초의 여정과 동아시아 문명 교류 4

삼별초, 제주도에 육지문화 끌어와…이후 몽골 직할령
삼별초 격전지 ‘항파두성ㆍ환해장성’, 관광지로 알려져
몽골군 흔적인 고소리술ㆍ빙떡 등 제주특산품으로 활용

인천투데이=이보렴 기자│삼별초 남진의 끝이라고 알려진 곳은 제주도다.

화산섬인 제주도는 한국 최대의 섬이다. 삼별초가 진도 용장성에서 진압된 이후 마지막 전투를 위해 이곳에 모였다. 이 곳에서 전멸했다고 알려졌으며, 삼별초 전멸 이후 제주도는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다.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에 있는 항몽순의비.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에 있는 항몽순의비.

삼별초의 지배, 제주도의 전환기

삼별초는 1270년 11월부터 1273년 4월까지 약 2년 6개월간 제주도를 지배했다. 전라남도 진도에서 삼별초를 이끈 배중손 장군이 죽자 김통정 장군은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도로 왔다.

고려시대 이전까지 제주도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삼별초는 제주도에 처음으로 들어온 무력집단이었다. 삼별초가 들어오면서 제주도의 육지 부속화는 급진전됐다. 고려의 통치체제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삼별초는 1272년부터 전라도, 충청ㆍ경기와 몽골군의 주둔지인 경상도 지역까지 군사 활동을 전개했다. 몽골은 개경 왕정의 요청과 일본 정복의 거점 확보를 위해 제주 정벌을 서둘렀다.

여몽연합군은 김방경과 흔도, 홍다구가 이끄는 병선 160척과 병력 1만2000여 명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1273년에 중군ㆍ좌군ㆍ우군으로 나뉘어 양동작전으로 제주도에 침입한다. 좌군은 명월포, 우군은 애월포, 중군은 함덕포로 진입했다. 그리고 항파두성을 함락했다.

항파두성이 함락되기 직전 김통정 장군 등 삼별초 군 70여 명은 한라산으로 도망쳤고 나머지 병력은 항복했다. 김통정 장군은 한라산 기슭의 붉은오름에서 자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종식되고 제주도는 몽골의 직할령이 됐다.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완전히 토벌되고 난 후 제주도는 본격적으로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 한 세기 동안 이어진 몽골 지배는 제주도의 풍습과 언어, 문화와 혈통에 영향을 미쳤다.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의 내성 석축의 흔적.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의 내성 석축의 흔적.

삼별초의 제주도 근거지 ‘항파두성’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에 위치한 항파두성은 삼별초 항쟁의 마지막 근거지였다. 제주도 서쪽 애월 방면에서 내륙 쪽으로 120~200m 구릉성 지대에 위치해있어, 성에서 해안 일대 상황을 점검하기 쉬운 위치다. 적이 접근할 경우 이를 미리 관측하고 대비하기 쉬운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 좌우로 고성천과 소왕천이라는 하천을 끼고 있으며, 깊은 계곡 안에 자리하고 있다.

항파두성은 내성과 외성의 2중 구조로 돼있다. 외성은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둘레가 약 6km, 성 안 면적이 7만8788㎡(26만 평)에 달한다. 한동안 내성은 흙을 쌓아, 외성은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제주문화유산연구원이 2010년에 시굴 조사한 결과, 내성도 외성과 마찬가지로 토축한 것이며, 그 규모가 기존에 알려진 석축 규모보다 컸다. 토축의 구조는 강화 중성과 유사하다.

항파두성은 현재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라는 이름으로 정비돼있다. 1977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항몽순의비와 전시관 등을 건립했으며, 1997년에 사적 제396호로 지정됐다.

제주도는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에서 역사문화장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청소년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현장답사도 진행한다. 항몽유적지에서 산새미오름, 절동산, 유수암천 등을 돌아보는 코스다. 이밖에도 항몽 유적지 퀴즈 프로그램, 떡 만들기, 벼룩장터 등을 진행하기도 한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외부의 토성. 나무로 만든 덱(deck)과 계단으로 다니기 쉽게 정비돼있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외부의 토성. 나무로 만든 덱(deck)과 계단으로 다니기 쉽게 정비돼있다.
제주의 동복 환해장성.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린 모습도 보인다.
제주의 동복 환해장성.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린 모습도 보인다.

제주도 해변을 두른 최초의 성 ‘환해장성’

제주도에는 13세기까지만 해도 성이 없었다. 성은 외부세력으로부터 내부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제주도에 성을 쌓은 건 외부 육지세력과 충돌 때문이었다.

환해장성은 제주도 해안을 두른 성이라 해서 ‘연해장성’이라고도 불린다. 환해장성은 제주도 최초의 대규모 성곽이다. 검은 현무암으로 제주 해변을 둘러쌓았다. 지금 관광지로 정비된 환해장성은 북촌ㆍ한동ㆍ신상ㆍ화북ㆍ애월ㆍ동복ㆍ은평리 등 모두 일곱 곳이다. 1998년 제주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됐다. 이밖에 함덕ㆍ평대ㆍ고내ㆍ태흥ㆍ일과ㆍ영락리 등에도 장성이 남아있다.

장성은 대개 바닷가에 축성돼있으며, 높이가 2~4m와 1~4m 등으로 지점에 따라 차이가 난다. 일부 지역은 장성의 일부가 없어졌거나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환해장성을 누가 축조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1270년에 삼별초 군이 진도에서 제주도로 들어오는 것을 걱정한 개경 수비군 고여림 등이 쌓았다. 그러나 학자들은 환해장성 축조 주체를 개경 측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고여림 등이 제주에 파견된 것은 빨라야 9월 초인데, 한 달 뒤에 삼별초가 제주도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해장성은 삼별초가 제주도 점령 이후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대비해 증축한 것이라 보고 있다.

환해장성은 주로 해안가에 있기에 트래킹이나 드라이브 코스로 이용되고 있다.

동복에 있는 환해장성의 성벽.
동복에 있는 환해장성의 성벽.

삼별초와 몽골 지배의 흔적, 문화로 남기도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토벌된 이후 제주도는 100여 년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몽골은 1273년 6월에 제주도를 직할령으로 삼고 ‘탐라국 초토사’를 설치했다. 그 때부터 고려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제주에 관부를 설치하고 관인을 파견해 지배했다. 몽골 말 160마리를 들여와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서 방목해 길렀다. 이때부터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 이후 제주도는 ‘말’의 고장으로 명성을 떨쳤고, 조선시대에도 목마장을 설치해 말을 관리했다.

또, 몽골과 직접적 교류로 여러 가지 생활문화도 형성됐다. 대표적인 먹거리가 고소리술과 빙떡, 상애떡이다. 고소리술은 몽골군이 제주도에 정착하면서 전래된 술이다. 몽골의 증류주 제조 기법으로 빚은 술로, 제주 특산품 중 하나가 됐다. 제주샘주 영농협동조합은 고소리술을 이용한 칵테일 만들기 체험을 진행한다. 빙떡과 상애떡도 제주 대표 특산품이 됐다. 이들 모두 몽골이 제주도에 목장을 개설ㆍ운영하면서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지금은 관광자원으로 활용되는 삼별초와 몽골의 지배 역사는 제주도 주민들에게 상처이기도 했다. 삼별초가 입도하고 성을 쌓기 시작하면서 도민들은 가혹한 노역에 동원됐고 전쟁터에 내몰렸다. 삼별초를 이끈 김통정 장군이 제주도 물산(物産)을 탐내 입도한 인물이라는 부정적 묘사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점으로도 이를 추측할 수 있다. 또, 공민왕의 반원 정책과 고려와 명의 제주마로 인한 갈등으로 제주도는 또 한 차례 고려의 정벌을 감내해야하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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