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고려 삼별초의 여정과 동아시아 문명교류 3

진도군, 진도 곳곳에 남은 흔적 발굴ㆍ보존
삼별초 역사문화탐방길 조성사업 진행 중
인천시, 답사 기획했으나 일회성으로 그쳐

인천투데이=이보렴 기자│삼별초의 시작이자 출발지인 인천 강화도에는 삼별초의 흔적이 많지 않은 반면, 전라남도 진도에는 곳곳에 삼별초의 흔적이 남아있다.

삼별초 용장성 축대 일부.
삼별초 용장성 축대 일부.

삼별초, 준비된 거점 ‘진도’로 향하다

삼별초는 1270년 6월 3일 강화도를 출발해 8월 19일 진도에 도착한다. 당시 배중손은 6월 1일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대장군 유존혁과 상서좌승 이신손을 각각 좌ㆍ우승선으로 임명한 뒤 새 정부 출범을 선포한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강화도에서부터 연안을 따라 진도에 다다른다. 진도는 서남해의 요충지이며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교차점이다. 남해와 서해의 조운로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남부지역 서남해 연안지역으로부터 세금을 확보할 수 있는 결정적 거점이기도 했다. 아울러 진도에서부터 나주를 장악하면 나주를 교두보로 활용해 전라도 지역을 장악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용장성 앞 고려항몽충혼탑에는 삼별초가 진도를 거점으로 설정한 이유를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개경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독자적 세력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거리 ▲강화도에 집중된 선박을 이용해 남하하기 좋다는 점 ▲땅이 기름지고 농수산물이 풍부해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점 ▲연안해상 교통의 요충지 ▲인근 지역에 최씨 무인정권이 소유한 대규모 농장이 있어 지리적 조건을 잘 알고 있다는 점 등이다.

진도로 내려온 삼별초는 용장산성을 거점으로 삼고 활동을 재개한다. 그 이후 1271년인 원종 12년 5월 15일 여몽 연합군은 진도에 대한 총공격을 결정한다.

연합군은 3군으로 편성됐는데, 김방경과 흔도의 중군이 벽파정으로, 홍다구와 영녕공의 두 아들이 이끄는 좌군이 장항으로, 대장군 김석과 만호 고을마의 우군은 동쪽에서 진입했다. 중군이 벽파정으로 진입하자 삼별초 군은 이를 막으려고 벽파정으로 병력을 집중했다. 이 와중에 좌군이 먼저 성 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자, 삼별초 군은 혼란에 빠졌다. 이 전투로 용장성은 결국 함락됐다.

왕 온(溫)의 묘.
왕 온(溫)의 묘.

삼별초 항쟁의 중심지, 용장성

용장성은 진도군 군내면 용장산성길 92에 위치했다. 용장리 뒷산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토성이며, 사적 제126호로 지정돼있다. 이 곳에는 진도용장성홍보관과 삼별초를 기리는 고려항몽충혼탑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모반해 강화부로부터 들어와 이 섬에 자리 잡고 궁전을 크게 지었다”고 전한다.

용장성 내 중심구역에는 경사면에 9단의 축대를 조성해 건물을 지었다. 후대 기록에 이것이 삼별초 정부의 궁전이라고 나온다. 이 축대의 단 높이는 1~3m가량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건물 전체 면적은 2만3000여㎡(7000여 평)이다. 건축물이 축대 위에 바로 건립되고 그 안쪽을 마당으로 사용한 형태다. 이는 방호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용장성 건축물의 또 다른 특징은 건물과 건물 사이 계단이나 통로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1989년에 성내 건물터 중 중앙에 해당하는 지역을 조사했다. 본격적인 조사가 이뤄진 것은 2009년 이후다.

용장성은 삼별초의 진도 이동이 고려의 강화 천도에 이어 또 하나의 천도라는 개념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건축물 20여 동의 배치 양상이 개경 만월대를 연상하게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용장성의 구조는 강화도성의 구조를 짐작하는 데에도 많은 참고가 된다.

삼별초 궁녀둠벙. 진도 주민들은 비가 오거나 늦은 밤에는 이 곳을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삼별초 궁녀둠벙. 진도 주민들은 비가 오거나 늦은 밤에는 이 곳을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삼별초의 와해, 곳곳에 남은 흔적들

용장산성에서 삼별초 군이 와해되고 난 후의 흔적은 진도 곳곳에 남아있다.

진도군 의신면에는 삼별초 군이 왕으로 옹립한 온(溫)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진다. 용장성이 함락된 후 여몽 연합군에 밀려 후퇴하던 중 홍다구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온(溫)의 무덤으로 향하는 고갯길을 왕무덤재라고 부른다. 왕이 넘어가다 죽은 고개라는 뜻이다.

온(溫)의 무덤은 1988년 12월 21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26호로 지정됐다. 온(溫)이 죽었다고 전해지는 이 고갯길에는 현재 주인이 없는 무덤 5~6기가 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이 온(溫)의 묘라고 전해진다.

진도군 의신면에는 삼별초 ‘궁녀둠벙’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2001년 10월 30일 진도군 향토문화유산 제14호로 지정됐다. 용장성이 함락돼 피란 중이던 궁녀들은 창포리에서 만길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만길재’를 넘다 몽골군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언덕을 따라 내려가 둠벙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 뒤 비가 오는 날이면 이곳 둠벙에서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 해서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밤에는 이곳을 지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는 사적 제127호로 지정된 남도진성이 남아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삼별초가 진도를 떠나기 직전 마지막 항전을 벌인 곳이라고 여겨지며,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이 이곳에서 전사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남도진성은 조선시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성됐다. 이 곳에서 고려시대 흔적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며, 배중손이 이곳에서 전사했다는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설’로서만 전해진다.

남도진성. 2020년 7월 말 방문 당시 집중호우로 성벽 일부가 무너져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남도진성. 2020년 7월 말 방문 당시 집중호우로 성벽 일부가 무너져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삼별초 역사문화탐방길 조성 등, 관광자원 활용

진도군은 2016년부터 삼별초 호국역사탐방길 조성 사업을 시행했다. 사업비는 총 19억 원이다. 지역에 산재한 호국역사 여행길을 정비해 역사 학습과 체험이 가능한 탐방로로 조성해 걷기 여행객을 유치하는 게 목적이다.

이 탐방길은 3개 코스로 구성된다. ‘김통정 퇴각로 1코스’는 9km로 공설운동장에서 운림산방, 삼별초공원으로 이어진다. ‘옛길 트래킹 코스’는 5km로 벽파진에서 용장성으로 이어진다. ‘김통정 퇴각로 2코스’는 9km로 왕온묘에서 궁녀둠벙, 금갑진성으로 이어진다. 사업은 올해 12월까지 마무리될 예정이다.

용장성 가는 길을 표시한 삼별초 역사문화탐방길.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용장성에 다다를 수 있다.
용장성 가는 길을 표시한 삼별초 역사문화탐방길.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용장성에 다다를 수 있다.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도 삼별초를 활용한 역사기행을 기획한 적이 있다. 2018년 고려 건국 1100주년을 계기로 개발해 역사기행을 정례화하려 했다. 고려 삼별초 항쟁의 여정을 따라 3박4일간 강화도에서 진도, 제주도를 탐방하는 코스로 기획했다. 오키나와는 2019년 이후부터 추진할 계획이었다.

이와 더불어 전남문화관광재단 문화재연구소,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유산사업단, 오키나와현 문화진흥회 문화예술추진과 등과 협력망을 구축하는 것도 목표였다.

이 시범사업의 대상은 인천에 거주하는 다문화가족을 포함한 중ㆍ고생과 학부모 30명이었다. 2018년에 진행한 이 사업에 참가한 이들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았다고 인천문화유산센터 관계자는 전했다. 하지만 사업비에 비해 기대효과가 크지 않다고 판단돼 일회성 사업으로 마무리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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