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고려 삼별초의 여정과 동아시아 문명교류 1.

고려의 강화 천도, 현재 고려궁지는 고려궁터 아냐
강화 중성, 연도ㆍ범위 명확하지만 비지정 문화재

인천투데이=이보렴 기자│인천 강화도는 삼별초 여정이 시작된 곳이다. 강화 삼별초 관련 유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고려 궁지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다.

별초에서 시작된 삼별초, 몽골에 대항해 맹렬히 전투

삼별초는 야별초의 좌ㆍ우별초와 신의군으로 이뤄진 별초군을 총칭한다. 별초(別抄)는 임시 군 조직으로 대몽항쟁기에 활약했다. 최우 집권 초기에 횡행한 도적을 잡기 위해 용사를 선발, 경찰부대를 조직했는데 이를 야별초라 한다. 그 뒤 인원이 늘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뉜다. 이후 최항이 신의군이라는 별초부대를 창설했다. 신의군은 몽고군에 잡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로 구성됐다. 이들을 합쳐 삼별초로 구성한 것이다.

삼별초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삼별초의 규모는 설치 이후 지속적으로 늘어났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연구자들은 초기에는 1000명 이하의 소규모에서 원종조에는 신의군을 합해 적어도 5000명 이상의 규모까지 확장된 것으로 추측한다. 많게는 7000명까지 추측하기도 한다.

1259년 고려의 태자 전이 부왕을 대신해 몽고에 입조(入朝)하면서 30년간 이어진 몽고와 전쟁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강화도에 남아 환도를 거부하던 무인정권이 1270년 임유무가 살해당하면서 종식되자, 무인정권을 따라 몽고군과 싸우던 삼별초는 고려 정권과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삼별초 명부를 압수당한 상황에서 이 명부가 몽고군에 넘어간다면 보복을 각오해야했다. 결국 삼별초는 환도를 거부하고 1270년 6월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고려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 새로운 고려 정권을 선언한 것이다.

그 이후 두 달간 삼별초는 강화도와 영흥도를 지나 진도에 닿는다. 이때 삼별초가 재물과 자녀를 싣고 떠난 배가 무려 1000여 척이나 됐다고 한다. 삼별초는 진도에서 용장산성을 개축하고 용장사를 궁궐로 삼는다. 그러나 이마저도 토벌당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제주도로 이동해 마지막 항전을 전개한다.

강화 고려궁지
강화 고려궁지

고려의 강화 천도, 지금의 고려궁지는 고려 궁 아냐

2022년은 고려의 강화 천도 790주년이다. 1231년 몽골의 침입을 경험한 최우는 강화도로 천도를 추진한다. 이듬해인 1232년 2월부터 공론화 과정을 거쳐 6월 16일 천도가 확정된다.

현재 고려궁지는 강화군 강화읍 강화대로 394에 관광지로 조성돼있다. 그러나 지금의 고려궁지는 엄밀히 말하면 고려궁지가 아닌 조선시대 강화부성의 흔적이다. 고려 궁궐터에 대한 조사는 고려궁지에 있는 외규장각 터를 확인하기 위해 이뤄졌다. 한림대박물관이 1995년 12월부터 2001년까지 총 4회에 걸쳐 조사했다. 조사 결과, 조선시대 지층 아래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 행궁과 외규장각 등을 조성하면서 고려시대 흔적을 없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다른 곳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강화도서관 뒤쪽 도로 개설공사 중 발견된 고려시대 건물 터.(제공ㆍ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강화도서관 뒤쪽 도로 개설공사 중 발견된 고려시대 건물 터.(제공ㆍ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고려궁 위치 알 수 없어…
추정하는 곳은 도로 깔려

엄밀히 말하면 고려 궁의 일부로 추정되는 건물 터 흔적이 발견됐다. 강화도서관 뒤쪽 도로 개설공사를 하던 중 고려시대 건물지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강화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당시 도로 개설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건물 터는 상단부가 이미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다”며 “조사 이후 다시 덮고 공사를 진행햇다”고 설명했다.

당시 발견된 건물 터는 ‘회랑’으로 추정된다. 기단 약 5m, 길이 약 60m다. 강화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이곳이 고려궁의 일부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렵다”고 한 뒤, “이 정도 규모의 회랑이라면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강화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사실 고려시대 궁성의 위치를 파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이 정무를 보는 중심 공간이 어디인가’이다”라며 “이 부분은 아직까지도 파악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강화 중성 범위.(제공ㆍ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강화 중성 범위.(제공ㆍ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연도ㆍ범위 가장 명확히 남아있는 고려시대 유적, 강화 중성

고려시대 강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치 있는 유적이 강화도에 남아있다. 바로 강화 중성이다. 강화 중성은 가장 규모가 크고, 그 범위가 명확하게 남아있는 유적이다. 게다가 1250년 최항이 강도에 중성을 구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걸 보면 강화 중성은 설립 시기와 그 범위를 명확히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고려시대 유적인 셈이다.

2008년에 선원면 창리~신정리 도로 개설공사 중 신지동 부근에서 강화 중성의 유구가 확인돼 2009년에 간단한 조사가 이뤄졌다. 그 이후 인화~강화 도로 건설공사 J구간에서 중성의 축성 유적이 본격적으로 조사됐다. 당시 조사는 중원문화재연구원이 담당했으며, 2003년 10~11월 지표조사, 2009년 5~6월 시굴조사에 이어 2009년 8월부터 2010년 5월까지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수도권 문화유산의 학술조사와 심화연구를 위해 2017년에 문을 연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강화 중성 발굴과 연구 작업을 진행 중이다.

강화 중성은 강화읍 외곽에 쌓인 토성을 말한다.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해 궁성을 지으면서 외성ㆍ중성ㆍ내성을 쌓았다. 이중 중성은 고종 37년인 1250년에 쌓은 성으로, 둘레가 2960칸이며 대문과 소문 17개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있다. 고종 46년인 1259년 몽고와 화의함에 따라 폐성됐다고 나타난다. 조선시대까지 중성과 관련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때 폐성된 이후 다시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중인 강화 중성.
발굴조사 중인 강화 중성.

21억 들여 고려천도공원 개장, 강화 중성은 여전히 비지정 문화재

이러한 학술적 가치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강화 중성은 여전히 비지정 문화재다. 비지정 문화재란, 문화재보호법 또는 시ㆍ도의 조례에 의해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를 말한다. 즉,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정식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문화재라는 뜻이다.

강화 중성은 여전히 비지정 문화재인 반면, 강화군은 21억 원을 들여 고려천도공원을 조성해 지난해 11월 개장했다.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고려천도공원은 송해면 당산리 388-1번지 일원에 조성됐다. 공원 내 야산에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와 인공폭포 등을 만들었다. 또, 광개토대왕릉비를 형상화한 7m 규모 조형물과 삼별초 항쟁을 기념하는 전시물도 설치했다. 고려천도공원의 옛 지명인 승천포는 조선시대까지 개경에서 강화를 잇는 뱃길이 닿는 포구였다.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고종의 어가행렬이 닿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원이 조성된 승천포를 알리는 안내판에 설명이 부족해 공원 방문만으로는 유적의 역사적 의미를 알기 어려운 상태다. 북한 개풍군 맞은편인 승천포 해안은 철조망으로 막혀 있다.

강화군에서 평화운동을 하는 함경숙 씨는 “승천포는 고려 고종이 1232년 강화도로 올 때 이용했던 포구”라며 “지금으로선 설명이 부족해 방문객들이 뜬금없다고 느낄 정도”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포구였던 해안선도 현재 철조망으로 덮여있어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자세한 설명과 형상물 등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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