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시민기자의 인천 섬 기행] 강화 돈대를 찾아서(하)
오두ㆍ화도ㆍ용강ㆍ좌강돈대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복원된 강화 전성.
복원된 강화 전성.

유일하게 남아있는 ‘강화 전성’

오두돈대(鰲頭墩臺) 아래 사적(史蹟) 제452호이며 인천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된 강화 외성이 있다. 형태는 벽돌로 쌓은 전성(磚城)이다. 이곳에 들르면 늘 오두돈대 숯불장어집 마당을 지나 전성으로 내려간다. 전성으로 내려가기 전 바다 쪽에 꽤 큰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 정자를 올리면 신선놀음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이곳이 오두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곳은 아닌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곳에서 풍광을 바라보는 순간 모든 시간과 공간이 멈춘 듯 고요한 느낌, 오랜만에 몸도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강화 외성은 고려 고종이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해안 방어를 위해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약 23km에 걸쳐 쌓은 토성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들어 강화도가 국가의 보장지처(保障之處)로 주목받으며 지속적으로 보완해 석성 또는 전성으로 축조했다. 특히 이곳 전성은 강화 유수 김시혁(金始爀)이 성의 흙이 흘러내린다고 건의해 영조 18년(1742)부터 시작해 2년에 걸쳐 쌓았다.

나무와 일체가 된 강화 전성.
나무와 일체가 된 강화 전성.

복원돼 현재 남아있는 성의 길이는 270m 정도로 아래쪽은 펄을 기초로 그 위에 대형 석재로 석벽의 중심을 삼은 뒤 무사석을 3단으로 올렸고, 그 위에 벽돌을 12단 정도로 쌓았다. 복원한 성벽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거대한 나무의 뿌리 사이로 드러난 벽돌들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나무의 뿌리들이 벽돌들을 품어 일체가 돼버린 성벽, 벽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연륜을 읽다보면 과거로 가는 시간의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강화 전성은 뿌리가 품은 벽돌들로 인해 벽돌의 크기나 쌓은 방식을 볼 수 있어 좋다. 특히 이곳 전성은 1794년에 축성하기 시작한 수원 화성보다 50여 년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수원 화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축성(塼築城)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오두돈대 전경(사진출처ㆍ강화군)
오두돈대 전경(사진출처ㆍ강화군)

광성보 관할 오두돈대와 화도돈대

높지 않은 언덕 위에 원형의 오두돈대가 위치해있다.

‘오두’라는 이름에서 보듯, 돈대가 있는 지형이 자라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름이 32m에 달하고 바다를 향해 포좌 4개소가 있으며, 전면은 깎아지른 낭떠러지다. 예전에는 성벽 아랫부분만 남아있었는데, 200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성 밖을 한 바퀴 돌며 성벽의 돌을 어떻게 쌓았는지, 과거의 돌과 새로 쌓은 돌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성벽의 무사석은 들여쌓기 공법을 사용했으며, 새로 쌓은 무사석들은 서로 견고하게 맞물리게 그렝이질을 했다.

복원된 오두돈대 성벽.
복원된 오두돈대 성벽.
화도돈대 전경(사진출처ㆍ강화군)
화도돈대 전경(사진출처ㆍ강화군)

성문 옆으로 성벽의 3분의 1 높이 쯤에 수구가 있는데, 돈대 안의 바닥과 수평을 맞춰 배수가 되게 설치한 것이다. 성벽 위로는 성가퀴를 올렸는 데 거무튀튀한 색의 돌을 사용해 더 육중하게 보인다. 이곳에서 북으로 1km 정도 올라가면 인천시 문화재 자료 제17호인 ‘화도돈대(花島墩臺)’가 나온다.

원래는 화도보 소속이었으나, 숙종 36년(1710)에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광성보의 지휘를 받았다. 아래 기단은 다시 복원했고, 그 위에 돈대를 올렸는데 사각형 구조로 둘레가 129m이다. 돈대의 한 단 성벽만 원래의 돌이고 새로 한 단을 올려놓았다.

그래서 돈대에 들어서면 마치 공터에 올라선 것 같다. 염하 쪽으로 나무들이 자라 조망은 좋지 않지만 나무그늘 아래 자리를 깔고 앉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을 것 같은 한적한 곳이다.

복원된 용당돈대.
복원된 용당돈대.

용당돈대에서 마주친 참나무 한 그루

용당돈대(龍堂墩臺)는 좌강돈대, 가리산돈대와 함께 용진진(龍津鎭)에 소속돼있다. 이곳은 주차장이 없어 강화나들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면 거의 찾지 않는다. 2001년에 복원하면서 길을 깔끔하게 정비하고 관리하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타원형의 용당돈대는 성벽의 하단부만 일부 남아있었는데 복원하면서 성벽을 새로 쌓았다. 성가퀴는 올리지 않았다. 무사석을 새로 깎아 하얗게 빛나는 성벽을 보는 것은 세월의 흔적이 없어 별로 큰 감흥은 없다.

용동돈대 내부 참나무.
용동돈대 내부 참나무.

그러나 성문을 통과해 안에 들어서 우람하게 자란 참나무를 보면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세월은 모든 것을 삼킨다고 돈대조차 다 허물어진 터에 켜켜이 나이테를 쌓아가며 뿌리를 내린 참나무가 마치 용당돈대의 주인인양 자태를 뽐내고 있다.

참나무 오른쪽으로는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고, 이곳 역시 바다를 향해 포좌 4개소를 설치했다. 포좌 위에서 염하를 바라보니 바로 건너편 김포 씨사이드컨트리클럽이 매우 가깝게 다가선다. 물굽이 도는 곳과 땅의 돌출부에는 반드시 돈대가 세워져있다. 그 모양도 지형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돈대를 따라가며 돈대가 위치하는 지형과 돈대의 모양을 비교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꼭 있어야할 곳마다 돈대를 설치한 선조들의 지혜에 놀랄 뿐이다.

용진진과 좌강돈대(사진출처ㆍ강화군)
용진진과 좌강돈대(사진출처ㆍ강화군)

용진진과 좌강돈대

용진진은 인천시 기념물 제42호로 용당돈, 좌강돈, 가리산돈 등 돈대 3개를 관할했다. 효종 7년(1656)에 설치돼 포좌 4개소, 총좌 26개소를 갖췄다. 세월이 흘러 석축 대부분이 무너졌고 성문 윗부분인 홍예(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게 쌓은 돌)만 남아있었는데, 1999년에 용진진 문루와 좌강돈을 복원했다.

문루 정면에는 사유지인지 밭작물을 기르고 있고, 성문을 통과해 뒤로 나가면 풀밭이 도로와 바로 연결돼 성문이라는 느낌이 확 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성문의 왼쪽 성벽이 끊어져 있고 성벽의 시설물이 바다를 방어하는 방향과 달리 동서로 이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남쪽에 있었던 용진포구로 들어오는 선박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형상이 저술한 ‘강도지(江都志, 1694~1696년 사이의 강화 기록)’에 의하면, 용진진을 종4품 병마만호가 지휘했고, 군관 18명과 토졸 37명이 근무했다. 문루를 통과해 뒤쪽에 10여 가구의 마을이 있는데, 이곳을 용진진 터로 추정하고 있다. 문루는 숙종 17년(1691)에 처음 짓고 정조 7년(1783)에 보수하면서 이름을 참경루(斬鯨樓)라 했다.

강화 유수 김노진은 ‘중수기’에서 ‘참경’이라 한 것은 ‘고래를 참수하는 데 뜻을 두는 것은 한결같은 것으로 그 뜻은 하늘의 질서와 인간의 규범을 세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용진진 문루와 좌강돈대를 연결한 성벽.
용진진 문루와 좌강돈대를 연결한 성벽.

문루를 통과해 성벽을 따라 오르면 좌강돈대(左岡墩臺)로 들어가는 성문이 나온다. 좌강돈대는 숙종 5년(1679)에 네모난 형태로 처음 쌓았으나 이후 원형으로 변형돼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용진돈대라고도 불린다. 원래부터 언덕이 있었는지, 아니면 축대를 쌓고 인위적으로 언덕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돈대에 올라보면 사방이 탁 트여있다.

좌강돈대에도 포좌 4개소가 바다를 향하고 있다. 돈대 안쪽은 2단으로 돼있어 계단을 올라 한 바퀴 돌면서 밖의 지형을 살펴보기 좋다. 바다 쪽을 바라보면 염하 건너편으로 문수산과 염하를 가로지르는 강화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제물진이, 서쪽으로는 멀리 혈구산과 고려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돈대들을 다니며 지형과 모양을 비교하면서 보았는데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의문이 든다. 거의 대부분 돈대의 성벽 높이가 밖에서 볼 때와 안에서 볼 때 차이가 난다. 밖에서는 성벽이 꽤나 높았는데 안에서 보면 매우 낮다. 자세히 살펴보니 안쪽은 흙을 쌓아올려 평탄작업을 했다. 돈대 밖 관측을 용이하게 하고 병사들의 기동력을 살리기 위한 방법인 것 같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천영기 시민기자는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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