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시민기자의 인천 섬 기행] 강화 돈대를 찾아서(상) - 초지진과 덕진진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강화도는 예성강ㆍ한강ㆍ임진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출구를 가로막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섬이다. 그래서 삼국시대부터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다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세곡을 배로 도읍인 개경과 한양으로 운반하는 길목이었기에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또한, 고려 대몽항쟁 39년간 개경에서 천도한 도읍지였다. 정묘호란 때는 인조, 병자호란 때는 세자빈과 왕자들의 피난처였다. 이런 이유로 강화도는 전란이 있을 때 왕실이 피신하는 보장지처(保障之處)로 주목받았다.

이에 조선 효종 때 진보(鎭堡)가 창설됐으며, 이어 돈대(墩臺 : 주변 관측이 용이하게 평지보다 높은 곳에 설치한 소규모 군사시설)가 숙종 때 48개, 영조 때 5개 설치돼 조선 후기에 ‘12진보-53돈대’ 체제가 확립됐다.

이중 복원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강화나들길 해양관방유적인 ‘호국돈대길’을 찾아 떠난다. 염하가 굽이도는 곳과 김포와 가까이 마주하는 곳에 돈대가 설치돼, 해안 풍경이 매우 아름다운 길이다. 쉬엄쉬엄 가다보면 의외의 풍광과 여유로움을 만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돈대 모양을 서로 비교하면서 가는 재미도 있다.

신미양요와 운요호 사건의 격전지 ‘초지진(草芝鎭)’
 

초지돈대 전경(사진제공ㆍ강화군)
초지돈대 전경(사진제공ㆍ강화군)

사적 제225호인 초지진은 원래 안산의 초지량영에 있던 수군 만호영을 효종 7년(1656)에 강화로 옮겨 강화 수로 수비의 요새로 새롭게 구축한 것이다. 초지진에는 초지돈ㆍ장자평돈ㆍ섬암돈이 소속됐는데 1973년 옛 모습대로 복원한 타원형의 초지돈대만 성곽을 보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지진은 신미양요(1871) 때 미군이 처음 상륙해 전투를 벌인 곳이다. 미군함의 포격과 병사들의 상륙 공격으로 군기고ㆍ화약고 등이 모두 파괴된다. 초지진의 주요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지금 음식점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서 축조 당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강화도 기행을 안내할 때 반드시 들리는 곳이 초지진인데, 비록 초지돈대만 남았지만 신미양요와 운요호(雲揚號) 사건의 치열한 전투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신미양요는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 평양 경내의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조선에 무력으로 강제 통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조선과 미국간 전쟁이다.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군사적 행동을 감행한다. 음력 4월 23일 무단으로 침략을 자행한 초지진 전투에서 미국 함대의 함포 지원 아래 중령 킴벌리가 이끄는 병사 450명이 상륙전을 감행해 초지진 수비군과 격전을 벌인다. 수비군은 화력의 열세로 패배해 미군에 점령당한다.

1875년엔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동남방 정산도 부근에 정박하고 보트를 내려 식수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지진 포대에 접근하자, 병인ㆍ신미양요로 쓰라린 경험을 한 초지진 수비군은 일본 함정을 향해 일제히 포격을 가했다. 그러자 운양호는 함포를 초지진에 퍼부어 포대를 일시에 파괴한다.

격전 중 포탄 파편에 맞은 흔적(초지돈대 성벽 아래 소나무).
격전 중 포탄 파편에 맞은 흔적(초지돈대 성벽 아래 소나무).
포탄을 맞아 깨진 초지돈대 성벽의 무사석.
포탄을 맞아 깨진 초지돈대 성벽의 무사석.

초지진 주차장에서 초지돈대를 바라보면 성벽 아래에 있는 수령 400년가량의 소나무 두 그루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굵은 줄기가 위로 솟구치며 여러 갈래로 뻗은 솔가지가 축축 늘어져 우산을 펼친 모양을 하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다.

이 소나무들에 격전 중 날아온 포탄의 흔적이 남아있고, 계단을 오르면 포탄으로 인해 깨진 성벽의 무사석(武砂石 : 벽채를 만들 때 쓰는 네모반듯한 돌)도 볼 수 있다. 소나무와 성벽에 새겨진 포탄의 흔적들, 당시 미국과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아물지 않는 상처다.

계단에 앉아 초지대교를 바라보며 그때의 치열한 전투를 떠올려본다. 초지대교 쪽으로 점점 넓어지는 해협을 내려다보며 잠시 휴식을 취하면, 거세게 흐르는 물결소리가 130여 년 전 이양선으로부터 침탈과 수난을 당했던 격동기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총성과 포성이 뒤섞이며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포연, 아우성치는 소리와 피어린 아비규환의 싸움터, 막강한 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강화도 내침은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려는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며 살육 전쟁이었다.

강화 제일의 포대 ‘덕진진(德津鎭)’

성문 밖에서 바라본 덕진진 공조루.
성문 밖에서 바라본 덕진진 공조루.

사적 제226인 덕진진은 강화 해협을 지키는 요충지로 원래는 수영(水營 : 수군절도사가 있던 군영)에 속한 진이었다. 덕진진은 덕진돈ㆍ용두돈ㆍ손석항돈(손돌목돈)을 관할했는데 현재 덕진진 사적지에는 고종 11년(1874)에 축조된 남장포대와 숙종 5년(1679)에 설치된 덕진돈대까지만 산책로를 연결했고, 용두돈과 손석항돈은 광성보 산책로에서 만날 수 있다.

덕진진에 설치된 남장포대와 덕진포대는 통진반도에 툭 튀어나온 덕포진 포대와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 제일의 포대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부대가 야음을 타고 이 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로저스가 지휘하는 미 극동함대와 격전을 벌였다.

덕진진 둔덕 사이에 교묘하게 설치된 남장포대.
덕진진 둔덕 사이에 교묘하게 설치된 남장포대.

남장포대와 덕진포대는 미군함대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해 피해를 주기도 했다. 당시 미군의 전기 속에 ‘남북전쟁 때에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맹렬한 포격전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정거리가 짧고 정조준이 잘 되지 않아 미 군함 모노캐시ㆍ 팔로스의 9인치와 8인치 등 7문의 포좌를 저지하지 못했다.

결국 덕진진 수비군은 병기의 열세로 패하고 만다. 이때 덕진진의 성첩(성가퀴ㆍ여장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과 건물은 모두 파괴됐는데 1977년 문루를 다시 세워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강화도를 방문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광성보를 찾지만 덕진진은 거의 방문하지 않는다. 덕진진을 걸어보면 의외로 조용하고 멋진 길임을 알 수 있는데 말이다.

덕진진에 들어가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성문인 공조루이다. 원래 홍예문(虹霓門 :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문)만 남은 것을 복원했는데, 이 문을 통과하면 바로 앞에 간척된 논이 보인다. 예전에는 문루 바로 아래가 바다였다. 이곳이 건너편 덕포진과 마주하는 최단 거리임을 알 수 있다.

덕진진 공조루를 나와 자그마한 둔덕길을 따라가면 둔덕 아래로 반월형의 남장포대를 볼 수 있다. 총 길이 110m로 포좌 수는 15개다. 건너편 덕진돈대와 이곳 둔덕 사이의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해 해상에서는 적에게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 포대를 설치했다. 절묘하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포대를 보면 긴장해야하는데 여기만 오면 왜 마음이 차분해지는지. 아마도 포대의 완만한 호선과 그 뒤의 고요한 연못, 주변의 나무들이 조화를 이뤄 만들어주는 편안함 때문인 것 같다.

덕진돈대 전경(사진제공ㆍ강화군)
덕진돈대 전경(사진제공ㆍ강화군)

포대가 끝나는 곳에 수문이 있는데, 뒤로 연못이 있어서인지 꽤나 크고 견고하게 설치돼있다. 바로 위 둔덕에는 장방형의 덕진돈대가 있다. 신미양요 때 미군이 덕진돈대를 점령한 사진을 보면 성가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미양요 때의 포격으로 인해,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진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성가퀴는 복원하지 않았으며, 성벽의 무사석은 들여쌓기 공법을 사용했다.

20여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덕진돈대 뒤 언덕 위에 한옥을 짓고 있었기에 덕진진을 복원하는 것인가 했다. 다 지으면 개방하겠지 했는데, 2002년에 완공된 뒤에도 개방한다는 소식이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지나쳤다. 재미 사업가 김영훈 씨가 사비를 들여 전통 건축기법으로 지은 ‘학사재’라는 한옥이다. 정기적으로 집을 개방한다고 한다.

덕진돈대의 문 오른쪽으로 ‘경고비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성벽을 따라 길이 이어져 바다 바로 앞에 비가 서있다. 이 비는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강화 덕진첨사가 건립한 것인데, 척화 의지를 담고 있다.

비에는 ‘海門防水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기에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고 적혀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국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미국이 안하무인 태도로 일으킨 신미양요의 침탈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덕진진의 경고비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덕진진의 경고비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신미양요 때 미국 군함 콜로라도호.(사진제공ㆍ공공누리)
신미양요 때 미국 군함 콜로라도호.(사진제공ㆍ공공누리)
신미양요 때 덕진돈대를 점령한 미군들.(사진제공ㆍ공공누리)
신미양요 때 덕진돈대를 점령한 미군들.(사진제공ㆍ공공누리)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천영기 시민기자는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