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강화 돈대를 찾아서(중)-광성보(廣城堡)

안해루와 광성돈대(사진제공ㆍ강화군)
안해루와 광성돈대(사진제공ㆍ강화군)

강화도 돈대길 중 가장 아름다운 광성보(廣城堡)는 계절마다 멋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미양요의 최후 격전지인 광성보의 유적지를 따라가며 그 당시 전투의 참상을 떠올리면 아름다움과 대비돼 오히려 등골이 오싹하고 서글프다.

사적 제227호로 지정된 광성보는 효종 9년(1658)에 설치됐으며, 숙종 5년(1679)에 설치된 광성돈ㆍ오두돈ㆍ화도돈 등을 관할했다. 현재 광성보 산책로에는 성문인 안해루와 광성돈, 덕진진 관할의 손석항돈(손돌목돈), 용두돈 등이 함께 있다. 오두돈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3km, 화두돈은 4km 정도 떨어져있다.

광성돈대 내부 모습.
광성돈대 내부 모습.

광성보의 성문인 ‘안해루(按海樓)’와 ‘광성돈’

광성보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안해루이다. 영조 21년(1745)에 광성보의 성벽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바다를 제압한다’는 뜻으로 안해루라 이름 지었다. 덕진진의 공조루와 광성보의 안해루는, 성문 위의 누각들이 대체로 문과 벽이 없이 사방으로 트여있는 것과 달리 총포의 공격에 대비해 판문을 달아 사방을 막았다.

광성돈은 안해루와 붙어있는데, 원래 네모난 모양으로 축조됐으나 영조 때 성벽을 고치면서 지금의 탄두 모양으로 개축됐다. 이곳에는 포좌 4개가 있으며, 돈대 중앙에 대포ㆍ소포ㆍ불량기를 전시하고 있다. 광성돈 내부는 잔디 보호와 관람객 동선을 고려해 산책로를 기하학적 문양으로 만들어 놨다.

쌍충비각.
쌍충비각.

전쟁의 상흔 기록한 ‘쌍충비각(雙忠碑閣)’과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안해루에서 소나무 길이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250m 정도 가면 쌍충비각이 나온다. 이 비각 안에 ‘진무중군어공재연순절비(鎭撫中軍魚公在淵殉節碑)’와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가 있다. 비석들 뒷면에는 똑같이 비를 세운 관료들의 이름과 ‘신미양요 2년 뒤인 고종 10년(1873)에 강도(江都, 강화도)의 백성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이라 적혀있다.

‘진무중군어공재연순절비’ 앞면에는 어제연과 그의 친동생 어재순의 충절을 기리는 시문이 적혀있다. ‘늠름한 충성과 용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형제가 서로 뒤따라서 죽음 보기를 돌아가는 것같이 했네. 형은 나라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으니 한 가문의 충성과 우애 영원토록 풍습을 교화시키네.’ 그리고 뒷면에는 비장(裨將, 수령을 모시며 일을 돕던 무관) 이현학과 어영초관(御營哨官, 왕을 호위하던 어영청에서 약 100명에 달하는 초를 책임지는 종9품 무관직) 유풍로를 기리는 시문이 적혀있다.

광성파수순절비 앞면에는 본영(本營)의 천총(千總, 군영에 소속된 정3품 관직) 김현경과 본진(本鎭)의 별장(別將, 각 영이나 청에 소속돼있던 정3품 또는 종2품의 당상군관) 박치성을 기리는 시문이 적혀있다. 뒷면에는 신미양요 전투 때 싸우다 죽은 전망무사(戰亡武士) 49명의 이름과 시문이 적혀있다. ‘반백 명의 무사가 한마음으로 순국하니 높은 충성과 더할 나위 없이 높은 지조와 절개 영원히 잊을 수 없네.’

신미순의총은 쌍충비각 아래 길 건너편에 있다. 신미양요 때 전사한 군관과 무사 51명의 신분을 구별할 수 없어 분묘 7기에 나눠 합장했다. 이곳은 세월이 흐르면서 덩굴이 묘역을 덮은 탓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 마을 노인이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를 회고한 덕분에 복원됐다. 나는 이곳을 안내할 때마다 미군에 처절하게 저항하다 돌아가신 분들을 떠올리며 참배한다.

손돌목돈대(사진출처ㆍ공공누리)
손돌목돈대(사진출처ㆍ공공누리)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 ‘손돌목돈대’

신미순의총을 나와 오른쪽 길로 언덕을 120m 정도 오르면 손돌목돈대가 나온다. 원래 이름은 ‘손석항돈대’인데, 우리말로 바꿨다. 숙종 5년(1679)에 처음 축조할 때부터 원형이었다. 돈대 중앙에 무기고 세 칸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고, 바다를 향해 포좌 3개가 있다. 미군들의 기록을 보면, 이곳에서 신미양요의 거의 마지막 전투로 미 해군과 백병전이 벌어졌다. 전투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드러난다.

신미양요는 1871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발생한 군사적 충돌이다. 우리는 신미년(1871)에 서양 사람들이 일으킨 난리로 인식하지만, 미국은 ‘1871년 미-한 전쟁(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 또는 ‘1871년 한국 군사작전(Korean Campaign 1871)’이라 부른다. 신미양요가 미국이 일으킨 전쟁 또는 군사작전이었음을 그들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미양요 때 손돌목돈대 전투 전사자들.(사진출처ㆍ공공누리)
신미양요 때 손돌목돈대 전투 전사자들.(사진출처ㆍ공공누리)

미 상륙군부대의 중대장(해병)이었던 밀턴 대위가 아내에게 보낸 서간문에는 “나는 조선군 요새지에서 끔찍한 장면을 보았소. 조선군 몇 사람이 불에 새까맣게 타버린 채 그 근처에 떨어진 미군의 9인치 포탄의 폭발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소. 우리 함정의 뒤 갑판보다도 크지 않은 좁은 지면에 쌓인 시체만도 무려 40구나 됐고, 이 시체들의 대부분은 필시 성곽의 흉벽 너머로 내다보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아 죽은 자일 것이오. 게다가 그들이 입은 흰옷에 붉은 피가 물들어져서 적ㆍ백색의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소”라고 쓰여 있다.

미군은 뒤쪽 대모산에 포대를 설치했는데, 이 포격에 의해 성벽이 무너지고 공격이 집중됐다. 미국 아시아함대 함장 슐레이 대령의 회고록에는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총에 탄약을 갈아 넣을 시간적 여유가 없어 창과 검으로 공격했다. 대부분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싸웠는데, 모래를 뿌려 적들의 눈을 멀게 하려 했다.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부상자들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익사했다. 조선군은 낡고 뒤떨어진 무기를 가지고도 미군과 맞서 용감하게 싸웠고,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어갔다. 아마 우리는 가족과 나라를 위해 그처럼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군인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신미양요 때 미군이 노획한 면제배갑(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
신미양요 때 미군이 노획한 면제배갑(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

윌리엄 그리피스는 광성보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흰옷을 입은 240여 명의 시체가 성채 안과 주변에 누워 있었다. 바다에는 100여 시신이 떠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이제는 다 밖으로 튀어나온 흩어진 솜 갑옷을, 솜을 아홉 겹으로 두른 갑옷을 입고 있었다.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공기 중에 진동했다. (중략) 어떤 부상자들은 자신의 고통보다 미군 체포자들을 더 끔찍이 두려워하며 서서히 불에 타 죽어갔다.”

미군의 집계에 의하면, 8시간가량 치러진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어재연 등 243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했으며,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에 비해 미군은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다. 이를 어찌 전쟁이라 할 수 있을까. 잔인한 학살극이었다.

미군은 손돌목돈대에 휘날리던 사령관 어재연의 장군기 ‘수자기(帥字旗)’를 비롯해 부대기 50점, 무기 481점을 노획했다. 무기는 대부분 화승총이었다. 이때 조선군은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만든 ‘면제배갑(綿製背甲)’이라는 일종의 방탄복을 입고 있었는데, 무명을 13장 이상 겹쳐 만들었다. 이는 조선군이 사용하는 화승총의 총알이 무명 12겹은 관통하지만 13겹은 뚫지 못한다는 실험 결과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미군은 레밍턴 롤링블록 단발식 소총과 스프링필드 소총으로 면제배갑을 쉽게 뚫었다. 이 면제배갑도 노획돼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전시돼있다.

용두돈대(사진제공ㆍ강화군)
용두돈대(사진제공ㆍ강화군)
손돌목포대(사진제공ㆍ강화군)
손돌목포대(사진제공ㆍ강화군)

용두돈대(龍頭墩臺)와 손돌목포대

손돌목돈대에서 다시 내려와 400m 정도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용의 머리 모양을 한 용두돈대가 나온다. 원래는 망루로 추정되던 곳인데 1999년에 육군 박물관팀이 돌출된 지형을 조사할 때 옛 석축이 남아있어 용두돈대라 이름붙이고, 강화도에 54돈대가 존재한다고 보고했다.

미군의 기록에 의하면, 신미양요 때 미군이 손돌목돈대를 점령하고 바닷가 용두돈대를 공격하자 이곳을 지키던 소수 조선군이 모두 바다에 뛰어 들어 자결했다. 돈대 앞에는 암초가 있어 썰물과 밀물 때 물살이 세다.

신미양요 때 손돌목돈대에서 바라본 용두돈대.(사진출처ㆍ공공누리)
신미양요 때 손돌목돈대에서 바라본 용두돈대.(사진출처ㆍ공공누리)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화력 증강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고종 11년(1874)에 용진진ㆍ광성진ㆍ덕진진ㆍ초지진에 포대를 설치한다. 손돌목포대(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바다 쪽으로 세 곳에 각각 포좌 9ㆍ4ㆍ3개를 갖췄으며, 맞은편 덕포진과 함께 협공할 수 있게 포좌들을 배치했다. 1875년 운요호사건으로 외세에 문호를 개방한 후 파괴됐던 것을 1999년과 2000년 발굴조사로 중앙 포좌 9개를 복원하고 좌측 포좌 4개를 확인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천영기 시민기자는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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