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시민기자의 인천 섬 기행 - 강화도(중)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주사(舟師) 손돌의 묘

연미정에서 바라본 개풍군과 유도.
연미정에서 바라본 개풍군과 유도.

파수청에서 뒤로 언덕을 오르면 깔끔하게 단장한 묘가 보인다. 예전에는 봉분만 있었는데 지금은 봉분 아래에 병풍석을 둘렀고 특이하게 배가 새겨져있다. 비석에는 ‘舟師孫乭公之墓(주사손돌공지묘)’라 쓰여 있어 수군을 일컫는 주사(舟師)를 쓴 것이 독특하다. 혹시 배를 잘 부렸던 것을 나타내기 위해 ‘배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쓴 것은 아닌지.

지금 손돌의 무덤 자리에는 원래 고려 고종의 명으로 만든 무덤과 사당이 있어 주민들이 매해 제사를 지냈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당이 헐려 제사도 자연스레 중단됐다고 한다. 그러다 1970년에 주민들이 손돌의 사당을 대신할 수 있게 손돌목 언덕 위에 ‘손돌의 무덤’을 다시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김포시 주최로 해마다 음력 10월 20일에 ‘주사 손돌공 진혼제(손돌제)’를 거행하고 있다.

손돌에 관한 전설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와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한국민간전설집(韓國民間傳說集)」에도 적혀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232년 몽고의 2차 침략 때 고종은 강화도로 천도할 때 사공 손돌의 배를 타고 예성강 벽란도를 거쳐 임진강과 한강 하류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현재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의 해협이 협소하고 급류인 목에 닿게 됐다. 이곳은 앞이 막힌 듯이 보이는 지형으로 처음 가는 사람은 뱃길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싑다. 천도하는 고종도 심기가 불편한 나머지 사공 손돌을 의심해 수차 뱃길을 바로잡으라고 명했다.

손돌의 묘.
손돌의 묘.

그러나 손돌이 아뢰기를 “보기에는 앞이 막힌 듯하나 좀 더 나아가면 앞이 트이니 폐하께서는 괘념치 마옵소서”라고 했다. 고종은 결국 손돌의 흉계로 의심하고 신하들에게 손돌을 죽이라 명했다. 죽음에 직면한 손돌은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이라 아뢴 후 참수됐다. 왕은 바가지를 따라가 무사히 목적지에 당도했다. 왕은 늦게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을 후히 장사 지내주고 그 넋을 위로하기위해 사당과 무덤을 만들었다.

지금도 이 뱃길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해서 ‘손돌목’이라 부르며, 기일인 음력 10월 20일 쯤이 되면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래서 강화와 김포 사람들은 이때에 부는 거센 바람을 손돌바람, 이 무렵의 추위를 손돌추위라 한다.

양헌수 장군의 「병인일기(丙寅日記)」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자 염하를 건너는 도하작전을 개시하기 2일 전인 음력 9월 28일, 덕포진에서 지형을 살피던 중 민간의 풍속에서 전하는 대로 손돌묘(孫石塚)에 가서 손을 마주잡고 말하기를, “손돌님의 영혼이 있다면 충의로 일어나는 분한 마음이 만고에 뻗칠 터이니, 이곳을 지나는 적선을 복멸(覆滅)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빌었고, 무덤 옆에 앉아 강화도를 바라보니 홀연히 시야에 정족산성이 들어와 저곳에 군사를 매복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기록에 의하면, 손돌의 묘가 손돌목에 있었다는 사실과 손돌의 전설이 예부터 있어왔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아무튼 진짜 묘든 가짜 묘든 전설 속 주인공의 묘를 직접 만난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묘한 감동이 가슴을 울린다.

손돌의 이야기는 강화나 김포 근처에 사는 어부들에게 음력 10월 중순인 소설(小雪) 즈음이 되면 배를 띄우지 말라는 정보와 함께 권력자를 만나면 조심하고 피하라는 교훈을 전달하는 일종의 원혼설화이며 금기설화라 할 수 있다.

덕포진 돈대 발굴

덕포진 돈대 발굴(사진ㆍ김포 덕포진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덕포진 돈대 발굴(사진ㆍ김포 덕포진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덕포진 돈대터에서 철조망 너머로 바라본 광성보의 용두돈대.
덕포진 돈대터에서 철조망 너머로 바라본 광성보의 용두돈대.

손돌의 묘 앞은 덕포진 내에서 가장 높은 구릉의 평탄지로 해안 쪽으로 돌출돼있다. 맞은편 덕진진과 거리는 800m, 광성보 용두돈까지는 600m가량 떨어져있다.

2016년에서 2018년까지 돈대 건물지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보고서에 의하면, 손돌묘 바로 앞에서 건물지가 발굴됐는데 조선 전ㆍ중기에 해당되는 기와들이 출토돼 건물지는 조선 전기 이전으로 추정한다. 기존 보고서에는 이 건물지가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지은 초소나 망루라는 설과 손돌의 사당이라는 설이 있는데 기와들로 추정할 때 손돌의 사당이 아닐까 한다.

1872년에 제작된 ‘지방도’를 보면 돈대의 성벽과 여장(성가퀴 : 몸을 숨길 수 있게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이 확인되고, 19세기에 제작된 ‘강도지도’에도 성벽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보인다. 발굴에서도 역시 구릉의 외각을 따라 성벽의 하부 기초시설과 수구를 확인했다.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덕진진ㆍ초지진과 초지대교가 한 눈에 들어오고, 북서쪽으로는 광성보의 용두돈대가 바로 앞에 보인다. 결국 이 돈대에서 염하 입구의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으므로 덕포진의 가ㆍ나ㆍ다 포대를 지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십경 연미정(燕尾亭)

연미정과 500년 수령 느티나무.
연미정과 500년 수령 느티나무.

1995년에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연미정은 해병대가 밑에 주둔하고 있어서 관람하려면 해당 군부대에 허가를 신청한 후 1주일 이상 기다려야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것이 2008년 2월부터 완전 개방됐다. 개방 후에도 한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아 강화도 읍내를 안내할 때 가장 손꼽았던 명소였다. 지금도 강화도 평화기행에 반드시 들어가는 장소다.

월곶돈대 안에 있는 연미정이라는 정자 이름은 이곳 지형과 연관이 깊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 그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흘러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아 연미(燕尾)라 했다. 조선 정조 때 강화유수로 재임한 김로진이 강화도 곳곳을 시찰하면서 뽑은 강화십경 중 하나로, ‘연미조범(燕尾漕帆, 연미정의 조운선)’이 빼어나게 아름답다고 했지만 정묘호란 때인 인조 5년(1627)에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한 굴욕의 장소이기도 하다.

연미정은 물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기 때문에 예전에는 서해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선박이 멀리 보이는 이 정자를 목표로 배를 저어 정자 아래 선착장에 모인 뒤에 만조(滿潮)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올라갔다.

정자에 오르면 북으로는 개풍군과 파주, 동으로는 김포 일대가 보인다. 이곳은 한강으로 들어가는 통로일 뿐 아니라, 여러 물길을 통해 들어오는 외적을 감시하기 좋은 위치에 있어 국방에서도 꼭 필요한 장소다. 연미정을 처음 건립한 때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 고종 때 이곳에서 구재(九齋)의 생도들을 모아서 여름 강습회를 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을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월곶돈대 포문과 여장.
월곶돈대 포문과 여장.
장무공황형장군택지비와 월곶돈대.
장무공황형장군택지비와 월곶돈대.

연미정은 조선시대 삼포왜란 당시 왜적을 무찌르고 1512년 함경도 지방 야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국가에 공로가 많았던 황형(黃衡) 장군에게 조정에서 하사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대부분 파손된 것을 1744년 강화유수 김시혁이 중건했다. 그 후 여러 차례 보수해 지금과 같이 복원했다. 현재 소유주는 황형 장군의 후손인 황필주 씨로 돼있다.

연미정의 구조는 석축을 쌓은 위에 정자를 올린 팔작지붕 겹처마다. 팔각장주초석 10개 위에 두리기둥을 올린 민도리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바닥은 네모난 돌판을 깔았다. 그리고 정자 뒤의 느티나무들은 수령 500년으로 풍채가 당당하며 마치 정자를 지키고 있는 신목(神木)처럼 신비감마저 느껴진다.

연미정에서 바로 앞 바다를 보면 조강을 가르는 자그마한 섬이 있다. 이를 유도라 하는데 머무를 ‘유(留)’에 섬 ‘도(島)’를 쓴다. 서해에서 올라오는 배는 연미정 앞 유도에서 닻을 내려 조류를 따라 한양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이 유도는 1997년 가을 홍수로 북에서 떠내려 온 암소가 피난한 것을 구출, ‘평화의 소’로 명명해 뉴스를 타며 유명해진 섬이기도 하다.

이곳은 언제 와도 너무나 고요해 평화롭기 그지없다. 북쪽 개풍군이 4km 정도의 거리로 멀게 느껴지지만 물이 빠지면 모래톱이 드러나 바지를 걷고 한걸음에 뛰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누가 이 평화로운 해역을 가로막고 있는지, 분명 눈앞의 초소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은 아니다. 그들은 분단으로 이익을 보는 세력들이 아닐는지. 도도히 흐르는 한강 하구에 배가 자유롭게 다닐 날을 기다린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천영기 시민기자는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