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시민기자의 인천 섬 기행] 강화도(상)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30년간 강화도(江華島) 기행 안내를 100여 차례 한 것 같다. 수도권에 있으면서 다리가 놓여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 유적들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동안 안내한 길을 코스 몇 개로 나눠 소개하고자 한다.

평상시 기행 코스는 수강생 집단의 성격이나 강의 이해 정도에 따라 기획했다. 그런데 7~8년 전부터 ‘강화도 평화기행’이라는 주제로 안내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아마도 ‘평화도시 인천’을 만들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주문인 것 같다. 그래서 이왕이면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곳을 중심으로 코스를 만들었다.

덕포진(德浦鎭)

덕포진 가포대. 멀리 초지대교와 염하 초입에 있는 초지진이 보인다.

덕포진은 김포시 대곶면에 위치하는데, 이곳을 첫 기행지로 잡은 까닭은 이곳에서 강화도를 바라보면 염하의 초입인 초지진, 덕진진과 덕포진의 포대 화망 배치를 확인할 수 있고, 덕포진의 포대를 따라 손돌 묘까지 가는 길이 매우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멋진 길에는 대립과 갈등이 끼어들 틈이 없다. 산책로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덕포진의 길에서 평화로운 세상을 떠올린다.

사적 제292호인 덕포진은 조선시대에 초지진, 덕진진과 함께 강화해협을 통해 서울로 진입하려는 이양선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군영이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선조 때 축조된 포대로 추정한다. 고종 8년에 편찬된 「통진읍지」를 보면, 덕포진은 군사상으로 강화통어영에 속하고 행정상으로는 통진에 속했다.

첨사(종3품) 1명과 수군 316명, 방선(防船, 전투선의 한가지로 뱃전에 방패를 설치한 중선) 2척, 병선(兵船, 소형의 무장선) 1척, 사후선(伺候船, 무장한 배에 부속된 비무장선) 3척이 소속될 정도로 규모가 큰 진이었다.

가포대로 가는 길

덕포진 가포대로 내려가는 길.(왼쪽 철망 바깥이 염하)

덕포진 주차장에서 덕포진 전시관 오른쪽으로 계단을 올라 숲길을 계속 가다보면 왼쪽으로 가포대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깔끔하게 정리된 잔디가 깔려있고 바다를 향해 진지를 구축하듯 둔덕이 있다. 그 아래 포대 7개가 설치됐는데 발굴 당시 중포(中砲) 2문이 나왔다. 포대 뒤로 소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 숲을 이루고, 그 안에 있는 평상에 앉으면 매우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다.

이곳 포문은 염하를 건너 초지진과 덕진진의 남장포대를 마주해 화망을 구성했다.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대,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다만 이때 사용한 화포는 포탄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철환을 쏘아 맞추는 정도였다. 이곳에서 덕진진까지 거리는 대략 1km인데 화포의 유효 사거리가 300m에 불과해 가운데 400m 정도는 포탄이 미치지 못했다. 결국 양쪽에서 많은 포탄을 쏘았지만 한 발도 맞추지 못했다.

덕포진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구불구불한 둔덕길은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결코 낭만적인 곳이 아니지만, 현재 바라보는 풍경은 한적한 오솔길처럼 평화롭기 그지없다. 특히 해질녘이 되면 염하에 비치는 노을빛과 덕포진의 나지막한 언덕길이 아름답게 빛나는데, 오솔길은 초록의 언덕인 진지 위로 이어지고 폭이 좁아 두 사람 정도 나란히 걸을 수 있다.

나포대ㆍ다포대로 가는 길

해안선을 따라 난 둔덕길.

계속 길을 따라 굽이돌면 나포대가 나온다. 이곳에는 포대 5개가 있고, 포문 방향이 가포대와 마찬가지로 초지진과 덕진진을 향하고 있다. 발굴 당시 소포(小砲) 2문과 중포 1문이 나왔다. 포대 위로도 길이 나있지만 포대가 무너질 위험이 있어 출입금지 표지판이 걸려있어 포대로 내려가 구경하고 다시 올라가 길을 걷는 것이 좋다.

다포대엔 포대 3개만 설치돼있다. 이곳 포문은 덕진진을 향해 있는데, 가포대ㆍ나포대 지붕이 짚으로 이뤄진 것과 다르게 기와로 만들어진 것이 특이하다. 멋을 부려 엉뚱하게 복원한 것 아닌가 했는데, 이곳을 발굴할 때 중포 1문과 바닥에서 많은 기와 조각들이 발견됐고 그것들을 고증해 기와지붕으로 복원한 것이라 한다.

덕포진에는 포대가 총 15개 있는데 발굴된 중포와 소포를 ‘덕포진 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모든 포대 안에는 포가 밀리지 않게 받치는 돌이 놓여있다. 포탄이 날아갈 수 있게 포대 앞면에는 포혈(砲穴, 포를 쏠 수 있게 성벽이나 참호에 뚫은 구멍)을 뚫었다. 상식적으로 포탄은 총탄과 달리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고 생각한다. 중포는 바퀴가 달린 틀 위에 설치해 각도를 조절할 수 있지만, 이곳에 설치된 중포와 소포는 바닥에 고정해 직사포 형식으로 쐈다. 직사포는 포탄의 속도가 빨라 관통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병인ㆍ신미양요 때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덕포진 파수청(把守廳) 터

덕포진 다포대. 기와로 지붕을 올렸다.

파수청은 각 포대에 공급할 불씨를 보관하던 곳이다. 문헌에 기록된 것을 보면, 사적지 안에 탄약고와 파수청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탄약고는 덕포마을로 이전됐고 파수청만 남아 있다. 발굴 당시 동ㆍ서면이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것으로 보아 출입구는 남ㆍ북면에 위치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예전에 ‘대포나 화승총에 어떻게 불을 붙였을까?’ 하고 궁금해 한 적이 있었다. 한창 전투 중에 부싯돌로 불을 붙이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고, 불을 피워놓고 사용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추측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화덕을 보고는 알았다.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숯불이 있었다는 것을.

발굴 당시 포탄 7개와 상평통보 2개, 주춧돌과 화덕 등이 출토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축물과 화덕을 복원해놓아 불 피웠던 화덕의 형태와 구조를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은 건축물을 없애고 층을 높여 흙으로 덮고 잔디를 깔았다. 그래서 안내판에 새겨진 사진들로밖에 흔적을 볼 수 없다. 김포시는 연구용역을 발주해 파수청을 고증하고 2018년까지 원형대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했는데,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덕포진 발굴에 얽힌 이야기

덕포진 다포대 구조.

덕포진은 고종 32년(1895)년에 폐쇄돼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 세월은 모든 것을 땅속에 묻는다. 모든 건축물과 포대는 무너져 땅속에 매몰됐다. 그러다 1970년에 농사를 짓던 김기송 씨가 손돌 묘역을 역사적 유원지로 개발하자는 의견을 내고 사비를 들여 손돌 비석을 세우고 추념제를 지냈다.

이 추념제에 참여한 경기도 공무원이 “덕포진이 이 부근에 있다”는 말을 듣고 덕포진을 발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석 달을 찾아다녔어도 알 수 없었다.

간절하면 이뤄진다고 했던가. 김기송 씨는 포대가 있을만한 곳에 서광이 비치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1970년 9월 30일 벼를 베기 위해 고용한 일꾼 10여 명을 투입, 흙을 4~5m 파니 포대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농부가 사비를 들여 발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덕포진을 발견한 이후, 문화재청과 경찰은 경비를 세워 오히려 김 씨의 접근을 통제하면서 마음대로 접근했다간 도굴범이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문화재청 전문위원 외에는 아무도 삽질을 못하게 하면서 발굴은 지지부진해졌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80년,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이뤄져 포대와 돈대, 파수청 터를 찾았다. 나중에 김포문화원 원장을 지내기도 한 김 씨는 현재 이곳에서 덕포진을 안내하며 관리에도 힘쓰고 있다.

포대 안 바닥에 붙어있는 포혈(砲穴).
과거 파수청을 복원한 모습.
파수청 내 숯불을 피우던 화덕의 구조.
덕포진 안내도.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천영기 시민기자는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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