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시민기자의 인천 섬 기행] 강화도(하)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과거 강화의 관문 ‘진해루(鎭海樓)’

옛 강화대교 입구에 있는 ‘갑곶 선착장 집단 양민 학살지’ 표지판.
옛 강화대교 입구에 있는 ‘갑곶 선착장 집단 양민 학살지’ 표지판.

연미정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강화대교 밑으로 갑곶순교성지 입구가 나온다. 안으로 들어가면, 염하 쪽으로 펜스를 치고 진해루를 복원하고 있다. 진해루는 완전히 무너져 그 흔적만 찾아볼 수 있었는데, 2006년 발굴조사 때 문루의 초석과 외성의 연결구간이 확인됐다. 다행히 19세기 말 제작한 지도와 사진에 진해루가 남아있어, 이를 바탕으로 한 복원공사가 올 11월이면 끝난다.

강화도의 대표적 관문이었던 진해루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강화도와 내륙을 잇는 길목으로, 갑곶나루를 거쳐 염하로 나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했다. 진해루는 강화 외성을 축조할 때 만든 문루 6개 중 하나다.

외성은 고려 고종이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몽고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쌓은 해안 방어시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종 24년(1237)에 강화 외성의 축조가 끝났으나 고종 46년(1259) 몽고의 요구로 모두 헐린다.

그 이후 정묘ㆍ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외성의 전략적 의미가 다시 부상해, 숙종 17년(1691)에 외성 축조가 시작된다. 이때 돌을 이용해 외성을 다시 쌓으면서 돈대(墩臺)를 설치했고, 이곳 갑곶나루터 진해루에서 내륙과 교통을 통제했다. 진해루가 복원되면 강화의 옛 관문인 멋진 문루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 최초 근대식 해군사관학교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 ‘통제영학당’ 표지석.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 ‘통제영학당’ 표지석.
훈련을 받는 ‘통제영학당’생도와 수병들.(제공ㆍ강화군)
훈련을 받는 ‘통제영학당’생도와 수병들.(제공ㆍ강화군)

인천시 기념물 제49호인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은 경상남도 통영에 위치한 조선 수군의 최고 지휘기구인 통제영 산하의 학당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통영과 천리나 떨어진 강화도에 학당을 세우고 이를 관리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공식 문서에는 ‘조선수사해방학당’이라 돼있고, 총제영학당(總制營學堂)ㆍ해군학당(海軍學堂)이라는 명칭도 나타난다. 정확한 명칭이 무엇인지 논의해야할 것 같다.

19세기 말 이양선(異樣船)의 잦은 출현은 조선 조정이 해군의 중요성을 알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세계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한 해군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조정은 강화도에 ‘조선수사해방학당’을 세운다. 1893년, 고종은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영국 총영사에게 해군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 강화읍 갑곶리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라 할 수 있는 학당을 설립했다.

15세 이상 20세 이하의 생도 50명과 수병 500명을 모집해 훈련시키려했으나, 실제 모집된 인원은 생도 38명과 수병 300여 명이었다. 생도들은 우선 조선해관에 촉탁으로 근무하는 허치슨에게 영어교육을 받았고, 군사교육은 영국에서 파견된 교관 칼웰 대위와 조교 커티스하사관에게 받았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교육이 순조롭게 이뤄지지 못하다가 1896년 5월 영국 교관들이 귀국하자 폐교됐다.

학당은 본관 구역과 기숙사 구역으로 구분돼있었는 데, 이 건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본관 자리 구릉 앞에 해군참모총장이 세운 ‘통제영학당 옛터’ 표지석만 휑하니 서있다.

천주교 ‘갑곶순교성지’

일제강점기 갑곶나루와 진해루.(제공ㆍ강화군)
일제강점기 갑곶나루와 진해루.(제공ㆍ강화군)
갑곶순교성지 일대.(제공ㆍ강화군)
갑곶순교성지 일대.(제공ㆍ강화군)

‘통제영학당 옛터’ 표지석에서 왼쪽으로 가면 구릉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보인다. 과거 배를 타고 갑곶나루에 왔을 때 진해루를 통해 읍내로 들어가던 길이다. 좁은 길을 따라 계속 오르면 성당 뒤쪽으로 이어져, 고갯마루를 넘어갈 수 있다. 수많은 주민과 상인, 병사가 오가던 길을 오른다. 마치 과거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다.

계속 읍내까지 걷고 싶지만 둔덕에서 갑곶순교성지 ‘십자가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종교를 떠나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해 사형 선고를 받고 무덤에 묻힐 때까지 14처를 형상화한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되면 저절로 숙연해진다.

길을 따라 계속 오르니 십자가를 지고갈 수 있게 만들어놓은 곳이 나오고, 그 앞에 ‘세쌍둥이 은행나무’가 보인다. 연리지가 이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세쌍둥이처럼 서있는 것은 처음 본다. 더욱 희한한 것은 이곳 갑곶 순교성지에서 세 분이 순교했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있는 곳 옆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이곳을 오르면 ‘순교자 삼위비’ 정면으로 잔디광장이 나온다. 광장의 오른쪽 끝에는 기도하는 예수상이, 왼쪽으로는 십자가상이 있다. 예수가 기도하는 모습에서 겸허와 무욕을 본다.

예수상을 마주보고 장궤틀(=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는 틀)이 있는데, 그 앞 땅에 박힌 복련(覆蓮,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의 무늬)문양의 석등 하대석은 사찰에서 많이 본 모습이다. 어느 사찰 터에서 가져왔을 텐데, 그 발상이 재미있다. 왼쪽에 세운 예수가 못 박힌 십지가상은 처연하기 이를 데 없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순교자 삼위비’는 갑곶진두(나루터)에서 처형된 순교자 세 분을 기리는 것이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해역에 미국 군함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탄 사건의 책임을 물어 통상을 요구했다.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면서 군사 충돌이 빚어졌고, 이를 빌미로 천주교를 박해했다.

그 결과, 기록상 제물진두(현재 화수동성당 주변)에서 여섯 분이, 이곳 갑곶진두에서는 우윤집ㆍ최순복ㆍ박상손이 순교했다. 사연은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같은 해 음력 5월 29일 고종은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좌우포도대장에게 내렸고, 이때 미국 군함에 몰래 찾아갔다는 죄로 이 세 분이 효수됐다.

문헌상 갑곶진두의 위치를 연구한 천주교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는 그 자리를 매입해 지금의 ‘갑곶순교성지’를 조성했다. 2000년부터 개발해 지금과 같은 성지순례길을 만들었다.

치유될 수 없는 상처, ‘갑곳 선착장 집단양민학살’

순교자 삼위비.
순교자 삼위비.
갑곶돈대가 있던 옛 강화대교.
갑곶돈대가 있던 옛 강화대교.

삼위비 광장에서 옛 강화대교로 길을 나오면 잡풀이 우거진 속에 빛바랜 ‘갑곶 선착장 집단양민학살지’ 표지판이 서있다. 잘 꾸며진 ‘갑곶순교성지’와 대비돼 글자의 칠마저 벗겨진 것을 보면 눈물이 나고 서글퍼진다.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한다.

1951년 1ㆍ4후퇴 때 이곳 대교 아래 갑곶 선창장에서 집단 학살이 벌어졌다. 1월 2일 경찰이 강화도를 빠져나가자, 이승만의 지시로 만들어진 이곳 대한청년단의 후신인 ‘강화향토방위특공대’는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3개월간 북한군에 부역한 사람들이나 월북한 사람들의 가족을 연행해갔다.

그리고 1월 6일에서 8일까지 3일간 저녁에 10여 명씩 갑곶 나루터와 옥계 갯벌에서 바다를 향해 세워놓고 뒤에서 총을 쐈다. 또, 면단위 특공대들은 양민들을 야산으로 끌고 가 파놓은 구덩이에 넣고 청솔가지로 덮은 뒤 흉기로 난타해 학살했다.

갑곶 나루터와 옥계 갯벌에서 희생된 사람은 남자 45명, 여자 15명 정도에 어린아이도 있었다. 그 후 1월 말에서 2월 초에 걸쳐 해안에서 300여 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수장된 시신은 수습도 못했고, 야산에서 학살당한 경우는 시신을 수습한 경우도 있다.

그중 60여 명은 노인ㆍ여성ㆍ갓난아기였다. 그 후의 학살은 부역을 하고 피란했다가 다시 들어온 강화 주민들이었다고 한다. 2012년, 법원은 학살 피해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에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표지판을 보면 이곳이 그냥 방치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년이면 집단양민 학살 70주년이다. 아직도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담고 힘겨워하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국가의 노력이 필요하다. 폐쇄된 옛 강화대교, 요즘 도보와 자전거 길을 만들어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가는 것이 마치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알려주듯 표지판과 함께 성큼 다가온다.

19C 제작한 8폭 병풍, 강화도 지도, 서울대박물관 소장.
19C 제작한 8폭 병풍, 강화도 지도, 서울대박물관 소장.
진해루.(제공ㆍ강화군)
진해루.(제공ㆍ강화군)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천영기 시민기자는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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