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덕적도(상)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덕적도는 덕적군도의 중심 섬으로 우리말 ‘큰물섬’에서 유래됐다. 문헌에는 한자인 덕물도(德勿島, 德物島), 득물도(得物島), 인물도(仁勿島) 또는 수심도(水深島) 등으로 기록돼 전해지는데, 그만큼 수심이 깊고 큰 섬이란 뜻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섬사람들이 어질고 덕이 많다’ 해서 덕적도(德積島)라 칭하며 지금 이름이 됐다. 그러나 지역민들은 ‘큰물이’ 혹은 ‘덕물도’라 부른다.

도우끝 해안산책로를 따라

소야도에서 바라본 덕적도 도우선착장.
대형어선 지질아치배와 ‘어부상’과 ‘환상의 섬’ 표지판.

덕적도는 내게 젊은 날의 추억이 오롯이 담긴 섬이다. 1975년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선생님들과 덕적중ㆍ고등학교에서 1주일 동안 묵으며 섬 탐사를 했으며, 1984년에는 학교 앞 마을에서 한 달간 하숙을 하며 교생실습을 했다. 그래서 청춘기의 남다른 경험이 섬 곳곳에 남아있다. 과연 과거의 추억이 어떻게 변해있을까. 저 밑바닥에 가라앉은 추억을 길어 올리면 무슨 빛깔일까. 직접 가서 확인해볼 수밖에.

덕적도 도우선착장에 내리니 점심을 먹을 때가 됐다. 해장으로 먹으면 좋을 간재미 매운탕을 느긋하게 먹은 후 하루 계획을 세워본다. 2012년 미국 CNN은 문화여행 프로그램 ‘CNN GO’로 ‘한국의 아름다운 섬 33곳’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 섬들의 아름다움을 순위로 정했는 데 ‘덕적도’가 6위에 자리매김했다. 그래서인지 선착장 앞에는 풍요로운 삶을 염원하는 ‘대형 어선 지질아치배와 어부상’이 서있고 ‘환상의 섬’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어부상에서 왼쪽 주차장 쪽으로 계속 걸어 들어가면 범선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에서부터 ‘도우끝 해안산책로’가 시작된다. 덱(deck) 계단 길은 2018년 개통한 ‘덕적소야교’ 밑으로 이어진다. 계단을 오르자 해안 언덕으로 나있는 산책길이 나온다. 가는 도중 표지판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길 중간 중간에 큰여 전망대, 도우끝부리 전망대, 도우끝 쉼터 등이 있어 잠시 앉아 소야도를 배경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좋다.

마침 물이 빠져 도우끝 쉼터에서 바다로 내려갔다. 갯바위가 펼쳐지는데 조금 큰 돌들에는 굴 껍질이 닥지닥지 붙어있어 걷기가 조금 불편하다. 그러나 시원하게 펼쳐지는 해안선을 따라 멀리 진리해변 모래사장과 마을이 보인다. 모래사장 뒤로 소나무 군락지는 그대로인데 학교 건물들은 예전 모습이 아니다.

추억 속 덕적초ㆍ중ㆍ고교

도우끝 해안산책로 시발점인 범선전망대.
해안선을 따라 보이는 진리해변 모래사장.

진리해변으로 오니 과거에 생활하며 지냈던 덕적초ㆍ중ㆍ고교 건물이 현대식으로 몽땅 바뀌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무려 40여 년이 지났으니 그대로 있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바다 쪽으로 3층짜리 아파트형 교직원 관사가 새로 들어섰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풍광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한 교직원 관사가 아닐는 지. 그러나 건물만 모습이 바뀌었을 뿐 자연지형은 그때 그대로이다.

학교는 울타리로 막혀 있다. 아, 예전에 들어간 적이 있는 빨간 벽돌집 교장 관사가 그대로 있다. 이곳에 사람이 사는지, 문이 열려있다. 풍산개 한 마리가 개집에서 오수를 즐기다 인기척에 어슬렁거리며 마당으로 나온다. 그놈 참 멋지게 생겼다. 마주 바라보는 눈이 쌍까풀이 지고 머나먼 이국의 눈빛처럼 투명한 것이 순한 느낌을 준다.

교생실습을 할 때 이곳에 젊은 선생님이 계셨는데, 섬에서 선생님을 하고 싶다고 하니 쉽지는 않단다. 자신도 처음에 이곳에 와서 파도를 보며 낭만을 생각했는데 쉬지 않고 규칙적으로 들리는 파도소리, 특히 밤이나 새벽에 들려오는 끊임없는 파도소리가 나중에는 지겹다며 가끔은 우울해진다고 한다. 어쩌다 섬에 들어가는 나야 파도소리가 낭만적일지 모르나 매일 듣게 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내게는 낭만적으로 들리니, 나는 잠깐 스쳐가는 손님이 분명하다. 나중에 섬에 살게 되면 고려해봐야 할 것 같다.

교생실습을 할 때 중ㆍ고교가 모두 한 반씩, 중학교는 한 반에 20명 정도였고 고등학교는 한 반에 10여 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유치원과 초ㆍ중ㆍ고교가 다 통합됐다. 그래서 전체 교원 수는 많이 늘었는데 학생 수는 오히려 줄어들어 관공서 직원들의 자녀들이 없으면 학교 운영이 어려울 정도라 한다. 속담에 ‘사람은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낳으면 제주도로 보낸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시를 동경했고 1970년대 산업화와 맞물려 많은 젊은이가 도시로 옮겨갔다. 이곳 섬들도 70년대 이후 풍요를 보장하던 새우와 민어 등의 어획량 감소와 맞물려 도시를 선망한 젊은이들이 육지로 빠져나갔다. 시골도 마찬가지지만 섬들은 이미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 다만, 은퇴한 사람들이 섬으로 들어와 펜션을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덕적초ㆍ중ㆍ고교 소나무 군락지

옛 교장 관사에서 본 쌍까풀이 멋진 풍산개.
해무가 옅게 깔리는 새벽에 만난 몽환의 세계.

소나무 군락지는 예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다. 지금 이곳은 소나무 보호지역으로 지정돼있어 일반인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이곳에 미군들이 만든 간이골프장도 기억 속 모습 그대로다. 30여 년 전에 간이골프장에서 깔깔대며 놀던 아이들의 소리가 귓바퀴를 간질인다. 지금은 40대 중반이 됐을 그 아이들, 기억을 더듬어 마을분들에게 물으니 다 육지로 나갔단다.

새벽에 일어나라고 계속 울어대는, 아니 거의 울부짖는 수탉 소리에 비몽사몽 카메라를 들고 해변으로 나갔다. 마침 덕적초ㆍ중ㆍ고교 정문이 열려있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소나무 군락지로 갔다. 안내판을 보니, 소나무들의 수종은 해송으로 수령이 대략 120~150세로 추정되는데 모두 650그루란다. 이곳 해송들은 줄기가 가늘고 거의 정상 부분에 솔가지가 뻗어있다. 그래서 100년이 넘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소나무 숲속은 괴괴한데 홀로 솔밭을 거니니 추억이 샘물처럼 솟아난다.

그 당시 덕적도에는 전기를 자가 발전해 밤 10시까지만 공급했기에 냉장고를 사용할 수 없어 육류 같은 것들은 우물 속이나 부엌 한쪽에 땅을 파서 보관했다. 그래서 고기 먹기가 힘들었고 10시 이후에는 논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와 달빛이 유일한 벗이었다.

학급 인원이 적어 남녀 혼성팀으로 축구시합을 하며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일, 스승의 날 관공서 직원들과 배구시합을 하던 것, 배구시합 후 잔치가 열렸는데 마침 행정실장 아버님이 환갑이라 육지에 나갔다가 소고기를 사왔다며 잔치에 내놓아 무척 맛있게 먹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개고기였다는 것 등, 시간이 무척이나 흘렀는데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 소중한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파르스름한 여명이 솔가지 위로 살금살금 뿌려진다. 어둠을 몰아내는 소리에 해변으로 나가니 밀물을 감추려는 듯 해무가 옅게 깔려 몽환의 세계를 그려낸 다.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는 안개 속으로 모두 빨려 들어 포근하게 잠기는 느낌, 이것 하나 본 것만으로도 만족해야한다. 나는 이 여명의 푸르스름한 색을 좋아한다. 새벽에 일찍 나간다고 항상 이런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이 어우러져 만드는 순간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여행을 하다보면 가끔씩 자연이 연출하는 혜택에 가슴 저린 행복을 누린다.

기미삼일독립만세기념비와 진리 석비군

덕적초중고 소나무 군락지.
기미삼일독립만세기념비(국가보훈처 제공).

학교를 나와 차도를 따라 서포리 방향으로 조금 걸으면 소나무 군락지가 끝나는 곳에 기미삼일독립만세기념비가 서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지 9년 후인 1919년 3월 1일 임용우(林容雨) 선생은 고향인 김포 월곶(月串)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 일로 일제경찰에 수배돼 자신이 근무하던 덕적도 명덕학교로 들어와 제자인 합일학교 선생 이재관(李載寬)ㆍ차경창(車敬昌)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 위해 태극기를 제작했다. 임용우 선생은 학교 운동회를 개최해 주민들을 불러 모으자고 제안했고, 4월 9일을 거사일로 삼았다.

운동회가 끝나고 임용우 선생은 독립선언을 외쳤고 이재관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이 끝난 후 주민들은 국사봉과 마을 뒷산 등에서 봉화를 올려 인근 문갑도와 울도까지 만세운동의 여파를 미치게 했다. 결국 임용우 선생은 일제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35세에 순국했다. 이재관과 차경창은 각각 징역 8개월에 처해졌다. 덕적도 주민들은 그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3ㆍ1 독립만세운동 60주년을 맞아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 오른쪽으로 선정비가 3개 서있다. 왼쪽부터 삼일독립만세를 주도했던 ‘순국열사 임용우 선생 영세불망비(殉國烈士 林容雨先生 永世不忘碑)’, ‘절제사 이공○○ 애민선정비(節制使 李公○○ 愛民善政碑)’, ‘절제사 김공학성 영세불망비(節制使 金公鶴聲 永世不忘碑)’가 놓여있다.

덕적도는 조선 전기에 경기좌도수군첨절제사의 관할지로, 국영 목장이 설치됐다. 숙종 때에는 한양 방비를 목적으로 종4품 수군만호가 파견됐으나 곧 없어졌다.

영조 16년(1740)에는 중국 등주로 연결되는 바닷길을 방어하기 위해 수군진을 다시 설치하고 수군첨사를 파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절제사(節制使, 전국에 걸쳐 중요한 군사 거점에 설치된 중간 규모 군사 진영의 책임자) 선정비가 이곳에 있는 이유다.

순국열사 임용우 선생 영세불망비.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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