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사, 의열단 100주년 ‘민족혁명가 김원봉’ 출간
한길사, 의열단 100주년 ‘민족혁명가 김원봉’ 출간
  • 김갑봉 기자
  • 승인 2019.11.06 11: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설가 이원규, 2006년 ‘김원봉 평전’ 전면개정증보판 펴내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소설가 이원규 선생이 ‘약산 김원봉 평전’ 전면 개정 증보판을 펴냈다. 한길사는 3ㆍ1운동과 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 기획으로 ‘민족혁명가 김원봉’을 출간했다고 밝혔다.

‘민족혁명가 김원봉’은 약산의 독립운동 활동과 생애를 엮은 책이다. 2006년 ‘약산 김원봉 평전’을 펴낸 이원규 선생이 전면 개정하고 증보한 책이다.

이원규 선생은 “2006년에 첫 평전을 쓸 때 자료가 논문 10편에 책 서너 권에 불과했는데, 그 사이 약산과 관련한 자료가 20배 정도 공개돼 다시 쓸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했다.

이 선생은 “내가 얻은 자료도 있지만 미국과 소련의 자료가 공개됐고,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도 상당하다”며 “약산 평전은 늘 마음에 빚으로 남아 죽기 전에 꼭 증보판을 내려했다. 이번에 나오게 돼 마음의 빚을 덜게 됐다”고 덧붙였다.

책 '민족혁명가 김원봉'(한길사)
책 ‘민족혁명가 김원봉’(한길사)

약산 김원봉은 1919년 11월 10일 의열단을 결성해 단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했기에 그의 삶과 독립운동 기록은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약산은 의열단 외에도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맡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데 앞장섰다. 조국 해방과 민족 화합을 위해 몸 바쳐 투쟁한 사람이지만, 북한에서 지냈다는 이유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은 다르다. 뿌리는 둘 다 약산이지만, 중국 국공합작(항일을 위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과 국공내전 역사와 맞물리며 한 축은 조선의용대가 됐고, 다른 축은 조선의용군이 됐다.

중국 국공합작 때 국민당 자금으로 창설한 게 조선의용대다. 약산은 중국무관학교 출신 조선인 약 150명을 군 장교로 육성해 한반도와 가까운 중국 화북과 동북으로 진출하는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중국 공산당 쪽에서 눈치가 빨랐다. 저우언라이는 약산이 똑똑하다는 것을 알고 공작을 펼쳤다. 저우언라이는 자신도 황푸군관학교 중앙군관학교 출신이라며 조선의용대를 팔로군(=국공합작 당시 중국 국민정부가 편성한 공산당 군대)으로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용대 중 70%는 팔로군을 따라서 북상했다. 이를 기다렸다가 수용한 게 팔로군에서 활약하던 중국 인민해방군 포병부대의 아버지로 일컫는 조선인 무정이었다. 이들이 바로 조선의용군이다.

조선의용대 군자금은 국민당이 댔기에 모두 화북과 동북으로 갈 순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가지 않고 남은 약산 등 30%가 조선의용대다. 그런데 국공합작이 깨졌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조선광복군이랑 합치라고 했다. 그렇게 남은 약산과 조선의용대는 광복군으로 통합됐다.

한편, 약산이 이끈 의열단은 인천과 인연이 깊다. 의열단 중에 이을규ㆍ이정규 형제가 있다. 인천 장봉도(현재 옹진군 북도면 장봉리) 출신으로, 인천상업고등학교(현재 인천고교)를 나왔다. <KBS> ‘시사기획 창’이 다룬 ‘밀정’ 다큐에도 등장하는데, 두 사람은 밀정 김달하를 암살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김달하는 친일파 김활란(이화여대 초대 총장)의 형부다.

이원규 선생은 인천고등학교와 동국대 국문과를 나와 대건고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동국대와 인하대에서 후학들을 길렀다. 198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2년 뒤인 1986년 2월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훈장과 굴레’가 당선됐다. 1988년 11월에는 ‘침묵의 섬’으로 대한민국 문학상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고, 2016년에는 ‘황해’로 박영준 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 ‘김산 평전’과 ‘조봉암 평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