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원규, 무관생도 15인 약전 ‘애국인가 친일인가’ 출간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소설가 이원규 선생이 애국과 친일로 나뉜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 15명의 삶을 약전으로 엮어 책으로 출간했다.

이원규 선생은 이번 출간에 앞서 마지막 무관생도 45명의 삶을 추적해 ‘팩션(사실과 허구의 조합)’ 소설 ‘마지막 무관생도들’을 펴냈다. 이중 15명을 다시 추려 항일의 삶을 살다간 애국지사와 친일로 변절한 기회주의자의 삶을 엮어 출간한 것이다.

대한제국 무관학교는 조선이 1895년 4월 초급 무관 양성을 위해 설치한 훈련대에서 비롯했다. 훈련대는 그해 8월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9월에 폐지됐다. 이듬해 1월 무관학교가 설립됐지만 한 달 만에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무용지물이 됐다.

그 뒤 1897년 2월에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고 7월에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10년 만인 1907년 8월 일본제국주의가 강제로 해산하면서 인원이 축소됐고, 1909년 8월에 폐교됐다.

무관학교 폐교 당시 생도는 1학년과 2학년을 합쳐 45명이었다.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일본육군 중앙유년학교에 편입해서 나중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입학했다.

45명 중 독립운동을 실천한 사람은 몇 명 안 된다. 이원규 선생은 소설 ‘마지막 무관생도들’에서 무관생도들의 이타적 애국은 물론 반민족적 배반까지도 깊이 파고들어 인간 존재의 내면에 도사린 욕망과 양심을 끄집어내 문단의 호평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15명으로 추려 소설이 아닌 약전으로 출간했다. 15명은 역사 자료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고 비중이 큰 인물이다.

이원규 선생은 “항일운동에 헌신한 지사를 기리고, 친일로 변절한 기회주의자를 기억하기 위해 따로 약전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항일과 친일로 갈린 마지막 무관생도들.

극명한 대조, 항일 지청천의 삶과 친일 이응준의 삶

가장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인물은 항일 인사 이청천(=지청천) 장군과 친일파 이응준이다. 둘은 무관학교 동기이자 일본 육사 26기 동기다. 그리고 이들을 지도한 사람은 일본 육사 23기 출신 항일투사 김경천 지사다.

이원규 선생은 “마지막 무관생도였던 김경천과 지청천, 홍사익, 이응준은 일본 육사 생도 시절 1910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피를 술잔에 섞어 나눠 마시며 만주로 가서 항일투쟁을 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이 결의한 날은 경술국치 일주일 뒤였다”며 “김경천과 지청천은 신흥무관학교로 가서 항일투쟁을 시작했고, 이응준과 홍사익은 안 갔다”고 말했다.

이원규 선생은 이응준에 대해 “KBS 다큐(=시사기획 창)에 수많은 밀정을 관리한 우쓰노미아 다로(宇都宮太郞)가 나왔는데, 이 우쓰노미아 다로가 관리한 인물이 이응준이다. 이응준은 일본 육군 중위 신분으로 독립운동 군자금 밀사한테 권총을 빌려줬다가 잡혔다. 그런데 우쓰노미아 다로가 이응준을 처벌하는 대신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불문율에 붙였다. 그러니 이응준은 지청천과 결의하고도 만주로 갈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응준은 일본군 대좌로 광복을 맞았고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초대 참모총장을 지냈다.

홍사익은 일본 육사 시절 성적이 좋은 엘리트였다. 일본인 생도들이 줄을 지어서 노트를 빌릴 정도였다. 육사를 나오더라도 육군대학을 나와야 장군이 될 수 있는데, 사단장이 홍사익을 육군대학에 보내주겠고 할 정도였다. 홍사익은 일본군 중장으로 승진한 뒤 태평양전쟁 전범으로 처형당했다.

김경천과 지청천 말고도 일본 육사를 탈출한 인사 중에 조철호 지사가 있다. 훗날 대한민국 보이스카우트를 창설한 인물이다.

이원규 선생은 “조철호 지사는 일본 육군 기밀문서를 가지고 탈출하다가 걸렸다. 일제 회유를 수용하면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진 않았으나 다른 방식으로 항일운동을 했고, 변절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항일로 마감한 이종혁과 친일로 마감한 친구 김석원

이종혁 지사는 일본군에 복무하다가 마지막은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이 지사는 이순신 장군의 후손이다.

이원규 선생은 “1917년 러시아 혁명기 러시아 내 적군과 백군이 내전을 치를 때, 일본군이 국제간섭군으로 연해주에 들어갔다. 이때 이종혁 소대장 부대가 적군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빨치산을 잡았다. 조선 사람이니 풀어주면 되는 거였는데, 그러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잡힌 조선 사람이 빨치산인 게 탄로나 총살당하러 가는 길에 이종혁한테 ‘당신 조선 사람이지’라고 물었다. 아마 이종혁은 그 일로 트라우마가 생겼을 것이다. 명색이 이순신 장군의 후손인데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중위 때 일본군을 탈출해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조선 밀정이 파놓은 덫에 걸려 감옥에서 거의 죽어서 나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덧붙였다.

친일파 중엔 애국지사와 쌓은 우정만큼은 지킨 인물도 있다. 바로 이종혁의 단짝 김석원이다. 일본 육사 27기로 매우 용맹한 일본 장교였다. 일본군 대좌로 광복을 맞았고, 대한민국 국군 사단장을 지낸 후 성남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이원규 선생은 “이종혁 지사가 약값도 없이 거의 다 죽어서 감옥에서 나왔을 때 김석원은 친일의 길에서 권세가 대단할 때였다. 이종혁은 후배 동지였던 유봉녕(훗날 조선일보 주필)한테 자신이 나왔음을 김석원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김석원은 일제 상관한테 깨질 거를 알았지만, 돈을 들고 찾아가 이종혁을 보살폈다. 친일을 하긴 했지만 우정은 지킨 셈이다”라고 말했다.

끝으로 이원규 선생은 “마지막 무관생도 모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항일과 친일이라는 두 가지 길로 극명하게 갈렸고, 그 중에서도 친일이라는 변절과 굴종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친일과 굴종의 삶을 선택한 이들이 광복 후 창군 주도권을 잡은 역사의 모순이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다”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절조를 지킨 지사들이 있어 이 나라 현대사가 덜 부끄러울 수 있다. 이들의 생애는 우리의 자화상이다”라고 말했다.

이원규 소설가.

한편, 이원규 선생은 올해 11월 ‘약산 김원봉 평전’ 전면 증보판(한길사)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원규 선생은 “약산 평전을 낸 게 2006년이다. 그때는 자료가 논문 10편에 책 서너 권에 불과했다. 그 사이 약산과 관련한 자료가 20배 정도 공개됐다. 내가 얻은 자료도 있지만 미국과 소련의 자료가 공개됐고,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도 상당하다”며 “약산 평전은 늘 마음에 빚으로 남아 죽기 전에 꼭 증보판을 내려했는데, 올 가을 내놓으려한다”고 말했다.

이원규 선생은 인천고등학교와 동국대 국문과를 나와 대건고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동국대와 인하대에서 후학들을 길렀다. 198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2년 뒤인 1986년 2월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훈장과 굴레’가 당선됐다. 1988년 11월에는 ‘침묵의 섬’으로 대한민국 문학상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고, 2016년에는 ‘황해’로 박영준 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 ‘김산 평전’과 ‘조봉암 평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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