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 (제4편)

완치 불가능한 슈만, 애타는 클라라
 

슈만과 클라라.

슈만이 입원하고 담당 의사 리카르츠는 모든 면회를 금지하는 대신 먼발치에서 관찰하는 것은 허락했는데, 여기에 클라라는 제외됐다. 리카르츠는 둘의 접촉이 슈만과 임산부였던 클라라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되리라고 확신했다. 클라라가 슈만에게 편지를 쓰는 것조차 금지당해 전달되지 않았다. 대신 병원에서 주기적으로 슈만의 상태를 클라라에게 알려줬다. 애가 타는 클라라는 자신을 대신해 자주 슈만을 관찰하고 자신에게 상황을 알려준 본 합창단 지휘자 바실레프스키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로버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이게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릅니다. 남편이 어떻게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그가 여전히 환청을 듣는지 몰라서 내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중략) 친애하는 친구여, 제발 나를 무지의 상태로 두지마세요. 직접 찾아가 볼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을 보내세요. 돈은 내가 낼 테니까요.”

그로부터 들려오는 슈만의 소식에 클라라는 절망했다. 슈만은 조금씩 사물을 알아보고 음악에 관해 얘기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클라라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슈만도 자신의 처지가 너무 괴로워 가족이라는 기억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멀어지려했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며칠 후, 클라라는 병원으로부터 슈만이 완치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클라라를 지지해주는 건 만사를 팽개치고 달려와 준 브람스와 요아힘, 그리고 동료 음악가들이었다. 특히 브람스는 2년여를 클라라 집에 머물며 클라라와 아이들을 보살폈다.

아이 일곱을 키워야하는 워킹맘으로

클라라는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슈만의 엄청난 병원비와 곧 태어날 아이까지 일곱을 키워야하는 워킹맘이 된 것이다. 그는 곧바로 강의를 시작했으며, 연주회를 위한 맹연습에 들어간다. 음악은 생계 해결뿐 아니라 그에게 위안을 주는 도피처가 됐다. 그는 주로 슈만의 곡을 연주했는데, 이는 오직 음악 속에서만 그리운 그를 다시 만나고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라라는 밤이면 지친 몸을 끌고 슈만의 책상에 앉아 그의 사진과 소지품을 품에 안았다. 그렇게 그는 그 시간을 버텨나갔다.

결혼과 연이은 출산으로 연주가 뜸했던 클라라는 본격적으로 연주가의 길로 다시 들어선다. 슬프지만 예술가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슈만의 사정을 듣고 부유한 친구들과 동료 음악가들이 자선음악회를 열어 클라라를 돕고자했다.

“나는 물론 사양했다. 나를 위한 자선음악회 같은 것은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나 자신이 하겠다. 그러나 이들의 우정에는 진실로 감사한다. 우정, 그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클라라의 일기)

6월 11일에 클라라의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에서 가져온 펠릭스라고 이름을 지었다. 멘델스존은 클라라가 신동 시절부터 클라라의 연주를 최고로 여기며 라이프치히에서 많은 무대를 함께 했으며, 클라라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음악가였다. 그런 멘델스존이 몇 해 전 나이 38세에 갑작스레 사망했고 그를 애도하다가 아들이 태어나면 그의 이름을 물려주기로 슈만과 약속했다.

슈만이 입원한 지 6개월, 그가 가족을 궁금해 한다며 편지를 보내도 좋다는 기별이 왔다. 클라라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썼으며, 이틀 만에 브람스가 답장을 들고 왔다.

“로베르트로부터 편지가 왔다. 무엇이라고 말하면 좋을까. 나의 손은 아직도 떨린다. 사랑스런 그의 필적, 모든 언어에 충만하고 있는 그의 고귀한 정신, 나와 아이들을 친절하게 묻고 있다. (중략) 그는 얼마 가지 않아 틀림없이 회복할 것이다. 그의 편지가 실어다준 기쁨 앞에서 과거의 고통은 전부 꺼져버렸다.”(클라라의 일기)

사랑에 위로받지만, 선을 그을 수밖에

요하네스 브람스.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르자마자 클라라는 연주회를 시작한다. 내면으로부터 위대한 남편, 슈만의 음악을 알리고 싶은 마음과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그의 길을 재촉했다. 그해 10월부터 연말까지 독일 전역을 돌며 연주회를 무려 22번이나 열었고, 그가 연주여행을 다니는 동안 브람스는 클라라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보며 가사를 꾸려가고 집안의 사소한 문제들에 관해 클라라와 서신으로 소통했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위로하기 위해 ‘피아노 3중주’를 써서 들려줬고 막내 펠릭스가 태어났을 때는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써서 그를 위로했다. 클라라는 그의 연주를 들으며 잠시라도 슬픔을 내려놓았다. 클라라를 향해 커져가는 브람스의 마음은 창작의 원천이 됐다. 슈만이 입원한 지 1년여 만에 브람스는 담당 의사를 설득해 면회를 허락받았다. 슈만을 만나고 온 브람스는 연주여행을 떠나있는 클라라에게 편지를 쓴다.

“오늘은 2시부터 6시까지 당신의 사랑하는 남편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진을 드렸습니다. 아! 당신이 그분의 깊은 감동을 볼 수 있었다면…. 눈물을 흘리면서 사진을 가슴에 끌어 앉고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던 것인가.’ 하시며 쥐고 있는 손이 마구 떨렸습니다. 몇 번이나 사진을 들여다보시더니 좀 더 자세히 보려고 일어나서 창가로 가셨습니다. (중략) 나는 무미건조하게밖에는 쓰지 못합니다. 선생님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눈동자, 부인 이야기를 할 때의 포근함, 사진을 보실 적 그 기쁜 모습, 그런 것들을 도저히 나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상상해주십시오.”(브람스의 편지)

슈만에 대한 클라라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브람스는 이렇게 슈만의 안부를 전했고 한편으론 뜨거워진 자신의 마음도 숨길 길이 없었다.

“당신은 사랑의 신비로움, 청정함, 그리고 희생하는 마음을 나에게 가르쳐줍니다. 아아, 언어란 감정에 대해서 얼마나 무력한 것일까요. 내 마음을 직접 당신에게 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의 사랑이 그만큼 깊다는 것을 믿어주세요.”

“사랑하는 클라라.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고 얼마나 당신을 위해 헌신하고 싶어 하는지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하루 종일 애인이라든지 무엇이라 하든지 쉴새 없이 불러보고 싶습니다. (중략) 나는 당신을 나의 클라라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끝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클라라는 이런 브람스의 마음에 위로받았다. 클라라는 9세 때 슈만을 처음 만나 11세에는 잠시 함께 살았고 이후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클라라에게 슈만은 하나의 우주였다. 한평생 사랑한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리고 마음 둘 곳 없는 한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 혼자서 아이 일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이 사람은 그를 사랑해주는 한 사람으로부터 위안을 받고 버틸 힘을 비축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남편이 정신병원에 입원해있고 아이가 일곱 딸린 엄마가 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이 있겠는가. 클라라의 성정으론 장래가 촉망받는 청년을 구설에 오르게 하고 싶지도, 주저앉히기도 싫었을 것이다. 그의 사랑에 위로받지만, 선을 그을 수밖에.

슈만을 떠나보내고

1856년 7월 27일 슈만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클라라가 병원을 향한다. 슈만이 자진해서 병원으로 들어 갈 때도 클라라는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라 주변의 만류로 슈만을 보지 못했다. 무려 2년 반 동안 그를 못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 곧 돌아올 줄 알았던 그가 이제 마지막 숨을 겨우 내뱉고 눈을 감아버렸다.

“사망한 로버트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이마는 투명하고 부드러운 능선을 그리고 있다. 내가 깊이 사랑했던 남자의 몸 가까이 서있다. 모든 것이 고요하구나. (중략) 오, 제발 그가 나를 같이 데려가 준다면! 오늘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의 눈썹 위에 꽃을 얹었다. 로버트는 떠나면서 그를 향한 내 사랑도 함께 가져갔다.”(클라라의 일기)

“나는 클라라와 로베르트의 재회보다 감동적인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그녀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고 믿을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그는 이윽고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녀를 끌어안으려했으나 한쪽 팔밖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너무도 조용히 가버려서 우리는 그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브람스의 일기)

슈만이 떠나고 클라라는 빈, 런던, 파리 등 유럽 전역을 돌며 연주했다. 연주회는 가는 곳마다 성황을 이뤘고, 관객은 그를 향해 아낌없는 경의를 표했다. 그의 모든 무대에서는 슈만 곡과 브람스 곡이 흘러나왔다. 클라라의 맹활약에 힘입어 슈만의 명성이 드높아졌고, 사람들도 어려운 슈만 곡에 찬사를 보냈다. 물론 브람스도 자연스레 유럽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공식적 고별무대가 클라라 나이 71세에 열렸으니, 클라라는 무려 35년을 슈만 홍보대사를 한 셈이다. ‘클라라가 없었다면 지금의 슈만이 있었을까’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클라라를 향했던 브람스의 뜨거운 마음은 슈만이 죽고 나자 고요히 가라앉았다. 갑자기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니지만 슈만과 클라라의 마지막 모습에서 감히 그가 범접할 수 없는 뭔가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존경심과 죄책감, 연민, 사랑, 그 여러 타래 얽혀있는 감정은 브람스 마음을 가라앉혀 놓았다. 클라라는 전 유럽으로 연주하러 다녔고, 브람스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태풍이 지나갔다고 바람이 불지 않는 건 아니다. 브람스는 이후 아가테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져 약혼하지만, 결혼을 앞두고 이별한다. 잔잔한 바람이 몇 번 그를 스쳐지나가지만,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클라라와 그의 가족을 지켜보았다.

진정 사랑했던 오직 한 사람
 

슈만과 클라라의 묘.

클라라의 시련은 끝이 없었다. 아이 8명 중 첫째아들은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고, 둘째아들은 20대 초반에 정신질환이 발병해 평생을 정신병원에 갇혀 살았고, 셋째아들은 보불전쟁 참전 중 류머티즘으로 마약성 진통제로 치료를 받았는데 마약에 중독돼 40대 중반에 사망했다. 셋째아들은 결혼해 아이가 여섯이 있었으니, 클라라는 그 손자ㆍ손녀들과 며느리의 생계까지 책임져야했다. 허약했던 막내아들 펠릭스마저 20대에 사망했고, 셋째 딸마저 결혼하고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이 모든 시련을 견디게 해준 사람은 브람스다. 끊임없이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달려가 일 처리를 돕고 클라라를 위로했다. 클라라의 손끝에 달린 식구가 더 늘어났기에, 클라라는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아니 쉬고 싶지도 않았다. 공백의 시간은 그를 더 괴롭게만 했으니.

말년의 클라라는 류머티즘으로 손이 굳어 연주할 수 없었고 청각까지 잃었다. 1895년 9월, 마이닝겐에서 ‘3대 B(바흐ㆍ베토벤ㆍ브람스) 대축제’가 열렸다. 두 사람은 이미 사망했으므로 사실상 브람스를 위한 축제였으며, 브람스는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맛보았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음악가 몇 명과 클라라를 찾아갔다. 클라라의 집에서는 작은 콘서트가 열렸다. 반주는 브람스, 노래는 매력적인 소프라노 안토니아가 맡았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클라라는 동료들의 표정을 보며 웃음 짓고 있었다. 모두 돌아가고 브람스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클라라의 방에서 피아노 소리가 흘러 나왔다. 바흐의 파스토랄이 있는 전주곡과 푸가에 이어 브람스의 로만체 F장조가 흘러나왔고 마지막으로 브람스의 인터메조 E플랫 단조가 연주됐다. 클라라는 구불구불 뒤틀린 손으로, 들리지 않는 음악을 마음속으로 들으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피아노로 쏟아냈다. 맞은편에는 브람스가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형용할 수 없는 적막이 흘렀다. 두 거장은 적막 속에서 오래도록 서로 바라보았다. 눈물을 흘린 건, 이 모습을 지켜본 막내딸 오이게니다.

클라라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감한 브람스는 집으로 돌아와 ‘네 개의 엄숙의 노래’를 썼다. 이 모습을 마지막으로 1896년 5월 20일 클라라는 숨을 거뒀다. 이 소식을 들은 브람스는 허둥거리느라 기차를 잘못 타는 바람에 무려 40시간이 걸려 장지에 도착한다. 장례식은 이미 끝났고 그토록 사랑했던 클라라는 슈만의 옆에 묻히고 있었다.

“나는 오늘 내가 진정 사랑했던 오직 한 사람, 그 사람을 묻었다”라고 말하며 브람스는 통곡했다. 클라라가 가고 1년이 되지 않아 간암으로 투병 중이었던 브람스도 생명의 끈을 놓았다.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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