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 클라라 비크와 로베르트 슈만 (제1편)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하노버에서, 15세 클라라 비크. 피아노 위에 그녀의 협주곡 7번 3악장 솔로 파트가 펼쳐져있다.(J.기에르의 1835년 석판화, 츠비카우의 슈만하우스 소장)

 1838년, 오스트리아 극시인 프란츠 그릴파처는 18세 소녀 클라라 비크가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57번(열정)’을 듣고 ‘클라라 비크와 베토벤’이라는 시를 써서 클라라를 극찬하며 그와 베토벤을 나란히 놓았다.

빈에서 클라라는 당대 비르투오소(기교가 뛰어난 전문 연주자)인 니콜로 파가니니, 지기스문트 탈베르크의 인기를 넘어섰다. 콘서트 때마다 광적인 환호로 커튼콜을 무려 열세 번 받은 적도 있으며, 오스트리아는 그를 황실 명연주가로 지명했다. 이 상은 18세 연주자에게 수여된 적도, 외국인 여성에게 수여된 적도 없었다. 제후는 그를 일컬어 ‘경이로움 그 자체’라 칭했다.

불운한 가정사

클라라 비크(1819-1896)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피아노 교사이자 피아노 상인이었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와 소프라노 솔리스트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마리안 트롬리츠 비크 바르기엘 사이에 둘째로 태어났지만, 첫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사망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장녀로 자랐다.

아버지 비크는 어머니 마리안보다 12세 많았고 타고난 사업가에 야심 가득한 인물이었다. 19세에 혼인한 마리안은 그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매주 솔로로 노래했으며, 때로는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마리안이 공연할 때마다 피아노 선생으로서 비크의 명성도 올라갔다. 비크는 마리안을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마리안은 공연하고 손님 접대하고 남편 친구인 피아노 교사 아돌프 바르기엘과 함께 피아노를 연습했으며, 가사를 도맡았고 피아노반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러는 7년 사이 아이도 다섯을 낳았다. 잠시도 틈을 주지 않는 남편의 욕망과 착취를 견딜 수 없던 마리안은 다섯째 아이를 낳자마자 클라라와 막내를 데리고 친정집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막내가 곧 죽었고 아이들 소유권이 모두 남편에게 있었기에 마리안은 클라라와 이별하고 만다. 이혼한 후 마리안은 남편 친구이자 피아노 교사였던 아돌프 바르기엘과 재혼한다. 아돌프는 비크와 다르게 매우 다정한 사람이었으며, 둘은 네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아돌프가 1841년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마리안은 피아노 교습을 하며 홀로 네 아이를 키운다. 그중 둘째 아들이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지휘자인 볼데마를 바르기엘이다. 볼데마를은 훗날 클라라와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된다.

아버지의 욕망과 최상의 교육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던 마리안이 떠나자, 아버지 비크는 모든 관심을 클라라에게 쏟는다. 그가 정성을 쏟은 만큼, 클라라는 타고난 재능으로 그를 만족시켰다. 두 남동생은 음악적 재능이 없었기에 늘 비크의 화풀이 대상이거나 뒷전이었다. 따라서 자립할 나이가 되자마자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독립했다. 클라라는 아홉 살부터 신동이란 꼬리표를 달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비크의 목표는 단 하나. 클라라를 위대한 예술가를 만드는 일. 덕분에 클라라는 최상의 교육을 받는다. 개인 교습으로 영어와 프랑스어를, 크리스찬 테오도르 바인리그에게서 음악이론과 화성을, 라이프치히 오페라 음악감독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그리고 연주여행을 다니며 그곳의 유명한 음악교사로부터 대위법, 관현악 조곡법, 성악과 바이올린, 그리고 종교학까지 배운다. 저녁 시간은 오페라나 연극 관람으로 채워졌다.

괴테의 찬사

클라라가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서 성공적인 연주를 마치자, 비크는 성공을 확신하고 예술의 성지 파리로 연주여행을 떠난다. 중간 기착지 바이마르의 사저에서 연주회를 열었고 그 자리에는 괴테가 있었다. 12세이었던 클라라의 연주에 감동한 괴테는 클라라에게 ‘남자아이 여섯 명이 (피아노를) 치는 것만큼의 힘을 가지고 연주한다’고 말한 뒤, 자신의 초상화가 담긴 메달에 ‘뛰어난 재능을 물려받은 예술가 클라라 비크에게’라는 문구를 써서 건넸다. 이 연주회를 본 바이마르 특파원은 이렇게 논평했다.

‘아직 어린 연주자인 클라라 비크는 프로그램 첫 곡부터 청중의 어마어마한 환호를 이끌어냈고 이어지는 곡에서는 영광에 가까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실로 이 연주자는 위대한 기술과 침착함, 그리고 힘을 갖고 가장 어려운 악장들마저 너무나 쉽게 연주해냈는데, 이 점이 실로 경이롭다. 더욱 특기할 만 한 점은 클라라 비크의 연주가 선보이는 영혼과 감정의 깊이다. 누구도 감히 그 이상 바라지 못할 만큼 완벽한 연주였다.’

유로화로 통일되기 전 독일 100마르크 화폐에 클라라 슈만의 얼굴이 들어있었다.

 서로 추종자가 된 클라라와 쇼팽

파리에 도착한 비크는 쇼팽에게 연락을 취했고, 클라라가 쇼팽 앞에서 연주할 기회가 왔다. 열 살 연상의 쇼팽은 클라라의 연주에 매료됐다. 쇼팽은 자신의 피아노협주곡 E단조 필사본을 클라라에게 보내며 “너 같은 놀라운 재능을 가진 피아니스트가 이 곡을 연주해주길 고대하며”라는 메모를 남긴다.

그 이후에도 쇼팽은 직접 클라라를 찾아가 클라라의 연주를 듣고 답례로 자신도 연주했다. 그리고 클라라의 OP. 5 작품을 얻어가며 답례로 알붐블라트라는 작품을 선물했는데, 그 필사본에 “1836년 9월 12일 라이프치히, 클라라의 추종자가 그녀를 그리워합니다”라고 자필로 서명했다.

쇼팽의 곡을 아주 좋아해 공연마다 그의 곡을 연주했던 클라라는 71세, 그의 공식 고별무대에서도 쇼팽의 F단조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클라라 비크, 클라라 슈만이 되다

아버지 비크의 명성을 듣고 그에게 음악을 배우고자 찾아온 이가 있었다.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 비크는 슈만을 보고 그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봤다. 그렇게 슈만은 비크의 제자로 들어가 그의 집에서 1년 동안 같이 살았다. 당시 11세였던 클라라는 20세 슈만에게 그저 꼬마였다. 슈만은 클라라와 같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장난을 치며 보냈는데, 이것이 클라라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틀에 꽉 짜인 생활 속에서 슈만은 단비 같은 존재였다. 클라라는 1831년에 출간한 자신의 곡 ‘낭만 변주곡’을 슈만에게 헌정했다. 물론 아버지의 허락 아래. 클라라는 9세 때부터 이미 작곡을 했다.

슈만은 비크의 제자인 어네스티네 폰 프릭켄과 사랑에 빠져 약혼했다. 한때는 결혼까지 생각하는 사이였으나, 인연이 아니었는지 둘은 깨졌다. 슈만의 관심은 클라라(당시 17세)에게 옮겨왔다. 이를 눈치 챈 비크는 노발대발하며 클라라에게 ‘슈만을 계속 만나면 슈만을 총으로 쏘겠다’고 협박했다. 비록 슈만의 재능은 인정하지만, 클라라는 이미 국제적 스타였고 슈만은 주변에만 이름이 알려진 무명의 음악가였다. 이런 슈만이 비크 눈에 찰 리가 없다. 더욱이 비크는 클라라를 이용해 큰 돈을 벌기 시작했으니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슈만은 약지에 힘을 키우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연습하다가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을 입는다. 피아니스트 꿈을 접고 작곡과 비평에 비중을 두고 있었으니, 그의 곡을 해석하고 연주해줄 전문 연주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클라라만큼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해주는 연주자를 찾기 어려웠다. 둘은 사랑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깊이 연결돼있었기에 슈만도 클라라를 놓칠 수 없었다.

둘 사이를 안 비크는 클라라와 더 자주 연주여행을 떠났다. 유럽은 클라라 열기로 점점 더 달아올랐다. 비크는 둘이 연락할 수 없게 편지를 가로챘지만, 사랑은 장애물이 높을수록 더 강해지는 법. 슈만과 클라라는 지인들을 이용해 서신을 주고받았고 둘 사이는 더 견고해졌다.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은 비크는 클라라와 슈만에 대해 허위사실을 퍼트리고 다녔다.

당시 21세 미만 여자는 부모 동의 없이는 결혼할 수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결혼소송. 비크의 방해공작은 날이 갈수록 수위가 높아졌고 불안해진 슈만은 비크를 상대로 결혼소송에 들어간다. 비크는 슈만이 허약체질에 알코올 중독자여서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다고 소문을 냈고, 이 소문은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됐다.

비크는 비난 여론을 이용할 심산이었지만, 이 소식을 듣고 멘델스존과 리스트가 한달음에 달려와 슈만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증언해줬다. 게다가 파혼한 어네스티네까지 달려와 그를 위해 증언대에 섰다. 소송은 슈만의 승리로 끝났다. 다만 비크가 항소하는 바람에 1년 2개월이 걸렸으며, 결혼은 클라라가 21세를 앞둔 하루 전날에야 이뤄졌다. 우여곡절 끝에 클라라 비크는 클라라 슈만이 됐다.

클라라와 슈만의 미묘한 감정들

클라라는 매니저이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를 잃었고 집을 나오면서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까지 다 잃었다. 비크가 그 돈을 나눠줄 리 만무했으니.

슈만도 소송 중 그를 향한 터무니없는 비난에 깊은 상처를 받았으며, 장인과 클라라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죄책감에 괴로웠다. 하지만 둘은 결혼 후 행복했다.

슈만은 결혼 후에도 클라라가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게 그의 매니저를 자처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미묘한 감정들이 뒤섞였다. 자신보다 훨씬 유명한 여인을 아내로 둔 남자로서, 결혼으로 한 쪽 날개가 접힌 여자로서, 하지만 서로 조심하느라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감정들. 게다가 두 예술가가 함께 성장하기엔 여자에게 몹시 불리한 세상이었다.

“로베르트가 자신의 예술에 집중하면 할수록, 내가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더 적어진다. 하늘만이 아시지! 우리 살림살이가 작다 해도 방해가 끊이지 않고 나는 언제나 방해를 받아 연습할 시간을 뺏긴다.” “내 피아노 연주는 뒷전으로 밀렸다. 로베르트가 작곡할 때면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난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루에 한 시간도 쓸 수 없다니. 내가 너무나 심하게 뒤처져 있지 않기를 바랄 뿐.”(클라라의 일기)

어느 날, 그가 왔다

클라라는 서른세 살이 되었고 슈만과 사이에 아이 다섯이 생겼다. 슈만은 그동안 왕성하게 작품들을 쏟아냈고 클라라도 틈틈이 연주여행을 다녔다. 클라라가 슈만에게 ‘로베르트 슈만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만들어 그에게 헌정한 그해 어느 날, 그가 왔다. 심장이 가슴에서 바닥까지 ‘쿵’ 하고 내려앉는 그 사랑이.

“1853년 어느 날 정오에 벨이 울렸다. 흔히 아이들이 그러하듯 나는 밖으로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거기에 한 청년이, 긴 금발을 하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청년이 서있었다. (중략) 그의 이름은 요하네스 브람스였다.”(클라라의 장녀 마리의 회고) <다음 회에 계속>

[참고서적] 클라라 슈만 평전(낸시B 라이히 지음, 강자연, 하인혜 옮김, 경북대학교 출판부) 클래식 법정(조병선, 뮤진트리)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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