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이 있는 클래식] 갑자기 출현하는 거장, 그런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다
[사연이 있는 클래식] 갑자기 출현하는 거장, 그런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다
  • 문하연 시민기자
  • 승인 2019.07.1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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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브람스와 슈만, 클라라 (제3편)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청년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가 몇 마디 연주했을 때 아버지가 그의 연주를 끊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게. 아내를 불러와야겠소.” 이어진 점심식사를 잊을 수가 없다. 부모님은 몹시 흥분하셨고 설레셨다. 두 분은 그날 아침 방문한 젊은 천재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하셨다. 그 사람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실 수 없었다. 그의 이름은 요하네스 브람스였다.’(슈만의 장녀 마리의 회고록)

요하네스 브람스.
요하네스 브람스.

17세 연상연하 커플에서 태어난 브람스

브람스(1833-1897)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브람스의 아버지 요한 야코프 브람스(1806-1872)의 예사롭지 않은 서사를 이야기하자면, 음악이 매우 하고 싶었던 요한 야코프는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청소년 시절 가출을 한다. 당시 이름난 연주가 테오도어 뮐러를 찾아가 그의 밑에서 여러 악기를 배운다. 엄청난 노력으로 바이올린ㆍ비올라ㆍ첼로ㆍ플뤼겔호른ㆍ콘트라베이스까지 섭렵한 뒤 5년 만에 무지쿠스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받는다. 무지쿠스는 축제나 무도회, 결혼식과 같은 행사에서 연주할 수 있는 자격증 같은 거다. 그의 나이 20세였다.

자격증을 받고 그는 함부르크를 활동무대로 잡았다. 낮에는 경비대 보병 2대대에서 플뤼겔호른 연주자로, 밤에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몇 년 지나 우연히 빈민가에 거처를 마련했는데 그 집주인 크리스티아네와 결혼한다. 그의 나이 24세였고 그녀의 나이 41세였으니, 17세 연상연하 커플이다. 떠돌이 연주자였던 그는 그녀를 삶의 최고 동반자로 느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브람스가 태어났다.

곤궁한 가정형편, 빈젠의 합창단 지휘자로

요한 야코프는 피아노를 치고 싶은 7세 브람스 손을 잡고 오토 코셀을 찾아갔고 브람스는 그의 밑에서 3년을 배운다. 그 이후 위대한 스승 에두아르트 마르크센을 만났다. 이 스승은 가난한 브람스에게 피아노 연주는 물론 작곡과 이론 강습을 무료로 해준다. 그는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음악을 근본적으로 고찰하게 어떤 음악가가 될 것인지를 심어줬다.

브람스는 곤궁한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 교육을 초등 4년여만 받았고 13세 무렵부터 생활전선에 내몰렸다.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함부르크 술집에서 연주하거나 가수들 노래를 반주하는 일이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 사이에서 밤낮없이 혹사당한 브람스는 쓰러지고 만다.

그의 딱한 소식을 들은 아버지의 친구 기재만이 그가 사는 시골 마을 빈젠으로 브람스를 데려온다. 브람스는 그곳에서 기재만의 딸, 브람스보다 한 살 어린 리슈엔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평화롭게 지낸다. 시골 마을에서는 유명한 마르크센의 제자가 왔다며 빈젠의 합창단을 맡아주길 청했고 브람스는 이때 합창단 지휘자로서 합창단이 부를 노래도 썼다.

에두아르트 레메니와 함께 떠난 연주여행

건강을 회복하고 함부르크로 돌아온 브람스는 1848년 공식 리사이틀을 열었고 그 이후 연달아 연주회를 열었다. 함부르크 신문은 브람스의 연주를 격찬하는 기사를 실었고 브람스는 점점 알려지기 시작한다.

1850년, 슈만과 클라라가 연주를 위해 함부르크를 방문했다. 브람스는 한껏 들떠 자신의 곡을 필사해 슈만이 묵고 있는 호텔로 보냈다. 하지만 그 보따리는 개봉도 되지 않은 채 브람스에게 되돌아왔다. 무명의 작곡가가 보낸 보따리를 풀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브람스는 실망했고 부끄러웠다.

얼마 후 브람스는 당시 유명했던 헝가리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에두아르트 레메니를 만나 연주여행을 떠난다. 어린 시절 요양했던 빈젠을 필두로 첼레, 하노버 등 여러 지역에서 연주회를 열었는데, 첼레에서 일은 브람스의 성격과 실력을 보여주는 일화로 유명하다. 연주회를 막 시작하려할 때 브람스는 피아노 조율이 반 음 낮게 된 걸 알았다. 레메니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브람스는 개의치 않고 레메니에게 연주를 시작하라는 사인을 보냈고 연주가 시작되자 브람스는 반 음 높여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자 레메니는 흥분해서 관중을 향해 브람스가 즉흥적으로 조를 옮겨 연주한 것을 말했고 이를 들은 청중은 일렁거렸다. 하지만 브람스는 ‘이게 뭐’ 하며 레메니가 유난 떤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노버에 도착했을 때 레메니는 빈 음악원 동문인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당시 22세)을 찾아가는데, 10대 중반에 이미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이름을 떨친 요제프와 만남은 브람스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천재 끼리는 서로 통하는 법. 요제프는 무명인 브람스의 연주를 듣고 자신과 같은 곳을 바라보는 음악가임을 알아챘다. 요아힘은 레메니의 음악성을 그저 그런 정도로 생각했기에 레메니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미 음악을 거룩하게 만들고 있었는데, (리스트 연주를 제외하고) 내게 그렇게 완전한 만족감을 준 피아노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다네.”(요아힘이 기젤라폰 아르님에게 쓴 편지)

신독일악파와 신고전주의음악 간 대립의 신호탄

그 이후 바이마르에 도착한 그들은 리스트가 머무는 궁정을 방문한다. 당시 리스트는 폰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의 궁정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리스트는 브람스의 연주가 듣고 싶었으나 브람스는 호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그의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리스트 앞에서 연주하기를 꺼렸다. 머뭇거리는 그를 대신해 리스트가 “그럼 내가 해보겠네.”라며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놀라운 경지를 보여준다. 궁정은 환호로 뒤집혔다.

어찌 된 일인지 브람스는 말이 없었다. 진지한 고전음악을 신봉하는 브람스에게 리스트의 혁신적이고 현란한 기교 중심 음악은 맞지 않았다. 레메니는 리스트 옆에서 그의 추종자로 남길 원했고, 브람스는 곧장 바이마르를 떠났다. 이 일을 예상이라도 한 듯 요아힘은 브람스에게 레메니와 관계가 깨지거든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고, 브람스는 요아힘에게 돌아간다. 요아힘도 리스트의 연주 실력은 인정했지만, 둘이 서로 추구하는 음악 방향이 달랐다. 이는 리스트와 바그너가 이끄는 신독일악파와 브람스가 이끄는 신고전주의 음악과 대립의 신호탄이 된다.

최고의 스승 슈만을 만나다

요아힘은 클라라보다 12세 어린 연주자였지만 둘 다 당대 최고의 연주자였고 서로 상대방의 음악성을 신뢰했다. 요아힘은 슈만이 지휘하는 뒤셀도르프 시립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는 등 많은 곡을 함께 했으며, 클라라와는 독일과 영국에서 평생동안 연주를 238회나 함께했다. 셋은 서로 각별한 사이였다. 1853년, 브람스는 요아힘이 써준 소개장을 들고 뒤셀도르프에 있는 슈만을 찾아간다. 처음 퇴짜를 맞았던 쓰라린 기억을 떠올리며 잔뜩 긴장한 채. ‘천재 브람스가 다녀갔다.’(1953년 9월 30일, 브람스가 방문한 날 슈만의 일기)

브람스가 다녀간 후 감동을 주체하기 힘든 슈만도 펜을 들었다. 자신이 창간했으나 절필한 <음악신보>에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으로 10년 만에 다시 글을 썼다.

“…시간이 흐른 후에는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야하고 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이 시대 가장 높은 표현성에 이상적인 선물을 주게 될 사람으로 점차 발전해 대가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이 아니라, 크로노스의 머리에서 완전무장한 미네르바처럼 갑자기 출현하는 거장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다.”

슈만은 브람스를 ‘베토벤을 이을 음악가’로 평가했다. 이는 브람스를 알지 못하는 다른 음악가들 사이에 긴장감을 심어줬고 브람스에게도 부담이 됐다. 브람스가 도대체 어떤 연주를 보여줄지, 어떤 곡을 작곡했는지, 기대치가 너무 높아졌기 때문이다. 브람스는 두 달여를 슈만의 집에 머물렀다. 브람스는 작품 출판에 관한 많은 부분을 슈만과 상의했고, 슈만은 라이프치히의 ‘브라이트 코트&헤르텔’ 출판사에 브람스의 곡을 출판하게 소개해줬다. 브람스는 슈만의 음악을 깊이 존경했고 그를 최고의 스승으로 여겼다.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간 슈만

브람스가 라이프치히에서 출판과 연주로 바쁘게 지내고 있을 때, 베를리오즈가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기 위해 라이프치히를 방문했다. 베를리오즈를 만나기 위해 리스트도 달려갔다. 음악회가 열렸고 브람스는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자 베를리오즈는 브람스를 와락 껴안으며 브람스를 독일고전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에 비유하며 극찬했다. 이렇게 브람스도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브람스가 오기 훨씬 전부터 슈만은 극도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슈만의 신경쇠약이 최악을 향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클라라 나는 라인강에 반지를 던지려하오. 당신도 그렇게 하구려. 그러면 두 반지가 하나가 될 게 아니요.”

슈만은 클라라에게 이런 쪽지를 남기고 라인강에 몸을 던졌다. 브람스가 슈만을 만난 지 5개월 만이고 클라라가 일곱째 아이를 임신한 지 6개월 됐을 때다.

“내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본 것은,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집을 나선 때였다. 어머니가 의사선생님과 상담해야했기 때문에 내가 호출됐다. (중략) 문이 열리고 거기에 긴 녹색 꽃이 그려진 가운을 입고있던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창백했다. 아버지가 나를 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오, 신이시여’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사라졌다.”(슈만의 큰딸 마리의 회고)

스승의 부인 클라라를 사랑하는 브람스

슈만이 나룻배에 의해 구조되고 스스로 정신병원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브람스는 뒤셀도르프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클라라의 절망은 헤아림을 넘어섰다. 브람스는 넋이 나간 클라라를 대신해 아이들을 보살폈다. 병원은 슈만 면회를 금지했다. 그의 병은 생각보다 훨씬 깊었으며,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그의 우울감이나 발작을 자극할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 때문이었다.

가까이에서 클라라를 위로하고 그의 가정을 보살피던 브람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클라라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며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한번 달아오른 마음은 식지 않았다. 스승의 부인을 바라보는 죄책감과 뜨거운 마음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21세 브람스와 35세 클라라는 서로 다른 이유로 슬픔과 절망에 빠져버렸다.

‘클라라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남편이 곧 나아질 거라는 확실한 희망이 없다면 더는 살고 싶지 않아요. 로버트 없이 살 수 없어요. 최악인 건 로버트와 함께 지낼 수 없고 그가 여태 내 안부를 묻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그녀는 간신히 말을 이었고 그 말은 복받쳐 나오는 울음에 묻혔다.’(헤드비히 살로몬의 기록)

“내 사랑하는 클라라! 매일 나는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에게 수천 번 입맞춤을 보냅니다. 오늘 아침에도 당신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으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연주할 수 없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사용해 당신을 불러보고 싶습니다.”(브람스가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 다음 회에 계속.

[참고서적] 브람스 평전(이성일, 풍월당), 클라라 슈만 평전(낸시 B 라이히 지음, 강자연ㆍ하인혜 옮김, 경북대학교 출판부), 슈만과 클라라(베톨트 리츠만 지음, 임선희 옮김, 우석)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