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서해 남북교류 활성화 방안 6. 샤먼과 진먼을 통해 보는 남북 경협의 미래

중국 샤먼과 타이완 진먼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 푸젠성 샤먼시 앞에는 중화민국(이하 타이완) 정부가 관할하는 진먼도(金門島)가 있다. 샤먼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4km 안팎에 불과하다.

또, 샤먼과 푸조우 사이엔 타이완 정부가 관할하는 진먼현 우추향이 있고, 푸조우 위엔 타이완 정부가 관할하는 마쭈열도(렌장현)가 있다. 내전을 치른 중국과 타이완의 관계 개선으로 진먼도와 마쭈열도는 현재 중국과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다.

그중 양안 경제협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곳이 샤먼과 진먼이다. 내전에서 패한 중화민국이 1949년 타이완으로 건너오기 전에 진먼은 중국 본토와 같은 생활권이고 공동체였다.

진먼 사람들은 샤먼에서 일하고 샤먼대학에서 공부도 했는데 이산가족이 됐다. 중국 성립 후 푸젠성 연안에 인접한 진먼도와 마쭈열도 등의 타이완 섬들은 군사화ㆍ요새화됐다.

그리고 진먼과 마쭈에선 1949년 이후에도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됐다. 두 지역은 1992년까지 계엄지구로 지정됐다. 가장 치열한 전투는 1958년 8월 23일 발발했다. 중국은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포탄 47만 5000발을 진먼에 퍼부었고, 타이완은 샤먼에 7만 5000발을 쐈다.
타이완에선 이를 ‘8.23 전쟁’이라고 부르며, 진먼에 8.23 전쟁기념관이 있다.

당시 진먼에선 80명이 죽고 136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가옥 2649채가 완파되고 2347채가 반파됐다. 진먼도 옆 ‘리틀 진먼’은 쑥대밭이 됐다. 중국과 타이완의 포격은 1978년까지 20년간 계속되다가 중국과 미국이 수교한 1979년 1월 1일 공식 종료됐다.

8.23 전쟁기념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타이완과 한국의 관계다. 1992년 한중수교 전까지 타이완은 한국의 우방국이었다. 냉전 시기 타이완 정부는 한국에서 중국 동북 3성과 화북지역으로 선전용 삐라를 식료품과 통조림 등과 함께 날려 보냈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엔 그랬다.

1958년 이후 중국은 진먼도와 리틀 진먼의 내륙이 아닌 주변 바다에, 타이완 군대는 샤먼 내륙이 아닌 바다에 포탄을 쐈다. 중국의 마오쩌둥과 타이완의 장제스는 ‘하나의 중국’에 일치된 마음이었고, 1977년 중미 수교 전까지 홀숫날은 쏘고 짝숫날은 쉬는 포탄유희를 즐겼다.

중미 수교 이후 포격전은 멈췄다. 중국은 샤먼을 1세대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개혁개방을 추진했다. 장제스를 계승한 장징궈 타이완 총통은 1987년 타이완인의 중국 친척 방문을 허용하는 탐친법(探親法)을 제정, 3불(불접촉ㆍ불담판ㆍ불간섭) 정책을 철회했다.

중국과 타이완은 1992년 양안관계 헌장인 ‘92 공통인식’을 마련했다. ‘92 공통인식’은 ‘일중각표’(一中各表)로, 하나의 중국(일중)을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달리 표현한다(각표)는 뜻이다.

타이완은 1992년 11월 진먼과 마쭈열도의 계엄령을 해제했다. 중국과 타이완의 삼통정책(우편ㆍ통신ㆍ무역 상호왕래)의 영향으로 현재 중국 관광객이 진먼현 경제에 도움을 주고 있고, 샤먼 경제특구에는 타이완 기업이 진출해 중국의 고용을 창출하고 있다.

진먼과 샤먼 간 30분마다 여객선 운항
 

진먼 짜이산 군사 갱도 중 배가 출입한 갱도.

타이완에서도 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국민당 외에 다른 야당도 합법화됐다. 1996년 타이완은 총통을 민선으로 선출하기 시작했다. 민진당 천수이볜이 2000~2008년 10ㆍ11대 총통에 당선됐다. 중국과 타이완은 2004년에 샤먼과 진먼을 오가는 정기항로를 개항했다.

2008년 선거에선 다시 국민당 마잉주가 총통(2008~2016년)에 당선됐다. 2015년 11월 시진핑 주석과 마잉주 총통이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1949년 분단 이후 66년 만의 일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1980년대 후반부터 싹튼 경제협력 관계가 정치협상으로 진화했다.

2008년 이후 중국과 타이완은 민간차원의 경제협력을 본격화하면서 ‘차이완(차이나와 타이완)’시대를 구가했다.

2010년 양안경제협력기본협정 체결 후 연간 관광객 800만명이 양안을 오가고, 쌍방무역액은 2014년 기준 1983억 달러로 성장했다. 타이완 타오위안공항은 중국 내륙 40여 곳에 운항 중이며, 항공편은 매주 840여편에 달한다.

2015년 기준 타이완인 200만여명이 중국에 상주했고, 중국인과 타이완인 30만쌍이 결혼했다. 타이완 기업 8만여 개가 중국에 진출했고, 중국에 투자한 타이완 자본은 98억 3000만 달러, 중국의 타이완 투자는 3억 3000만 달러에 달했다.

2012년에 양안은 푸젠성 핑탄현(平潭縣)과 타이완 타이중 간 정기 쾌속선을 개통했다. 2013년 취항식 땐 시진핑 주석이 참석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또, 푸젠성 샤먼과 타이완 진먼은 여객선이 30분마다 정기적으로 운항하고, 진먼에서 푸젠성 취안저우는 하루 5편의 정기선이 운항 중이다.

진먼은 샤먼에서 육안으로 보일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남한 백령도에서 북한 장산곶까지(약 17km)보다, 남한 연평도에서 북한 강령군까지(약 11km)보다도 가깝다.

샤먼국제여객터미널에서 진먼국제여객터미널까지 직선거리는 10km 남짓인데, 뱃길은 약 15km다. 해운회사 7개가 300~500톤급 쾌속선 15척을 투입해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항하고 있다. 뱃삯은 약 160위안(한화 약 2만 7000원)이다.

샤먼에서 진먼으로 갈 때, 또 진먼에서 샤먼으로 올 때 CIQ(Customs 세관, Immigration 출입국, Quarantine 검역) 검사를 받아야한다. 운송수단이 비행기 대신 선박이라는 것일 뿐 모두 동일하다.

지난 2016년 1월 타이완 선거에서 ‘92 공통인식’에 대해 ‘유일한 것이 아니라, 선택권이 있는 것’이라는 입장을 내세운 민진당의 차이잉원이 총통에 당선됐음에도 불구하고 양안 사이 물자와 사람이 오가는 데는 변함이 없다. 지난해 샤먼에서 진먼을 다녀간 관광객은 150만명이다.

55만발 포탄은 부엌칼로, 진먼 고량주는 정상회담 만찬주로

중국이 1958년 포격전 때 진먼에 퍼부었던 포탄 47만발의 탄신은 이젠 진먼을 대표하는 특산품으로 태어났다. 진먼 사람들은 이 포탄을 재활용해 부엌칼을 만들고 있는데, 중국 관광객에게 인기 상품이다.

진먼의 또 다른 특산품은 2015년 11월 중국 주석 시진핑과 타이완 총통 마잉주가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을 할 때 마신 진먼 고량주다. 시진핑 주석과 마잉주 총통은 사상 첫 양안 정상회담을 하면서 샤먼과 진먼으로 상징하는 양안관계를 반영이라도 하듯 진먼 고량주를 나눠마셨다.

진먼 고량주는 진먼의 특산품이다. 진먼에서도 잘 팔리지만, 샤먼으로 수출돼 각지로 팔린다. 진먼 고량주는 1958년 포격전 당시 진먼의 사령관이었던 후롄(胡璉, 호련) 장군과 관련이 깊다.

진먼은 타이완 정부가 대형 자주포는 물론 배까지 드나들 수 있는 땅굴을 팔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화강암 섬이다. 군사 요새로 최적이지만 농사에는 척박한 땅이다. 후롄 장군은 척박한 땅이지만 수수를 경작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수수와 쌀을 같은 가격에 교환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군대가 많은 수수를 재배하면서 수수를 원료로 한 고량주가 탄생했다. 생산량의 약 3분의 1이 중국에서 소비되고 있는데, 진먼 고량주의 주세는 면세점과 함께 진먼현 재정 수익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진먼과 중국 본토를 연결하는 교통수단은 샤먼과 푸저우를 오가는 정기선이다. 진먼공항은 아직 중국 대륙과 연결되지 않았고, 타이완 국내선 6개만 운항하고 있다. 취항지 6곳은 타이베이, 타이중, 타이난, 가오슝, 자이, 펑후이다.

중국 여성들이 ‘중국 공격한 군사시설’ 해설사
 

진먼 해변가에 세워진 대중국 심리전 선전용 대형 스피커.

1977년 중미 수교로 냉전이 무너졌고, 1992년 양안의 ‘92 공통인식’ 합의와 함께 타이완 정부는 진먼과 마쭈열도의 계엄을 해제했다. 냉전이 사라지면서 무기가 사라졌고 군대가 철수했다. 진먼에 군대가 주둔을 시작할 때 부대시설을 지을 여유가 없었다. 마을은 대부분 집성촌으로 민가와 부대가 함께 주둔했다. 민가의 방 4개 중 한 개는 부대가 사용하는 식으로, 군민이 함께 생활했다.

진먼 경제는 군대 의존률이 높았다. 민간은 군인을 상대로 음식점, 세탁소, 이발소, 목욕탕, 당구장, 극장 등 생활 편의를 제공하는 것으로 돈을 벌었다. 그 뒤 군대가 축소되면서 위기가 도래했고, 현재는 관광산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진먼에는 수많은 민방용 갱도와 땅굴이 있는데 민간방위대가 팠다. 국가가 민방대로 하여금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굴착하라고 해서 팠다. 주로 1977년에 조성됐다. 중미 수교를 앞두고 사실상 교전이 멈춘 상태라 활용도가 없는데도 군대에 민간을 동원하기 위해 파라고 했다.

이제 갱도는 관광지로 변했다. 땅굴을 활용해 갱도 음악축제와 연주회를 하고 있으며, 마쭈의 경우 배를 타고 갱도를 순회하는 상품도 있다. 15만명 인구의 진먼에만 관광 가이드로 일하는 이들이 200여명이다.

흥미로운 것은 자유 왕래로 진먼 남성과 결혼한 중국 여성이 많다는 점이다. 진먼도의 경우 초등학교 학부모 조사 결과, 어머니의 약 20%가 중국 대륙에서 이주해온 여성으로 조사됐다. 진먼 남성 5명 중 1명이 중국 여자와 결혼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젠 이 중국 여성들이 중국을 겨냥했던 포진지 등에서 해설사를 하고 있다. 이들의 출신 지역도 다양하다. 안보 관광지로 변한 진먼 사자산 갱도와 포진지에서 일하는 중국 여성들의 경우 푸젠성 샤먼과 취안저우부터 멀리 스촨성 청두 출신까지 다양하다.

냉전, 진먼 생태환경과 생물다양성 보존

타이완은 1993부터 진먼 해변의 지뢰를 제거하기 시작해 2015년 완전히 제거했다. 철책과 지뢰로 둘러싸였던 바닷가는 이제 관광자원이 됐다. 공교롭게도 냉전으로 인해 진먼의 생태환경은 잘 보존됐고, 생물다양성 또한 풍부하다.

그리고 해안가에 세워져 심리전에 사용된 초대형 스피커에선 여전히 등려군(덩리쥔)의 노래가 흘러나오지만, 전과 달리 양안 모두에게 정겹게 들린다. 냉전 당시 진먼 사람들은 낮엔 샤먼으로부터 등소평 담화문을 듣고 밤엔 진먼에서 샤먼으로 보내는 등려군 노래를 들으며 지냈는데, 이 또한 관광 상품이 됐다.

진먼은 섬 전체가 군사요새다. 중국을 마주한 쪽 해안가에는 포진지와 함께 갱도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고, 타이완 해협을 향한 해안가 바위산 아래에는 보급을 위한 갱도가 들어섰다. 냉전 당시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바다에서 배가 땅굴로 바로 보급부대로 들어갈 수 있게 했다. 땅굴 안 부두에 접안해 물자를 하역하면, 육지 갱도를 따라 물자를 보급하는 방식이다. 이젠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진먼의 화두는 남겨진 군사시설을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이다. 냉전 때 조성한 진먼의 땅굴 여관, 땅굴 영빈관, 지하 병원, 지하 학교, 지하 발전소, 산업시설, 상업시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움직임이 있지만, 애석하게도 타이완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라 신청 자격이 없다.

진먼 관광산업의 경우 포탄을 부엌칼로 만들고, 진먼 고량주를 특화한 것, 면세점을 활용해 지방 세수를 증대한 것은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이다. 아울러 지하갱도 등 군사시설을 관광 자원화한 것도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고의 관광자원은 중국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해양레포츠가 발달하지 못해 전쟁에만 너무 초점을 맞춘 것은 아쉽다.

민간인 자유로운 왕래, 이젠 정부가 막지 못해

현 민진당 타이완 정부와 타이완 지식인 사회는 ‘하나의 중국’에 부정적이다. 이들은 중국과 타이완이 통일될 경우 민주주의와 자유를 잃게 되는 것이라며 우려를 표한다. 타이완 학계와 정계는 ‘하나의 중국’에 부정적이지만, 양안 민간인은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기에 ‘그러거나 말거나’이다. 그리고 타이완 정부도 이젠 민간 교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타이완의 많은 기업이 푸젠성에 투자했고, 샤먼에서만 1년에 관광객 150만명 이상이 진먼을 방문하고 있다. 1만명 넘는 진먼 사람들이 샤먼에 아파트를 구입했으며, 진먼 주민의 약 20%에 이르는 3만여명이 샤먼에 부동산을 구입했다.

현 타이완 정부가 ‘하나의 중국’보단 ‘타이완 독립’에 적극적이라 정치적 측면에서 양안 간 갈등이 있지만, 양안은 경제 분야에서 민간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융통성을 발휘하고 있다. 사실 민간은 양안의 정치적 관계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남북관계에 견주면 부러울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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