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아픈 역사의 현장, 부평토굴(2)

부평토굴의 생성 유래

▲ <사진1> 부평토굴, 일본육군조병창, 미쓰비시제강 인천제작소가 나온 1947년 항공사진.
일제강점기인 1938년,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해 조선의 병참기지화를 선언했다. 조선은 거대한 군수기지로 변해갔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부터 부평에 조병창을 건설하기 시작하며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했다. 그 결과, ‘옛 부평’의 중심지인 읍치(계산삼거리 인근)가 아닌 ‘신 부평’인 대정리(지금의 부평역 일대) 부근에 일본육군조병창(이하 조병창)이 생겼다.

조병창은 배후에 넓은 평야가 위치해있어 확장성이 좋았고, 경인선 부평역을 통해 인천항에서 물건을 운반하기도 쉬웠다. 또한 평야 주변으로 산세가 환상(環狀)구조를 이루고 있어 방공시설을 만들기에 적합했고, 군사방어상 유리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부평토굴은 그러한 부평의 산줄기 안, 조병창 서쪽에 맞붙어 위치해있다. 부평토굴의 생성 유래는 지금까지 조사를 통해 세 가지 정도로 추정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조병창이 생기기 전 군수물자 창고로 팠을 가능성이다. 이는 산곡동 화랑농장에 거주하는 80세가 넘은 노인의 인터뷰로 유추해볼 수 있다. 이 노인은 “경술국치 몇 년 뒤 일본군이 조선인을 데리고 토굴을 파기 시작했다는 말을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조병창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일본은 치밀한 계획 아래 부평토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두 번째는 조병창 건설 이후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지하 공장시설인 경우다. 미군의 폭격과 같은 상황에 대비해 조병창과 주변 군수공장의 시설들을 옮겨놓기 위한 목적으로 부평토굴을 팠을 가능성이다. 인근 주민 중에는 토굴에서 사람들이 모여 조병창과 관련한 일을 한 것을 봤다는 어릴 적 기억을 들려주는 이도 있고, 일부 토굴에서는 ‘자동차 연장’과 ‘총알’ 같은 것도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만약 조병창에서 만들던 물건이었다면 부평토굴과 조병창과의 관계를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 번째는 위의 두 경우가 시간 순으로 이어져 진행됐을 가능성이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이 판 토굴을 조병창이 그대로 사용했고, 이후 유사시 지하 공장시설로 사용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확장했을 수도 있다.

부평토굴과 조병창의 연결고리

이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펴볼 때, 부평토굴과 조병창의 연결고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뜻밖에도 일본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오사카 부 지역에 있는 토굴(이하 오사카토굴)들이다. 놀라운 사실은 오사카토굴의 모양과 크기, 구조가 부평토굴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오사카 지역에 넓게 분포돼있는 이 토굴들은 일본 오사카 육군조병창(이하 오사카조병창)의 지하화로 생겨났다. 오사카조병창은 옛 일본 육군의 주요 군사시설이었으며 당시 아시아 최대의 병기 공장이었다.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 기간에 미군의 본격적인 일본 본토 공습에 대비해 지하시설 건설과 항공기 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요 군수공장 소개를 추진한다. 이때 오사카조병창의 주요 공장 시설들이 평지와 떨어진 산속 토굴로 옮겨졌다. 일본은 1938년부터 시행된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오사카 지역으로 강제 동원한 조선인들을 오사카조병창 건설에 투입하거나 지하 군수공장용 토굴을 만들게 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위험한 작업에 노출돼 희생을 당했다. 최근 한 조사 내용을 보면, 오사카 지역에 동원된 조선인은 2만명 정도라고 한다. 부평토굴 또한 일제강점기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부평에 위치한 조병창과 부평토굴, 일본 오사카조병창과 토굴들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넓은 평야지역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산, 그리고 항구로 이어지는 철도까지. 특히 토굴의 형태, 즉 굴착 모양이나 토굴이 파여진 길, 내부 굴착 흔적 등, 두 곳의 토굴은 매우 닮았다.

부평과 오사카의 토굴 모양

▲ <그림1> 부평토굴 B구역(왼쪽)과 오사카 아이노분 공장 토굴(오른쪽).
1947년에 촬영한 항공사진에는 부평토굴(B구역) 4곳이 보인다. 희미하긴 하지만 토굴과 연결돼있는 도로의 모습에서 부평토굴 C구역처럼 그 규모가 제법 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림1>을 보면 토굴들을 나란히 판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오사카토굴 중 아이노분공장(相野分工場)과 매우 흡사하다. 부평토굴 B구역은 매립돼 현재는 직접 확인할 수 없다. 오사카토굴 아이노분공장은 토굴을 양쪽에서 뚫다가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공사가 중지된 것으로 보이며, 지금까지 그대로 방치돼있다.

만약 부평토굴 B구역 4곳(B1~B4)과 C구역 4곳(C4~C7)을 계속 파고 들어갔다면 서로 연결되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2013년 문화재청이 실시한 ‘태평양전쟁 유적(부산ㆍ경남ㆍ전남지역) 일제 조사 연구용역’ 보고서를 보면, 경남 진해 장천동 토굴의 경우 태봉산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양쪽에 굴을 파서 연결한 후 화약이나 보급품 보관창고로 사용했다고 한다.

부평토굴 C구역에서는 가지 굴이 원래의 토굴 길옆으로 10여m가량 뻗어있다. 오사카토굴의 히라카타 제조소 지하공장(枚方製造所 地下疎開工場)에는 토굴 여러 개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가지 굴을 판 모습이 나타나는데, 각기 다른 토굴을 연결하거나 땅 속에 넓은 공간을 파기 위한 선행 작업으로 보인다. 만약 부평토굴 C구역이 지금보다 더 확장된 상태로 남았다면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예상해본다.

부평과 오사카 토굴의 내부 모습

▲ <사진2> 부평토굴 내부(왼쪽)와 오사카 아이노분 공장 토굴 내부(오른쪽)

▲ <사진3> 부평토굴 말뚝(왼쪽)과 오사카 아이노분 공장 토굴 말뚝(오른쪽)
<사진2>처럼 토굴마다 깊이와 폭이 다르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두 지역이 거의 동일하다. 부평토굴과 오사카토굴 모두 네모난 모습으로 굴을 팠으며 <사진3>에서처럼 천장 쪽에 박힌 말뚝(쐐기)이 있다. 부평토굴에 남아있는 것은 나무로 돼있으며 내부 습도와 오랜 세월로 인해 다소 물컹한 느낌으로 변해있다. 간격도 일정하지 않아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추가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토굴 벽면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있는데 폭약을 넣기 위한 착암기의 흔적이다. 토굴을 파기 위해서는 정이나 착암기로 기다란 구멍을 만들고 그 안에 폭약을 넣어 폭파시킨다. 그렇게 암석을 깨면서 파고 들어간다. 부평토굴을 관찰하다보면 입구에서부터 안 쪽 깊은 곳까지 심심치 않게 이런 착암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부러진 착암기의 쇠말뚝이 꽂혀 있는 경우도 있다.

오사카조병창은 히라카타 제조소 선반시설 대피 예정 토굴, 육군항공공장 구곡 토굴과 타마테산 토굴, 아이노분공장 토굴, 케이프타운 가와사키 중공업공장 토굴, 이타미 육군비행장 토굴 등을 만들었다. 오사카토굴과 부평토굴은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 부평토굴 역시 주변에 조병창과 미쓰비시 제강이 있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우리나라 여러 곳에 존재하는 토굴과는 달리 오사카의 토굴들처럼 방공용 지하공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규혁 부평문화원 기획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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