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아픈 역사의 현장, 부평토굴(1)

<필자 주> 네거티브 헤리티지(Negative Heritage)는 부정적 문화유산을 뜻한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중국 뤼순감옥, 폴란드 아우슈비츠수용소처럼 역사적으로 시대의 아픔이 담긴 건물이나 장소 등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주로 일제강점기의 것이 많다.

인천시 부평구에도 네거티브 헤리티지가 여럿 있다. 일본육군조병창(이하 조병창)ㆍ삼능사택ㆍ영단주택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또 하나, 부평토굴이 있다. 그동안 새우젓을 숙성시키는 토굴로 언론에 소개된 적은 있어도 토굴 자체가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부평토박이나 인근 주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부평사람은 토굴의 존재 자체도 모른다.

현재 확인된 부평토굴은 모두 24곳이다. 산곡3동 함봉산 자락, 화랑농장 일대, 인근 군부대 등에 흩어져 있다. 부평문화원은 지난해 3월부터 11월까지 어르신문화콘텐츠사업(주최 한국문화원연합회, 후원 문화체육관광부)의 일환으로 이 토굴들을 조사했다.

조사하면서 토굴 위치와 속성에 따라 크게 A에서 D까지 구역 4개로 나눴다. A구역은 산곡동 화랑농장 마을에 위치한 곳으로 모두 7곳이다. B구역은 과거 위성사진으로 확인 가능하지만 지금은 매립된 4곳이며, C구역은 새우젓 숙성 토굴로 알려진 함봉산 자락의 7곳, D구역은 인근 군부대 안에 있는 6곳이다.

지역 어르신들은 이전에는 더 많은 토굴이 있었다고 했지만, 현재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부평토굴에 대한 글을 네 차례에 걸쳐 싣고자 한다.

접근 쉽고 규모 큰 새우젓 토굴

▲ 부평토굴 내부 모습.
새우젓 토굴이었던 C구역의 토굴들은 다른 곳보다 접근이 쉽고 규모가 크다. 그동안 조배홍씨가 운영해왔다. 지난해 조사할 때까지만 해도 토굴마다 숙성 중인 새우젓이 가득 차 있었지만, 지금은 내부 문제로 운영을 중단했다.

C구역의 부평토굴은 숫자와 크기 면에서도 타 지역 토굴보다 우위에 있다. 새우젓 드럼통이 한 곳에 1000여개 이상 들어갈 정도로 규모가 크다. C구역 토굴 전체 보관량을 따지면 어림잡아 드럼통 7000여개는 거뜬하게 넣을 수 있다. 여기에 접근하려면 우선 화랑농장을 찾아가야 한다. 인평자동차정보고등학교 뒤쪽에 조그마한 산길이 있고, ‘비타민길’이기도 한 이곳 언덕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산을 깎아 만든 절벽 아래에 토굴 입구가 군데군데 나타난다.

겉에서 볼 때는 허름한 철문에 입구도 좁아 마치 방치된 굴처럼 보이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뜻밖의 공간과 마주친다. 짧은 것은 40여 미터, 긴 것은 150여 미터에 달하는 암벽동굴이 산기슭의 속살을 뚫고 길게 이어져 있다. 토굴들의 폭은 거의 일정하게 4.5~6미터로 성인 두세 명이 나란히 걸어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다. 높이 또한 2~3미터로 균일하다. 같은 목적 아래 계획적으로 판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토굴 내부를 걷다 보면 굴을 파기 위한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무로 된 말뚝도 곳곳에 박혀 있고, 자연적으로 자란 종유관과 종유석까지 확인할 수 있다. 천장에서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암반수로 인해 바닥에는 항상 물이 고여 있어 습도가 높다. 대신 일 년 내내 항상 같은 온도를 유지하기에 새우젓을 숙성시키는 데는 최적의 환경이다.

오랜 기간 새우젓 숙성 토굴로 사용되다 보니 자연스레 새우젓 관련 상인들과 이곳을 이용해온 소래포구ㆍ연안부두 관계자 일부만이 아는 숨은 장소가 됐다. 다른 곳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조병창 군수공장과 연계성 계속 확인 필요

▲ 부평토굴 위치 안내도.
군부대 안에 있는 토굴은 군사보안지역이라 접근조차 어렵고, 이미 주택들이 들어선 마을 뒤편 토굴들은 찾아보기도 힘들다. 단지 화랑농장 마을 주민들에게 일제강점기의 흔적으로 알려져 있는 정도다.

부평토굴을 만든 이유와 생성년도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조병창과 군수공장 등과의 연계성을 계속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어릴 적 십정동에 거주했던 한 어르신은 토굴 앞에서 사람들이 반별로 나뉘어 조병창에서 진행하는 일련의 작업을 했고, 거기에 물건을 보관했다고 들려줬다.

또한, 인근 지역 주민들과 한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토굴이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들에 의해 파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땅파기에 참여한 사례를 찾는 건 어렵다. 토굴 이야기가 마을에 계속 전해 내려와 전설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부평에 토굴이 24곳 이상 파인 이유는 대체로 방공호ㆍ무기창고 혹은 유사시 조병창을 대신하는 지하공장으로 쓰이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련 문서나 사진이 남아있지 않아 어르신들의 구술에 의존해 추정만 할 수 있다.

세월 따라 변한 토굴의 모습들

▲ 미군기지였던 애스컴에서 찍힌 부평토굴 모습.
일제의 패망과 함께 존재가치가 없어진 부평의 여러 토굴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모습 또한 변했다. 건물이 생기면서 자연스레 없어졌고, 인명사고가 생겨 마을 주민들이 폐쇄하기도 했다. 또한 개인 사유지 안으로 들어가면서 냉장고나 창고, 버섯재배 공간으로 쓰이기도 하고, 새우젓 숙성 공간으로 사용돼왔다. 일부 주민에게는 여름철 시원한 피서지 역할도 했다. 부평토굴은 부정적 문화유산인 동시에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으로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항공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조성한 방공호는 전국적으로 산재돼있다. 가깝게는 인천 중구 신흥초교와 항동 파라다이스호텔 인근 동굴을 비롯해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인공동굴, 대구시 동구에서 발견된 인공동굴, 광주시 양림동의 방공호, 전남 목포문화원 뒤편의 방공호, 부산시 연제구 황령산 자락의 물만골 벙커, 제주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지하벙커 등이 있다.

최근 광명시에 있는 시흥광산(가학광산의 옛 이름)이 동굴테마파크인 광명동굴로 개발돼 성공 사례로 이름을 알렸다. 이를 계기로 네거티브 헤리티지인 일제강점기 구조물 등을 다른 지방자치단체 등에서도 개발을 염두에 두고 조사와 검토를 진행하는 추세다. 방치돼 없어지거나 잊히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토굴과 동굴, 방공호라 불리는 이러한 일제강점기의 유산을 지자체별로 따로 손을 대는 것보다는 전국 단위로 통합ㆍ연계해 체계적인 조사를 선행해야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 미래는 없다’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처럼, 부평토굴이 살아있는 역사문화교육의 현장으로서 교훈을 주는 공간으로 남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규혁 부평문화원 기획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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