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웅변대회를 했다. 다른 것은 모두 잊었지만, 유독 우리 반 대표로 나간 친구의 웅변 내용은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난다.

내용인 즉,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거미 같은 사람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다. 둘째는 개미처럼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딱히 도움이 되지도 않는 사람이다. 셋째는 꿀벌 같은 사람이다. 부지런히 꿀을 모아 남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니 우리는 꿀벌 같은 사람이 돼야한다는, 교훈적인 내용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에 상당히 감동을 받았다. 물론 지금에 와서 보면 인간 중심의 시각으로 세 동물의 삶을 바라본 것이 참 이기적이고 편협하기 짝이 없지만, 어린 내 입장에선 몹시 놀라운 비유였다. 그래서인지 꽤 오랫동안 거미는 음흉하고, 개미는 멍청하게 일만 하고, 꿀벌은 안쓰러울 정도로 인간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소중한 존재하고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꿀벌은 정말 부지런할까? 답은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이다. 꿀벌도 사람처럼 저마다 개성이 있다. 어떤 꿀벌은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어떤 꿀벌은 한없이 게으르다. 또 온순한 꿀벌이 있는 반면, 사납고 공격적인 꿀벌도 있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보는 꿀벌은 꿀과 꽃가루를 찾아나서는 ‘수집벌’이다. 꿀벌의 수명은 4주에서 12개월까지 그 폭이 큰 편인데, 따뜻한 시기에 유충으로 태어난 벌의 수명이 길다고 알려져 있다. 이 짧은 일생 중 꿀과 꽃가루를 수집하는 기간은 10~20일 정도다. 꿀벌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다. 이 기간에 어떤 벌은 꿀과 꽃가루를 가져오는 고된 비행을 하루 열 차례 넘게 하기도 하지만 어떤 벌은 고작 한 번 내지 세 번에 그치기도 한다. 수집벌로서 겨우 면피만 하는 셈이다.

바깥에서 활동하는 꿀벌의 5~20퍼센트는 ‘정찰벌’이다. 이들은 새로운 꽃무리를 찾아내 벌집의 동료에게 알리는 일을 한다. 벌집엔 방을 청소하고, 유충을 돌보고, 여왕벌의 몸을 닦아주고, 수집벌로부터 꽃꿀을 넘겨받아 꿀을 만들고, 꽃가루를 다져넣고, 오염물을 치우고, 경비를 서고, 벌집의 온도를 조절하고, 벌집을 짓거나 보수하는 꿀벌들이 있다. 그리고 많은 수의 빈둥거리는 ‘예비역’ 꿀벌도 있다.

만일, 어떤 정찰벌이 새로운 꽃밭을 이제 막 발견했다면, 꿀과 꽃가루를 딱정벌레나 다른 군락의 벌에게 빼앗기기 전에 자신의 집단에 먼저 알려야한다. 이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수집벌 스스로 더욱더 노력해 많은 양의 먹이를 실어 나르는 방법이다. 하지만 지치기 쉽고 한계가 있다. 두 번째로, 하고 있던 일을 접고 수집벌과 함께 꿀을 따러 나가는 것이다. 이 경우 수행하던 일을 그만둔다는 점 때문에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 꿀벌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방법은 바로 ‘쉬고 있던 예비역’ 꿀벌을 수집벌로 차출하는 것이다.

빈둥거리던 꿀벌은 비상시 꼭 필요한 일을 해낸다. 수집벌로 나서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군락의 꿀벌이 침입해왔을 땐 전사가 돼 싸운다.

만일 비상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냥 예비역으로서 생을 마감한다. 이들을 내쫓거나 괄시하는 꿀벌은 없다. 굶어죽도록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명령이나 위계적인 체계에 의한 것이 아니다. 부지런히 일을 나서는 벌도, 빈둥거리는 벌도, 각각의 벌은 자신을 위해서만 결정을 내린다.(‘경이로운 꿀벌의 세계’ 319쪽)

이토록 다양한 캐릭터의 벌에게 ‘부지런한 일꾼’이라는 이미지를 씌운 것은 누구일까. 어쩌면 우리 인간에게도 일, 노동이라는 굴레가 씌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정말 노동하는, 노동해야하는 동물일까? 거리에서 노래하는 예술가는 노동자일까 아닐까? 열심히 일해도 나이 들고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은 과연 꿀벌보다 나은 존재인가. 다시 한 번, 다음 생엔 꿀벌로 태어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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