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홍선웅 판화가(하)

광주민중항쟁이 민중판화의 길로 이끌어

1979년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홍선웅 화백은 1980년대 초반 민중판화의 대표적 작가인 오윤ㆍ홍성담ㆍ이철수 등과 판화작업을 함께 했다.

“그 당시는 내가 해야 할 미술이 뚜렷했어요. 광주민주화운동이 있고 나서 내 화실이 서울대 근처인 낙성대에 있었는데 광주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광주 이야기를 전해줬죠. 화실에 모인 사람들끼리 토론을 많이 했는데 그게 제 의식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후 서양화를 전공한 홍 화백은 민중미술에 입문했다. 특히 강렬한 이미지를 주는 판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판화로 우리 얘기를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1984년부터 본격적으로 민중판화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판화 전공이 없어 독학으로 배웠다. 민중판화 1세대인 것이다.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이루는 게 숙원이었죠. 장기적으로 민족통일을 이뤄야겠다는 게 미술인들의 소망이었어요. 그것이 1980년대 주요 작품내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부 사람들로 치부되던 노동자ㆍ여성ㆍ농민ㆍ교육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민족적 형식에 담아야한다는 고민도 했다. 서구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 민중적 내용을, 민족적 형식으로 승화하고자 했다.

민족미술인협회 초대 총무와 이사를 역임하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변인까지 한 홍 화백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1995년부터 모든 조직 활동을 접고 작품 활동에 집중했다. 그 때 나온 작품들이 불교의 세계관이 근간이 된 작품들과 자연과 호흡하는 내용의 것들이다.

인천에 터 잡고, 김포에 뿌리 내리다

▲ 작업 중인 홍선웅 판화가.
전라남도 진도에서 태어난 홍 화백은 여섯 살에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와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살았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그는 1987년 결혼 후 1989년 인천으로 이사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실천문학사에서 출판한 ‘민중교육’이라는 잡지가 있었어요. 미술에 대한 글을 쓰고 좌담에도 참여한 적이 있었죠.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이 터졌어요. 그 잡지에 글을 쓰거나 조금이라도 관계한 사람들을 모두 해고시켰어요. 당시 서울의 한 여고에서 교사로 있었는데 교사 30명이 해고됐습니다”

그게 계기가 돼 ‘민주교사협의회’를 만들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를 결성했다.

“그전에는 국민들이 ‘교육운동’이라는 개념을 몰랐는데 그 당시 우리가 매일 저녁 9시 뉴스에 등장해 홍보가 많이 됐죠(웃음). 해고되고 전국으로 토론회를 다니다가 전북에서 교사를 하던 아내를 만났습니다”

부부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홍 화백을 따라 서울 정착을 모색하다 인천에 터를 잡았다. 처음엔 남구 용현동에 살았는데, 지금은 연수구 청학동에 산다. 김포의 작업실은 1995년에 생겼다.

“원래 마을회관이었다가 도서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곳이죠. 작업실로는 좁지만 여기에 와서 책을 두 권 쓰고 태백산맥 표지판화 작업도 하고, 인연이 많습니다”

홍 화백은 인천에서 월요일 오전에 이곳으로 와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인천으로 다시 돌아간다. 부인이 아이들을 다 키우고 생활을 책임지며 자신의 뒷바라지를 잘해 본인은 그림과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했다.

홍 화백과 이야기를 나누다 차를 마시느라 대화가 끊기기도 했다. 주변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흡사 산속에 있는 암자 같았다. 그는 이곳이 고요하게 차를 마시며 마음의 수양을 하기에도 제격이라고 했다.
주택 70호가 있는 이 동네의 주민들은 대부분 노인이다. 홍 화백이 이 동네에 발을 딛고 난 후 화가 5명이 더 이곳에 들어왔다. 매달 정기적으로 서로 교류한다.

인천 개최 ‘인천평화미술프로젝트’ 의미 있어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2011년부터 ‘인천평화미술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남북 간 긴장이 계속되는 백령도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예술작업으로 평화 염원을 되새기고, 백령도를 국제적인 ‘평화와 예술의 섬’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는 취지의 행사다.

작년 7월 개막 예정이었던 4회 행사는 6.4 지방선거 직후 여러 가지 문제로 진행하지 못했다. 홍 화백은 2013년 3회 때 참가해 ‘백령도-종이학’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냈다.

“연평도 전투와 천안함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모두 인천 앞바다에서 일어난 일이지요. 그래서 인천에서 평화를 화두로 한 프로젝트가 중요합니다. 우리 세대를 얘기하고 있는 거니까요”

홍 화백은 인천에서 아이 둘을 낳았다. 제2의 고향인 인천은 홍 화백이 보기에 각박한 도시이기도 하지만 근대문화가 풍부한 곳이다. 그는 근대 판화의 시작도 인천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근대 인천항은 다른 나라의 출판인쇄문화가 수입된 곳입니다. <한성순보>도 일본에서 수입한 연활자로 인쇄했죠. 판화사(史)에서도 인천이 갖고 있는 위치가 중요합니다”

홍 화백은 근대 판화가 삽입된, 현재 한두 권밖에 남아있지 않은 고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근대판화박물관을 만들 정도로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지만, 17개 광역시ㆍ도 중에 유일하게 국공립미술관이 없는 인천에 ‘판화박물관’을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라 생각해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고 했다.

상업주의 예술도 필요하지만
예술의 근본정신 잃지 않았으면

홍 화백은 <인천투데이>과 인터뷰하기 전날 서울시립미술관을 다녀왔다. ‘피스 마이너스 원: 무대를 넘어서(PEACE MINUS ONE: Beyond the stage)’라는 제목의 전시회다. 아이돌 그룹인 빅뱅의 리더 지드래곤과 국내외 예술가들이 협업해 현대미술과 대중문화의 수준 높은 접점을 만들겠다는 의도로 기획한 예술계의 빅 이벤트였다.

“가서 보니 기획이 좋았고, 작가들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성실해 좋은 작품도 많았어요. 이번 전시를 두고 비판하고 옹호하는 상반된 말이 많았죠. 상업주의 예술이지만 누가 뭐래도 기획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홍 화백은 팝아트에 근간을 둔 이번 전시도 팝아트의 본래정신을 잘 살렸는지는 곱씹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팝의 시작은 영국입니다.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았죠. 존 덴버나 비틀즈 등의 노래를 들으면 알 수 있어요. 그런데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상업주의로 변질했어요. 영화배우 얼굴이나 깡통 등 주변에 흔한 것들을 그리기 시작했죠. 일상성과 대중성을 조화롭게 결합해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겠다고 하는데, 그것에 너무 경도됐어요. 그 기저에는 미국의 문화정책인 상업주의가 깔려있는데 우리 젊은 화가들이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홍 화백은 한 대학에서 열린 사진전에서 매화나무에 팝콘을 꽂아 찍은 사진을 봤다. 팝콘이라는 일상성을 소재로 했지만 단순하게 매화를 베끼는 게 아닌, 매화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 작품에 살려야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팝아트나 힙합이나 그 예술장르가 갖고 있는 본질이 있습니다. 그걸 잃지 않고 표면적인 것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표현하려하고 거기에 우리 것으로 재창조하는 노력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소 구태의연하고 고답적인 얘기 같기도 했지만, 인터뷰를 마치고 김포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홍 화백의 말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