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동유럽 여행(3) 폴란드 아우슈비츠, 크라쿠프

 
1월 17일, 체코 프라하에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를 거쳐 크라쿠프까지 가는 날이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식 명칭이고, 폴란드 사람들은 ‘오슈비엥침’으로 부른다. 아우슈비츠를 방문하는 날이라는 걸 날씨도 아는지 폴란드 가는 내내 빗방울이 뿌리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버스 안에서 스티븐스필버그의 흑백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다시 봤다. ‘쉰들러리스트’를 언제 처음 봤더라? 1994년 교사로 복직한 후 아이들을 데리고 단체 영화 관람을 했던 것 같다.

유태인의 그릇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치 당원이 된 쉰들러는 나치 요원들에게 여자ㆍ술ㆍ담배 등을 뇌물로 바치며 인건비 한 푼 안 들이고 유태인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데, 나중에 양심을 찾고 유태인을 강제노동수용소로부터 구해내는 영화다. 그 결과 쉰들러는 1100여명을 구했고, 쉰들러가 살린 유태인 후손이 6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폴란드에서 살아남은 유태인이 4000명밖에 안 된다니, 그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거다. 탈무드에 나온다는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잊히지 않는다.

▲ 크라쿠프의 성 마리안 성당.
영화 내용처럼 날씨는 여전히 우울하다. 한국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식당 이름이 ‘김치’다. 일반명사인 김치가 외국에서는 식당 이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한국에서 폴란드어를 전공하고 폴란드로 유학 와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다는 당찬 여성 가이드를 만났다.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한국 여성의 힘이다. 가이드로부터 잠시 폴란드에 관해 공부했다.

‘폴란드’는 ‘평평한 나라’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처럼 평야가 많다. 지금도 다국적 기업들에 싼 값에 땅을 빌려주고 일자리를 만든다. 한때 대우도 이곳에 진출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처럼 위스키나 보드카가 유명하다. 감자 농사가 잘 되는데, 보드카는 질 좋은 감자 100퍼센트로 만든다. 수출도 많이 했는데, 소련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모두 소련 이름으로 수출됐다.

또한 폴란드는 보석 호박(=지질시대 나무의 진 따위가 땅속에 묻혀 탄소ㆍ수소ㆍ산소 따위와 화합해 굳은 누런색 광물)이 유명하다. 폴란드 나무의 90퍼센트가 소나무다. 송진이 많이 나오니 호박이 유명한 건 당연하다. 폴란드는 또한 쇼팽을 비롯한 음악의 나라다. 추운 지방이니 주로 실내 활동을 많이 했고, 따라서 훌륭한 음악가가 나오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폴란드는 국민의 95퍼센트가 가톨릭 신자다. 독일과 폴란드는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죽음의 수용소’의 아우슈비츠

▲ 폴란드 아우슈비츠에 있는 박물관 입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수용소였던 곳을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 나치의 유태인 제1수용소.
이러저런 설명을 들으며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수용소였던 곳을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1947년에 세워진 이 박물관은 197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일하면 자유롭게 된다(ARBEIT MACHT FREI)’라고 써놓은 입구의 팻말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 기만적인 구호에 소극적으로라도 저항하기 위해 이 글씨를 만든 수용자가 일부러 ‘B’자를 거꾸로 새겼다고 한다.

학살당한 유태인들의 칫솔ㆍ옷솔ㆍ안경ㆍ신발, 장애인보장구 더미, 주소를 써 놓은 가죽가방 더미 등이 전시실마다 그득하다. 머리카락을 모아놓은 전시실에서는 숨이 턱 막혔다. 잘라낸 머리카락만 7톤이 넘는다고 한다. 유태인들을 죽일 때 쓴 독가스 깡통을 모아 놓은 곳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나치가 개발한 가스는 한 통으로 무려 400명 이상을 죽일 수 있었다고 한다. 가스실과 시체 소각장을 둘러보니 히틀러와 나치뿐 아니라 인간 종 자체에 대한 회의마저 밀려왔다. 이곳 제1수용소에서만 유태인 약 15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곳으로도 모자라 약 3km 떨어진 비르케나우에 제2수용소를 만들었다. 아우슈비츠의 10배 규모다. 수용소를 왜 하필 폴란드에 만들었을까. 폴란드가 지리적으로 유럽의 한가운데이기 때문에 실어 나르기 편했다.

비슷한 이유로 이미 폴란드에는 유태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제일 먼저 학자ㆍ정치인ㆍ신부 등을 잡아갔다. 그곳에서 죽어간 수많은 이들 중 다른 사람 대신 죽어 간 막스밀리언 콜베 신부의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

▲ 크라쿠프의 광장에 있는 직물회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그의 유명한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 안에서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고 말했는데, ‘이 사람은 처자가 있으나 내게는 처자가 없소. 그러니 내가 대신 죽는 게 낫지 않습니까?’ 하면서 먼저 죽어간 콜베 신부는 당연히 성자로 분류할 수 있는 분이다.

히틀러가 왜 유독 유태인을 미워하고 학살했는지는 여러 학설이 있다. 히틀러 어머니의 정부(情婦)가 유태인이어서, 히틀러를 떨어뜨린 비엔나미술대 교수가 유태인이어서 등, 개인적인 이유에서부터 유태인들이 돈이 많아서, 똑똑해서 미워했다는 설까지 다양한데, 어쨌든 인류 역사상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종 대학살이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으니 인간은 원래 반성을 모르는 악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천년 도시 크라쿠프

▲ 크라쿠프의 광장.
편치 않은 마음으로 아우슈비츠를 나와 폴란드 제2의 도시 크라쿠프로 향했다. 크라쿠프는 1595년 바르샤바로 옮기기 전의 수도였으며, 500여 년간 폴란드 정치ㆍ문화의 중심지였던 도시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경주쯤 될까?

크라쿠프에 도착해 걸어서 야간투어를 했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살았던 방도 지나갔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폴란드 출신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곳 크라쿠프의 주교 출신이라는 건 몰랐다.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도 이곳 출신이다. 걸어보니 프라하와는 또 다른 느낌이 난다.

옛 시가지는 중세의 모습 그대로다. 그래서 크라쿠프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는데, 나치의 주둔지가 이곳에 있어서 2차 세계대전의 포탄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인가? 어쨌든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도시처럼 크라쿠프도 옛 시가 한가운데 커다란 광장이 있는데 유럽에 남아 있는 중세 광장 중 두 번째로 크다. 그러면 제일 큰 광장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산마르코 광장이다.

성 마리안 성당에 들어갔다. 1220년에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이다. 매시간 나팔소리가 들린다. 제단은 폴란드 최고의 예술품이라는데, 사진을 못 찍게 해서 아쉬웠다.

▲ 크라쿠프의 광장에 있는 마차.
마차를 타고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마치 중세의 귀족이 된 기분이다. 따각 따각 말발굽 소리가 크라쿠프광장의 밤의 정적을 가른다. 왕의 대관식이 열렸던 바벨성도 보인다.

마차에서 내려 광장 중앙으로 가니 동상이 서 있다. ‘폴란드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동상이다. 그는 학생 시절 비밀결사 ‘필로마트회’를 조직해 애국적 혁명운동에 참가했는데, 그의 시는 자유와 박애와 진보를 향한 폴란드 청년들의 투쟁가가 됐다. 그런데 무슨 집회를 하는지 동상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시낭송 비슷한 것도 했는데 폴란드어를 모르니 피켓과 현수막에 뭐라고 썼는지 모르겠다. 몹시 궁금하다. 집회가 끝나고 나서는 행진을 했는데 경찰 딱 한 명이 뒤를 따라다녔다.

광장 가운데 큰 건물이 직물회관이다. 1층은 기념품점인데, 자매인 것 같은 아가씨들이 지키고 서있는 기념품점에 들어가 호박 묵주를 하나 샀다. 체코 여자들이 예쁘던데 폴란드 여자들도 만만치 않게 예쁘다. 직물회관 2층은 조각과 회화를 전시하는 국립박물관이라는데 올라가 보지 못했다. 저녁을 먹고 1000년 도시 크라쿠프에서 잠을 청했다.(다음호에 계속)

글ㆍ사진 /신현수 (시인ㆍ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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