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동유럽 여행 2. 체코 체스키크룸로프, 프라하

 
1월 16일, 시차 때문인지 새벽 3시부터 깬 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침 먹고 나서 탄 버스 안에서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작년 서유럽 갔을 때 인솔자에게 들었던 얘기를 했다. ‘여행은 발 떨릴 때 가지 말고 가슴 떨릴 때 가라. 여행은 가능하면 멀리 가라’ 여행 격언도 몇 개 주워섬겼다. 여행을 떠난 건 내 뜻이었지만 여행에서 돌아가는 건 신의 뜻이다.

블타바강ㆍ체스키크룸로프성ㆍ스보르노스티광장 그리고 에곤 실레

▲ 블타바강이 도시를 감싸 흐르고 있다.
체스키부데요비치에서 약 25㎞ 떨어진 체스키크룸로프로 갔다. 이 도시는 에스(S)자형으로 구불구불 흐르는 블타바강이 감싸고 있는데, 체스키는 체코, 크룸로프는 말발굽이란 뜻이다. 블타바강이 마치 말발굽모양처럼 흘러서 붙인 이름 같았다. 우리나라의 ‘하회’마을처럼.

체스키크룸로프는 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는데 체코에서 프라하 다음 가는 관광지로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이곳의 상징은 오렌지색 체스키크룸로프성인데 세계 300대 건축물에 들어간다. 성과 마을을 보고 있으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도시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시청사가 자리 잡고 있는 스보르노스티 중앙광장은 이곳의 또 다른 상징이다. 길이 사방으로 뻗어있고, 광장 주변의 오래된 건축물들은 호텔ㆍ레스토랑 등으로 탈바꿈했다. 체스키크룸로프성이 있는 거리와 강 건너 옛 시가를 연결하는 다리가 바로 ‘이발사의 다리’다. 예전에 다리 인근에 이발소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왕자와 이발사 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담긴 곳이라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다리 위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세워져 있다.

체스키크룸로프는 또한 ‘자화상’으로 널리 알려진 체코의 화가 에곤 실레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하다. 에곤 실레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비쩍 마른 자신의 몸을 성기까지 있는 그대로 묘사한 자화상이 특히 유명한데,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몹시 불편하면서도 연민의 정 같은 게 느껴진다. 한때 에곤 실레에 심취해 그의 이름을 제목으로 시를 쓴 적도 있었다.

에곤 실레, 그 후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구름이 아주 낮게 떠 있다.
구름은 아주 느리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음, 바람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불고 있군
하늘 오른쪽 끝에는 뭐가 있을까?
오른쪽 끝까지 흘러간 구름은 어떻게 될까?
에곤 실레,
그대 때문에
나 지금
저 구름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하염없이 떠가고 있다.

천문시계ㆍ카를교ㆍ프라하성ㆍ카프카박물관

▲ 체스키크룸로프의 노면 전차. 트램이라 부른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도착했다. 탑이 많아 ‘백탑의 도시’로 불리고 ‘동유럽의 파리’로도 불린다. 옛 소련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동유럽으로 구분되지만 지리적으로는 서유럽에 더 가깝다. 프라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보다도 더 서쪽에 있다.

프라하가 연인원 1억명이 오는 관광도시가 된 것은 물론 옛 건축물들이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어서인데, 그 이유는 다행히 1ㆍ2차 세계대전의 포화를 피해갔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프라하를 방문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히틀러가 은퇴 후 노년을 프라하에서 보내기 위해 폭격을 못하게 했다는 말이 있다. 유럽 근대 건축의 역사를 모두 보려면 파리도 아니고 빈도 아닌 프라하에 가야 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어쨌든 프라하는 1000년 된 거리와 600년 된 다리가 존재하는 도시다.

먼저 천문시계 앞으로 갔다. 시계가 정각을 가리키자 천문시계의 문이 열리고 인형들이 돌아간다. 천문시계는 옛 시가 광장의 옛 시청사 건물 벽에 붙어 있는 시계인데 1437년에 제작됐다. 시계 제작의 거장이었던 미쿨라슈가 만들었다는 설과 15세기께 프라하의 천문학자이자 수학교수였던 하누슈가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하누슈가 다른 곳에 더 이상 시계를 못 만들게 하기 위해 황제는 그의 눈을 멀게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를 지키다 쓸쓸히 병에 걸려 죽었다는 슬픈 전설도 함께 전한다. 현재는 전동장치에 의해 돌아간다.

점심식사를 했다. 역시 국수가 들어간 스프에 고기와 빵이다. 그 유명한 체코의 대표 맥주 ‘필스너 우르켈’도 한 잔 했다. 약간 쌉싸래했다. ‘필스너 우르켈’은 체코의 2대 도시 필젠에서 1842년 탄생한 맥주인데 ‘우르켈’은 오리지널이란 의미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카를교에 갔다. 카를교는 다리뿐만 아니라 다리 밑을 흐르는 블타바강과 다리 건너 보이는 프라하성이 함께 해야 비로소 그림이 완성된다. 9세기 초 나무로 지어졌던 다리는 홍수로 여러 차례 유실됐고 카를 4세 때 50년의 공사과정을 거쳐 1406년에 완공됐다. 그러니 벌써 600년이 넘은 다리다. 체코인들은 이 다리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다리’로 자신 있게 꼽는다.

다리의 난간에는 성서 속의 인물들과 성인 등 30여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조각상이 성 요한 네포무크 상인데, 이 신부는 바람피운 왕비의 비밀을 밝히지 않아 혀를 잘린 채 강물에 던져졌다고 한다. 동판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 때문에 아주 반질반질하다.

다리 위에는 관광객뿐만 아니라 걸인도 많다. 작년 서유럽 갔을 때 독일 프랑크푸르트 교회 앞에서 그냥 온 게 계속 걸려서 이번에는 1유로를 주고 왔다.

다리 건너 카프카박물관이 보인다. 카프카는 평생 체코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는데 아마도 이 다리를 건너다니면서 ‘성’ ‘변신’ 등을 구상했을 것이다. 체험 삼아 트램(=노면전차)을 탔다. 승차권을 보자고 하는 사람은 없는데 한번 걸리면 큰 벌금을 물어 거의 모든 시민이 정기권을 발급받는다.

바츨라프광장과 프라하의 봄, 그리고 시민극장

▲ 바츨라프광장.
바츨라프광장으로 갔다. 현재는 프라하 최대의 쇼핑 거리지만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다. ‘프라하의 봄’이란 1968년 당시 소련 침공에 대항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자유민주화운동을 말한다.

산업화된 체코 지역과 농업 중심의 슬로바키아가 합쳐진 체코슬로바키아연방은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939년 나치에 의해 점령당했으나 6년 후 독일의 패배와 함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해방됐지만 공산당 일당 독재 국가가 됐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식층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물결에 힘입어 마침내 1968년 개혁파인 두브체크가 당 제1서기로 추대됐다.

두브체크가 이끄는 개혁파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민주주의를 전폭적으로 확대하는 강령을 채택했는데 국민들은 이러한 변화를 ‘프라하의 봄’이라고 부르면서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20만명의 군대를 동원한 소련군의 진주로 ‘프라하의 봄’은 겨우 8개월 정도만 유지될 수 있었다. 그 후 소련의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에 힘입어 1989년 평화적으로 시민혁명을 이뤄냈다. 이를 벨벳혁명이라 한다. 이 과정을 담은 소설이 바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고,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 필립 카우프만의 ‘프라하의 봄’이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드디어 이 소설을 다 읽었다. 책 뒤를 보니 1988년 12월에 샀다. 무려 25년 이상 책꽂이에 꽂아두었다가 이제야 다 읽은 것이다.

거리의 빌딩들이 조금 이해가 안 되는데 소련군 진주 때 살아남은 건물은 그대로 살렸고 부서진 건물은 현대식으로 새로 지었기 때문이다. 바츨라프광장은 그런 역사를 모두 지켜봤을 것이다. 현재의 바츨라프광장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아기엄마는 유모차를 끌고 가고 있고, 늙은 부부는 한가로운 저녁시간을 즐기고 있다.

화약탑을 지나 시민극장으로 갔다. 화약탑이라는 이름은 17세기에 화약창고로 사용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이름처럼 시커멓다. 탑 아래가 뚫려 있어서 통로로 이용된다. 바로 옆이 시민극장이다. 시민극장은 오베츠니 둠으로도 불리는데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르누보 건축물이다. 1911년에 문을 열었다. 정문 위에는 ‘프라하에 충성을’이라고 쓰여 있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 곳이기도 하다. 체코가 자랑하는 화가이자 장식 미술가인 알폰스 무하가 실내장식과 벽화, 천장화를 맡았다.

프라하의 봄 페스티벌은 매해 5월 12일에 시작된다. 이곳 스메타나 홀에서 교향시 ‘나의 조국’ 전 6곡을 모두 연주하면서 프라하의 봄 음악 페스티벌 행사를 시작한다. 5월 12일에 축제를 시작하는 것은 그날이 바로 체코 국민 음악의 선구자 스메타나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프라하의 봄 페스티벌은 1968년 자유민주화운동과 이름이 같다. 사실 프라하는 비엔나 이상의 음악도시다. 체코인들은 음악이 없는 체코는 소리 없는 티브이(TV)와 같다고 말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초연된 곳도 바로 이곳 프라하다.

▲ 틴 성당을 배경으로 광장에서 연주하고 있는 음악인들.
▲ 체스키크롬로프 카를교에서 바라본 야경.
날은 시나브로 어두워지고 정각이 되자 사람들이 천문시계 앞으로 또 몰려든다. 옛 시가 광장으로 갔다. 광장 중앙에는 보헤미아 독립운동의 투사인 얀 후스의 동상이 서 있다. 옛 시가지의 상징 틴 성당을 배경으로 광장에서 연주하고 있는 거리의 음악가들은 음악도 훌륭하지만 모습 그 자체로 그림이 된다. 어느 젊은 엄마는 아이들과 비눗방울 놀이에 여념이 없고, 연인들은 둘만의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다.

야경을 즐기기 위해 다시 카를교로 갔다. 세계 3대 야경이라는 프라하성은 낮에 보는 풍경과는 또 다르다. 운전기사 스테판에게서 산 맥주를 홀로 두 캔이나 마셨다. 갬브리누스의 맥주 거품과 함께 프라하의 밤은 깊어만 갔다.(다음호에 계속)

글ㆍ사진 /신현수(시인ㆍ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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