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여행 (32)

파친코와 재일동포 한창우, 그리고 김연아

▲ 에보시타케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마도.
저녁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갔다. ‘펜션’형 숙소로 썩 마음에 들었다. 우리 일행은 여덟 명이었는데, 독립된 공간에 방이 네 개 있고 가운데 주방시설과 모일 수 있는 탁자가 있었다.

숙소 근처 카쯔미해수욕장으로 산책을 나갔다. 커다란 야구장도 있고, 아이들 놀이터와 테니스장도 있다. 바다를 보고 있자니 날이 시나브로 어두워졌다. 어느새 사위는 완전히 어둠으로 물들고 하늘엔 초승달만 덩그러니 외롭게 떠 있다. 숙소 앞의 ‘리갈(REGAL)’이라는 파친코 구경을 갔다. 리갈? ‘왕족’이란 뜻이다.

파친코로 돈 따서 왕족이 되라는 건가? 일본은 파친코의 천국이다. 파친코 안에 들어가니 구슬 굴러가는 소리 때문에 당최 시끄러워서 잠시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일본인들은 정신없이 파친코 삼매에 빠져 있다.

파친코는, 재일 동포인 한창우씨가 처음 만들었다. 그는 처음에 제조업을 하다 얼마 못가 사업에 실패하고 말았다. 남아도는 베어링과 합판 등 자재를 써먹을 곳이 없나 고민하다가 슬롯머신에서 힌트를 얻어 파친코 기계를 만들었다. 초기에는 동네마다 기계를 등에 메고 다니며 아이들에게 놀게 했다. 이게 크게 히트했다. ‘빠찡’은 기계 당기는 소리이고 ‘꼬’는 구슬이 꼬르륵 하며 구멍으로 들어가는 소리란다.

이 사람이 세운 기업이 가끔 텔레비전에 김연아 선수 후원기업으로 나오는 마루한이다. 일본에선 피겨스케이트 인기가 매우 높아서 아사다 마오 같은 경우 기업 20개 이상이 후원를 하고 있는데, 김연아는 엄마랑 단 둘이 다닌다는 소리를 듣고 김연아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파친코장 벽에 ‘세계일주 109만 엔’이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돈을 따서 세계여행 가라는 얘기인가? 그런데 천 몇 백만 원으로 세계일주가 가능한가? 숙소로 돌아왔는데 술 한 잔 하고 자라는 벗들의 성화를 물리치고 곧바로 잠들었다. 생각해보니 종일 졸렸다. 멀미약 때문인가?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아침에 일어나 숙소 아주머니가 차려준 간단하지만 정갈한 일본식 아침을 먹었다. 짐을 꾸려 길을 나섰다. ‘18은행’이 낯익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인천근대박물관이 18은행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에 가기 위해 어제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남쪽으로 올라갔다. 히노끼와 삼나무 원시림으로 들어가니 계곡으로 깨끗한 물이 흐른다. 그런데 물길이 모두 암반으로 이루어졌다. 다테라산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세카와강이다. 아유모도시, ‘아유’는 은어, ‘모도시’는 원래대로 되돌리다, 돌아온다는 뜻이다. 아 맞다. 자동차 후진할 때 우리가 쓰던 일본말이다.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방송대에서 이번 학기에 공부한 강의 중에 이정호 교수의 ‘행복에 이르는 지혜’라는 과목이 있었다. 그 책에서 본 프랑스 철학자 알랭의 글이 생각난다.

“비가 내린다. 밖에 나가서 우산을 편다. 그것으로 족하다. 귀찮게 또 비가 오는군, 하고 말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비도 구름도 바람도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야! 근사한 비로군, 왜 그렇게 말을 못하는가. 그렇게 말해서 무슨 소용 있느냐고? 그렇게 말하는 게 당신 자신에게 이롭다. 당신의 몸 전체가 따뜻해진다. 그렇게 하면 비 때문에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인간의 일도 비처럼 생각해라”

나도 알랭처럼 이 비가 대마도에서 나를 맞이하기 위해 내가 올 때까지 산 속에서 기다린 거라고, 나를 환영하는 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고 비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이 다테라산의 나무만 모두 팔아도 일본 전체 국민이 2년은 먹고 산단다. 피톤치드 세례를 흠뻑 받았다. 숲속에 30분 있으면 산삼 한 뿌리를 먹는 것과 같다고 한다. 아, 고마운 나무.

이즈하라에서 쇼핑

▲ 만제키 다리.
다시 이즈하라로 돌아오니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폭우로 변했다. 대마도가 나를 너무 과도하게 환영하는군. 쇼핑을 하면서 좀 쉬기로 했다. 쇼핑도 여행의 중요한 부분이다. 먼저 면세점에 들렀다. 쇼핑 역시 대부분 안내자 하 선생이 사라는 걸 산다. 게르마늄이 그렇게 효험이 있는 물질인 줄 몰랐다.

통증 제거, 엔도르핀 생성 촉진, 산소 기능 활성화 등, 신이 내린 물질이다. 가장 눈에 띄는 기능은 면역력 강화다. 우리 몸에서 임파구를 형성해주는 t-임파구 생성에 문제가 생기면 암세포가 발생하는데, 게르마늄의 경우 t-임파구 활동을 촉진시켜 그 수를 늘려준다고 한다. 그러면 면역체계가 튼튼해지고, 면역력을 높여준단다. 이걸로 팔찌와 목걸이를 만들었다. 얼마 전에 한 종편(=종합편성채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게르마늄이 효험이 높다는 내용이 나온 후, 없어서 못 판단다.

대마도의 또 다른 명물 카스마끼 가게를 찾아 나섰다. 카스는 카스텔라의 준말, 마끼는 일식집에서 주는 ‘김 마끼’ 할 때의 그 마끼다. ‘만다’는 뜻이다. 카스마키는 단것을 좋아하던 에도시대 대마도 도주를 위해 특별히 만들던 별식이라고 한다. 유명한 나가사키 카스텔라를 가져와(대마도는 후쿠오카현이 더 가깝지만 나가사키현 소속이다) 팥을 듬뿍 넣어 ‘말이’식 카스텔라를 만들었다.

다행히 면세점에서 가까운 곳에 태평당이라는 원조 가게가 있었다. 거리 곳곳에 이즈하라항 마쯔리를 한다는 밀러 천을 붙여 놓았는데, 언제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이즈하라에선 해마다 8월 첫 주 토ㆍ일요일에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쓰시마 아리랑 마쓰리’가 벌어진다. 비가 그치니 해가 또 쨍 떴다. 거리 곳곳이 ‘친구야’ ‘부산갈매기’ 등 한국어 간판이 즐비하다. 일본의 물가가 꽤 비싸다. 담뱃값은 우리 두 배쯤 되는 것 같고, 아오모리 사과는 한 개에 거의 2000원이나 한다.

하나였던 섬을 두 개로 나누고 거기에 다리를

점심을 먹고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본격적으로 대마도 투어에 나섰다. 대마도 북쪽 히타까스까지 쉬지 않고 달리면 2시간 30분쯤 걸린다. 한 시간 쯤 넘게 달리니 만제키 다리가 나왔다. 대마도는 두 개의 섬처럼 보이지만 원래 하나의 섬이었는데, 러일전쟁을 앞두고 일본군 대장 도고헤이하츠가 군함 등을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1900년에 만제키 운하를 뚫었다고 한다.

러일전쟁과 관련한 의약품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정로환이다. 물을 갈아 먹은 일본군들이 설사 등으로 전쟁은커녕 맥을 못 추자, 연구 결과 나온 게 정로환이다. 설사를 멈추게 하는 약이다. 로서아(러시아)를 정벌하는 알약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물론 지금은 ‘바를 정(正)’자로 고쳤다. 현재는 특허기간이 끝나 아무 회사나 만들 수 있다. 나팔그림 그려진 정로환이 오리지널이란다.

일본이 전쟁하던 시기에 나온 약이 또 있다. 바로 기응환이다. 가미가제로 뽑힌 일본군들이 막상 비행기에 오르자 두려움과 극도의 긴장 탓에 정신을 못 차렸고, 그런 군인들의 혀 밑에 한 알씩 넣어줬단다.

대마도는 하나였던 섬을 두 개로 나누고 거기에 다리를 놓았지만 사실은 크고 작은 섬이 109개나 된다. 만제키 다리를 건너간다. 다리 색깔이 주황색으로 선명하다. 다리 도색을 얼마 전에 새로 했다. 그런데 몇 달이나 걸렸다. 우리 같으면 몇 주면 끝마쳤을 텐데, 그만큼 일본인들이 일을 완벽하게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일본인들인데, 나라 곳곳에 원전을 그렇게 많이 건설했다는 게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이렇게 완벽한 일본인들이, 일상적인 지진 때문에 집도 나무로 짓는 일본인들이, 후쿠시마 원전 등을 만들었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꼴을 보고도 정신 못 차리는 우리나라 ‘원전마피아’들은 후손들에게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핵 쓰레기를 인류 역사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안전하게 보관한다는 게 대체 말이 되는가?

대마도의 하롱베이로 불리는 에보시다케 전망대

▲ 와타즈미 신사.
대마도의 하롱베이로 불리는 에보시다케 전망대에 도착했다. 아마도 이번 대마도의 여행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에보시는 ‘모자’, 다케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울퉁불퉁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아소만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 전망대에 오르면 360도가 모두 조망된다. 섬과 바다와 산과 나무가 어울려 푸른색과 초록색이 뒤섞여 번갈아 나타난다.

와타즈미 신사에 들렀다. 일본은 나라 곳곳에 신사가 있다. 일본인이 모시는 신이 무려 8만개도 넘는다. 와타즈미 신사는 바닷물에 잠긴 ‘도리이’들이 이채로운 곳이다. 문 다섯 개 중 두 개는 바다에 세워졌다. 이 신사는 하늘신과 바다신을 동시에 모셨다. 덕혜옹주도 대마도 방문 시에 이 신사에 들렀다고 한다.

쓰쓰자키 한국 전망대로 갔다. 말벌이 있나? 조심하란다. 한국식 팔각정 모양의 전망대 옆엔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가 있다. 1703년 부산을 떠나 대마도로 오던 역관 사절단을 태운 배가 풍랑에 뒤집혀 전원이 숨진 것을 추모하는 비석이다. 한천석 등 조선 역관 108명과 안내를 맡은 쓰시마인 4명이 모두 몰사했다고 한다. 맑은 날 밤엔, 부산 광안리에서 하는 불꽃놀이는 물론 광안대교와 고층빌딩 불빛 등 야경이 모두 보인다고 한다. 예전엔 여기서 한국으로 거는 핸드폰도 터졌다. 하기야 부산까지 40킬로미터 조금 넘으니 당연하다.

‘일본의 아름다운 해변 100선’에 선정된 미우다해변

▲ ‘일본의 아름다운 해변 100선’에 선정된 대마도의 미우다해변.
마지막 여행지 미우다해변으로 달렸다. 아담하고 깨끗하다. 백사장의 모래가 아주 고와 밀가루 위를 걷는 기분이다. 덕적도의 서포리해수욕장이 생각난다. 백사장 한가운데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어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일본의 아름다운 해변 100선’에 선정된 곳이다. 100선이라고 해서 허투루 보면 안 된다. 일본은 나라 전체가 해변인 섬나라다. 그러니 해변은 수도 없이 많다. 초록 물빛이 한 번 들어와 보라고 거듭 유혹한다.

대마도의 북쪽 항 히타까스항으로 갔다. 대마도는 남북으로 비스듬히 누운, 길이 약 82㎞, 폭 약 18㎞에 면적은 거제도의 1.7배 크기인 섬이다. 이 섬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은 지난해 약 15만 명이었다. 전년도보다 두 배 이상이나 늘었다. 주말에는 하루에 1000여 명이나 들어온다.

대마도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일본에선 ‘대마’(對馬)라고 적고 ‘쓰시마’로 읽는다. ‘쓰시마’라는 이름의 유래와 관련해 몇 가지 설이 있는데, 한국 쪽에서 바라보며 불렀던 ‘두 섬(두 시마)’(두 개의 섬)에서 비롯했을 거라는 설이 있고, ‘마한을 마주 보는 땅’이란 뜻으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하 선생은 대마도의 백악산 정상에 말 모양의 바위가 마주보고 있어서 생긴 명칭이라고 했다.

대마도는 현재 수산업과 진주 양식, 자위대 주둔 등으로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최근에는 좋은 공기가 널리 알려져 실버타운이 곳곳에 만들어졌다. 일본 국내 관광객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인데, 한국인들이 많이 몰려오는 이유가 궁금해서 온단다. 히타카쓰항에서 부산까지 고작 49.5㎞, 1시간 10분밖에 안 걸린다.

이렇게 가까운데 우리 땅이 아니다. 학창시절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이종무 장군의 쓰시마 정벌이 생각난다. 그때까지도 우리 땅이었겠지. 그러나 대한해협 건너다니기도 위험하고 먹을 것도 별로 없는 척박한 섬이니 계속 버려졌겠지. 우리 땅이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며 배 안에서 아사히맥주 딱 두 캔을 먹으니 벌써 부산항이다. 부산역에 내려 밀면을 먹었다. 생각보다 매우 먹을 만했다. 우리는 또다시 시간을 돈으로 바꾸기 위해 서울행 케이티엑스를 탔다.

※ 신현수씨는 부광고 국어교사이자 시인이며,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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