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대회 열려
국민대회 취지서·임시정부 약법 등 작성해 정부 수립 결정

인천투데이=김도윤 기자│1919년 3월 1일, 9년전 일본제국주의에게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독립을 요구하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3월 9일 인천에서도 청년학생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만국공원(현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서 일어났다.

1919년 3월 9일 만세운동과 4월 2일 13도 대표자회의가 지금의 인천 중구 자유공원인 만국공원에서 열렸다.
1919년 3월 9일 만세운동과 4월 2일 13도 대표자회의가 지금의 인천 중구 자유공원인 만국공원에서 열렸다.

국내 13도 대표, 만국공원에서 정부 수립 논의

3.1운동은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서울 탑골 공원을 비롯한 국·내외에서 성별, 신분, 종교, 지역 등의 차이를 초월하고 궐기한 만세운동이다.

특히 3.1 운동에서 선포된 독립을 구현하기 위해 무엇보다 독립정부가 필요했다.

이에 만세운동이 국내 각지로 빠르게 확산됨과 동시에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논의가 러시아 노령, 중국 상하이 등 국내외에서 진행됐다.

그 결과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가 탄생했다. 이어 4월 11일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고, 같은달 23일 서울에선 한성정부가 수립됐다.

이중 한성정부 수립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13도 대표자회의’가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렸다.

당시 13도 대표자회의에는 홍진, 이규갑, 한남수, 김사국 등 국내 13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 약법’, ‘결의문’ 등을 작성하고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임시정부 각원, 평정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강화대사(대표) 등의 명단을 확정했다.

2022년 4월 2일 인천 시민사회단체들이 중구 자유공원에서 한성정부 103주년 기념식을 진행했다. (사진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인천지부 지부장 SNS)
2022년 4월 2일 인천 시민사회단체들이 중구 자유공원에서 한성정부 103주년 기념식을 진행했다. (사진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인천지부 지부장 SNS)

4월 23일 서울 종로에서 한성정부 수립 선포

국내 13도 대표들은 1919년 4월 23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봉춘관에 모여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한성정부 약법과 임시정부령 1·2호, 각원 명단도 함께 발표됐다.

이날 국민대회에서 낭독된 취지서에는 ▲국민대회 개최 취지 ▲참여한 13도 대표자 25명의 명단 ▲임시정부를 조직한다는 내용 ▲일제에 조선통치권의 철수와 일본군대의 퇴각을 요구하는 등 결의안 6개항이 담겨 있다.

함께 발표된 한성정부의 각원은 집정관총재 이승만, 국무총리총재 이동휘, 외무부총장 박용만, 내무부총장 이동녕, 군무부총장 노백린, 재무부총장 이시영, 법무부총장 신규식, 학무부총장 김규식, 교통부총장 문창범, 노동국총판 안창호, 참모부총장 류동열, 참보부차장 이세영 등이다.

강화대사로는 김규식, 노백린, 민찬호, 박용만,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등이 선임됐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사진.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갈무리)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사진.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갈무리)

1919년 9월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한편, 대한국민의회, 대한민국임시정부, 한성정부 외에도 임시대한공화정부, 대한민간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 고려임시정부, 신한민국정부 등 임시정부 등 국내외에서 총 8개의 임시정부가 선포됐다.

당시 수립된 임시정부 8개 중 대한국민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한성정부는 실체와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 세 정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형식적으로 존재한 이른바 그림자 정부로 실체와 체계는 불분명하다.

때문에 이후 진행된 임시정부들의 통합은 체계를 갖추고 있던 대한국민회의와 상해임시정부, 그리고 한성정부 주도 아래, 1919년 9월 11일 상하이에서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성정부의 법통을 따랐으며 교통이 불편한 러시아, 그리고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극심한 서울의 여건 등을 고려해 최종적으로 상하이에서 수립됐다.

이후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해방 전까지 약 27년간 중국 상하이를 비롯한 항저우, 창사, 광둥, 충칭 등 중국 각 지역으로 옮겨 다니며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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