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무관학교 마지막 생도, 일본 육군사관학교 입학
일본 육사 26기 지청천·이응준 항일과 친일 엇갈린 운명

인천투데이=박규호 기자│국방부가 지난 8월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 지청천 장군 등 독립운동가 5인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하겠다고 발표한 후 오히려 소설 범도 등 홍범도 장군을 다룬 도서가 인기를 끌고 있다.

소설 범도는 홍범도 장군만이 아니라 당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우당 이회영 선생의 흉상 앞에 서있다. (출처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우당 이회영 선생의 흉상 앞에 서있다. (출처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열사가 일제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한 날인 1909년 10월 26일과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10월 25일)를 맞아 <인천투데이>는 소설 '범도'의 방현석 작가 인터뷰,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독립운동가를 5회에 걸쳐 소개한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마지막 생도, 일본 육군사관학교 입학

대한제국 무관학교는 조선이 1895년 4월 초급 무관 양성을 위해 설치한 훈련대에서 비롯했다. 훈련대는 그해 8월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9월에 폐지됐다. 이듬해 1월 무관학교가 설립됐지만 한 달 만에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무용지물이 됐다.

그 뒤 1897년 2월에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고 7월에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10년 만인 1907년 8월 일본제국주의가 강제로 해산하면서 인원이 축소됐고, 1909년 8월에 폐교됐다.

무관학교 폐교 당시 생도는 1학년과 2학년을 합쳐 45명이었다.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일본육군 중앙유년학교에 편입해서 나중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입학했다.

마지막 무관생도였던 김경천과 지청천, 홍사익, 이응준은 일본 육사 생도 시절인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일본 요코하마에서 피를 술잔에 섞어 마시며 만주로 가서 항일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김경천과 지청천은 신흥무관학교로 가서 항일투쟁을 시작했고, 이응준과 홍사익은 친일을 시작했다.

일본 육사 26기 지청천·이응준 항일과 친일 엇갈린 운명

일본 육사 26기 동기인 지청천 장군과 친일파 이응준은 육사 생도 시절 항일투쟁할 것을 결의했지만 한 명은 항일독립군으로 한 명은 일본군으로 엇갈린 선택을 했다.

지청천은 서일, 김좌진과 함께 한국독립군단을 조직했다. 또한 한국독립군을 조직해 쌍성보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후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이 창설됐고 지청천은 총사령관이 됐다.

이응준은 육군사관학교을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다.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일본군에서 복무했다.

이응준은 일본 제국 육군 대좌로 광복을 맞이했고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초대 참모총장을 지냈다.

홍사익은 일본 육사 시절 성적이 좋은 엘리트였다. 일본인 생도들이 줄을 지어서 노트를 빌릴 정도였다. 육사를 나오더라도 육군대학을 나와야 장군이 될 수 있는데, 사단장이 홍사익을 육군대학에 보내주겠고 할 정도였다. 홍사익은 일본군 중장으로 승진한 뒤 태평양전쟁 전범으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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