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세계 인구와 실물경제의 성장이 낳은 장기적인 원인과 결과, 제안과 대응방안에 대한 보고서가 지난 1972년에 나온 ‘성장의 한계(Limits to Growth)’ 초판이다. 그 때 제시했던 예측과 요청을 현재화 했던 2004년 판본을, 그 이후 또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무겁고 두려운 마음으로 펼쳐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구생태계를 제약하는 요소들 특히, 세계 인구와 물질적 성장이 유일무이한 우리 지구의 수용력을 초과하면 인류의 평균적 삶의 질이 저하되고 궁극적으로 인류의 행복이 퇴보하고 전 세계가 통제 불가능한 와해 상태에 봉착한다.

이것을 막기 위해 모든 기술과 문화, 제도의 변화를 통해서 지구(地球)의 미래를 생각하는 매우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해야 한다. 어느 머지않은 시점에 이르면 세계의 산업성장뿐만 아니라 식량이나 서비스, 여러 소비 분야와 같은 경제 영역에서도 더 이상 성장을 유지할 수 없는 ‘성장의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구에 대해 바라는 수요와 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지구의 수용능력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용어로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 개념이 있다. 생태발자국은 자원을 추출하고 오염물질을 방출하고 에너지를 사용하고 생물다양성을 파괴하면서 도모해 온 모든 물질적 성장의 결과가 자연에 미치는 영향의 총합이다.

즉 인간이 자연에 미치는 총체적(總體的)인 영향력(影響力)이자 인류가 지구에 지운 모든 부담(負擔)의 총합(總合)이다. 우리 인류는 이미 2007년에 지구가 견뎌낼 수 있는 생태발자국의 한계를 20% 초과했다. 무엇 때문인가. 오늘날 지구의 수용능력을 초과한 물질적 성장의 원인과 구조는 무엇인가.

인류는 지난 200년간 인구와 실물경제에서 인간 종의 역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빠른 속도로 식량 생산의 증가, 도시 인구의 증가, 에너지 소비의 증가, 원자재 사용의 증가, 온실가스의 급속한 축적을 낳았다.

이런 급격한 물질적 성장의 한계가 한편으로 지구의 자원 생산력의 한계를 낳고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방출한 오염물질과 쓰레기를 자정(自淨)할 수 있는 지구 흡수력의 한계를 낳았다.

오늘날 우리 인류의 총아는 언필칭 물질(物質)이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보다 더 좋은 집이나 보건, 교육, 자동차와 냉장고, 더 많은 물건들을 소유하고 싶어 하고 그러려면 철과 콘크리트, 구리와 알루미늄, 플라스틱들과 같은 수많은 물질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이 물질들이 나중에 재생돼 쓰이지 않는다면 어딘가에 버려져 쌓이거나 부서지거나 용해되거나 증발하거나 토양이나 바다, 대기 중에 흩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1인당 특히 선진국 국민의 물질소비는 그들이 식량이나 물, 에너지를 소비하는 방식에서처럼 매우 쓸데없는 것이 많다.

사실 인류에게 그렇게 많은 물질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한편으로는 자원의 고갈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 지구에 오염물질과 폐기물 처리능력의 한계를 초래한다. 대체로 부자 나라 국민들의 생태발자국은 가난한 나라 국민들의 생태발자국보다 훨씬 더 크다.

이제 어깨에 힘 좀 주고 선진국 진입을 내세우는 우리나라는 앞선 선진국가들 국민들보다 한층 더 절제되지 않은 물질 소비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우리가 향유하는 삶의 시스템은 하나의 ‘중독’ 시스템이고 그 핵심에는 ‘대량생산 – 대량소비 - 대량폐기’의 삼각 축이 있다(강수돌, ‘중독의 시대’). 이것을 ‘적정생산 – 적정소비 - 적정순환’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 새로운 삶의 ‘가치관’을 세워야 하고 새로운 삶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럴려면 지금까지의 물질 소비를 심리적으로 제도적으로 두둔하고 부추겨왔던 ‘성장지상주의(成長至上主義)’를 개조하고 해체해야 한다. 그간에 성장은 개발과 진보, 번영과 성공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취급됐다.

세계 각국 정부들은 모든 문제해결의 처방책으로 성장을 찾았고, 성장이 끊임없이 우리들을 잘살게 해줄 것이라는 굳센 믿음은 좀처럼 의심과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성벽이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풍요와 과잉 소비가 우리의 불안과 허기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의 벽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나 첨단기술이 천사처럼 구세주처럼 나타나 우리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잘못된 신앙의 벽이었다.

그 벽에 기댄 우리사회는 풍요 중독 사회이자 기술 중독 사회가 됐다. 물질의 소비만으로 인간이 가진 비물질적이고 진정한 욕구들, 자기 정체성이나 공동체의식, 자존감을 영원히 채울 수는 없다.

기술은 지구의 물질적 한계 초과를 되돌리거나 극복할 힘이나 해법이 될 수 없다. 현실세계에서 언제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경이로운 능력을 지닌 기술은 없다. 기술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이제 그 벽에 문(門)을 내야 한다.

어떻게 견고한 성벽에 문을 낼 것인가. 해법의 결정적 관건은 인간의 선택이다. 견고한 성장지상주의를 허물고 성장 중독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사회의 개조, 다른 말로 인간 정체성의 기반과 제도, 문화를 바꿀 근본적 의미의 사회혁명이 필요하다.

‘성장의 한계’가 제시하는 해법을 빌자면 곧 ‘지속가능성 혁명’이다. 지속가능성이란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이고, ‘사회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는 물질적, 사회적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을 만큼 충분히 멀리 내다볼 줄 알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슬기로운 사회’다.

이를 UN Brundtland 위원회는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미래 세대의 역량을 훼손하지 않고 현재의 욕구에 잘 대응하는 사회’라고 정의했다(‘우리 공동의 미래’, 1987).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 ‘성장의 한계’가 강조하는 바와 같이 그것은 결국 리더십과 윤리, 통찰력과 용기의 문제이고 인간의 마음과 영혼과 관계된 문제다.

그리고 그 출발은 어떤 거창한 데 있지 않고 일상의 작은 실천, 힘 안 들고 돈 안 드는 작은 실천 하나에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소망하는 바를 상상하는 것,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점점 더 집중해서 상상하는 것, 바로 꿈꾸기다.

꿈은 행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 꿈이 자라나야 한다.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은 그들의 윤리나 사고 수준에 딱 맞는 물리적 장치로 금방 둘러싸인다. 그 공동체에서 널리 쓰이는 개념들이 가정과 사회, 도시, 의례와 언어, 신문 등 장치들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 자체를 드러내는 지를 보라(Ralph Waldo Emerson, 1838).”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단지 50년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지구상에 있는 대부분의 자원들은 50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Jared Diamond, 2013).” Diamond 교수는 2021년 의견을 수정했다.

“상황이 나빠지는 속도, 세계 인구의 증가 속도, 숲이 잘려나가는 속도에 기후변화 진행 단계까지… 약 30년 후에는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만약 2050년까지 이 문제들을 풀지 못한다면, 우리는 너무 늦을 겁니다.”(한겨레신문, 2021.7.22.)

누가 새로운 시스템 전환을 주도적으로 해나갈 것인가. 나부터, 비록 불철저한 작은 실천이라도, 실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지. 지속가능성 혁명을 되뇌며 생태발자국을 곱씹으며 미래가 있던 자리를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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