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섭 다문화학 박사

인천투데이|언제부턴가 귀에 익숙해진 잠언 같은 말이 있다. 미쳐야 미친다(불광불급不狂不及). 철학적 깨달음이건 지적이건 예술적이든 혹은 기술적이건 간에 역사상 놀라운 성취를 이룬 삶들이 웅변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간직하고 일관했던 열정과 광기라는 것이다(정민, ‘미쳐야 미친다’).

그들 거장들처럼 아주 원대하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라도 오늘날 나날의 삶이 힘든 우리들 대부분이 덕후(德厚)나 마니아(mania)를 꿈꾸고 갈망하는 연유 또한 비슷하지 않겠는가. 미칠듯한 열정과 광기를 일컬어 조선 실학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벽(癖)’이라 했다.

“벽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일 뿐이다. 무릇 벽이란 글자는 병 질(疾)과 치우침(偏僻)을 합한 것이니, 편벽된 병을 앓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전문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그 긍정성을 높이 평가했던 바다(박제가, ‘백화보서百花譜序’).

벽(癖)은 다른 말로 ‘중독(中毒)’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이 말은 아무리 궁리해 봐도 그리 좋게 생각되지가 않아서 아쉽다.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고민을 안겨준다. 아닌 게 아니라 현대사회를 문제적인 중독사회로 규정하고 이 중독이 개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문제적인 ‘중독시스템’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앤 윌슨 섀프(Anne Wilson Schaef(1988), ‘중독사회’).

알코올 중독, 니코틴 중독, 카페인 중독, 음식 중독 같은 것을 ‘물질중독’으로 분류하고, 폭력이나 도박을 일삼는 중독, 일이나 돈 모으기에 집착하는 중독, 스마트폰 중독, 쇼핑 중독 같은 것을 ‘행위(혹은 과정)중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런 구분을 떠나 나와 주변을 돌아보면 참말이지 현대를 사는 우리는 거개가 중독자다. 물질이든 행위든 혹은 관계든 그 어떤 것에 매여 살고 그것에 집착한다. 그런데도, 그래서 언제나 목마르고 그러므로 또 끊임없이 갈구한다.

이 건강하지 못한 현실은 결코 개인으로 환원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들 개개인이 중독 행위자라면 우리들이 속한 이 사회가 바로 ‘중독된’ 사회라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해결 또한 개인의 치유만이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한 사회와 또 그 사회의 시스템적 전환을 통해서야 비로소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다는 관점이 긴요하다.

강수돌은 ‘중독의 시대(2018)’에서, 한국을 더 심각한 중독사회로 진단하면서 그 원인으로 사회적 트라우마를 들춰낸다. 한국은 유례없는 가혹한 식민지 시대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거쳐 왔다.

죽음과 배고픔, 공포와 불안의 그 시대는 나와 내 혈육의 생존 앞에서는 모든 것이 용서됐다. 찢어지게 가난만 해왔던 우리 공동체도 이제 한 번 잘살아보자는 간절한 구호 앞에서는 모든 것이 정당화됐다.

그리해 수십 년 압축 성장을 위해 모두가 앞만 보고 돌진하는 과정을 우리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트라우마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지나왔다. 한 개인이 중독에 쉽게 빠지는 이유가 그 내면에 생긴 상처를 치유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처럼 우리 사회가 중독사회가 된 것은 사회적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다소 장황하게 사회와 중독의 문제를 써 내려온 이유는 우리 사회 중독 현상 중 하나를 들여다보고 그 치유와 회복의 길을 시급히 모색해야 한다는 소망 때문이다. 오늘의 주제는 우리 사회의 물질(物質)중독 혹은 기술(技術)중독, 그리고 풍요(豐饒) 내지 소비(消費)중독이라는 현상이다.

한국에 사는 이방인 영국 태생 다니엘 튜더(Daniel Tudor)가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에서, 한국이 이룬 놀라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이면에 이러한 기적을 이루느라 한국이 희생해야만 했던 것들을 이제는 다시 생각할 때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잃었던 행복을 되찾아오기 위해서라는 것과 꼭 같은 생각이다.

그의 책 영어 제목이기도 한 ‘불가능한(The Impossible Country)’ 한국을 ‘지속가능한(Possible and Sustainable)’ 공동체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소망이기도 하다.

중독은 무엇보다 결핍(缺乏)에서 비롯된다. 결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회피(回避) 심리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의 습성을 들여다보면 참 독특하고 흥미로울 때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그렇다. 저장강박증 까지는 아닌듯한데 아내로부터 핀잔 듣기가 일쑤다.

얼마 전까지는 책이 그랬다. 이런저런 잡다한 것까지 책이란 책은 좀체 버리질 못했는데 지금은 한결 둔감해지고 헤어지는데 과감해졌다. 가끔씩 정리를 하고 몇 권이라도 내다 버릴 때면 기분이 좋기까지 하다. 신발도 마찬가지고 옷도 그렇다.

나름 물질에 초연하며 새것과 유행에 휘둘리지 않는 검박함을 지녔다고 내심 자부해 오던 터지만 정작 신발장이나 옷장을 열어보면 신고 입었던 기억조차 희미한 품목들이 잔뜩이다. 쓸 만한 옷과 신발은 재활용품목이라기에 아쉬움이 덜하고 다행스럽지만 동시에 홀가분하기만 한 게 아니고 죄책감이 점점 더 크게 일어난다.

그러고도 매장이나 마트 코너에 가면 또 새로 나온 것들에 대한 소유욕을 어쩌지 못한다. 모자도 그렇고 각종 가방들도 그렇고 여기저기서 기념품으로 받은 수건과 우산도 마찬가지고, 머그잔과 텀블러, 명함지갑과 휴대용저장장치(USB)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겠다고 혼잣말을 할라치면 다른 사람들도 차고 넘칠 거라며 아내가 한소리 한다.

요즘 각별히 수집과 저장 욕구를 어쩌지 못하는 품목은 다름 아니라 종이가방(쇼핑백)이다. 각양각색의 종이가방은 하나하나가 참 매력적이다. 정반대로 아내는 보이는 대로 종이가방을 버리는 데에 그렇게 과감할 수 없을뿐더러 왜 그 흔해빠진 물건에 집착하느냐고 타박을 하지 않을 때가 없다.

버리는 데 저토록 거리낌 없는 아내를 보며 혀를 끌끌 차면서도 내심 한편으론 나는 왜 이토록 종이가방에 집착하는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중독 혹은 집착은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명제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내게도 경험적으로 정확하게 타당하다는 결론이다.

한국은 급속한 산업화 근대화를 이뤘다. 그래서 산업화 세대(1940~1954년 출생)는 그 이전과 이후의 극명한 빈곤과 풍요의 양면을 모두 생의 절반씩 균형적으로(달리 표현하면 극단적 대조로) 경험한 세대다.

그 이후의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 출생)들과 그 다음 소위 386을 넘어 586으로 명명되는 세대 역시 적어도 대개들은 유소년 청년기까지 가정과 사회에서 풍족하지 않은 빈곤의 공기를 마시며 자랐다.

텔레비전.(출처 픽사베이)
텔레비전.(출처 픽사베이)

내 경우에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먼 지방 시골마을에서 자랐는데, 그 마을(비교적 일찍 근대화의 혜택이 주어진 지역이었음에도)에 호롱불을 밀어내고 눈부신 밤을 선물해준 전기가 겨우 들어왔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물지게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우물가를 왕래하는 일은 계속됐다.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도시로 이사 오기 직전까지 밤마다 텔레비전이 딱 한 집 있었던 아랫마을까지 마실을 다녀와야 했다. 지금도 아련하게 기억되는 것은 쓰고 남은 비닐로 된 요소비료 포대를 접어 야구장갑을 만들면 그렇게 질기고 멋질 수가 없었던 일, 낡아서 더 이상 못쓰게 된 함석물동이 밑단에 두른 쇠를 잘라 나무로 만든 홈 틀에 끼우고 못으로 고정해서 꽁꽁 언 냇가에서 썰매를 타던 일이다.

코흘리개 아이들이 그럴 정도면 신산(辛酸)한 가난을 이고 살아온 어른들의 악착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모든 물건은 귀(貴)했고 하나같이 버릴 게 없었으며 저마다 다용도로 창조적으로 쓰여 졌던 시절이고 생활이었다.

오늘날 보편적 용어가 된 리사이클링 혹은 업 사이클링은 고상한 담론이 아니라 불과 한 세대 전, 우리가 있던 자리에 실존적으로 존재했던 지속가능한 삶의 태도였다.

2000년대 들어 나이 사십 언저리에 미국에서 2년간 살았다. 가족들과 주말이면 월마트를 비롯해서 프리미엄 아울렛 등에 갈 기회가 많았다. 그 때마다 놀라웠던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계 각국에서 생산된 각양각색의 상품(식료품부터 공산품까지)들이 그야말로 가게마다 코너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광경이었는데, 귀국 후 몇 년 사이에 대형 쇼핑몰을 필두로 어디를 가나 한국 역시 엄청난 상품들의 세례를 받게 됐다는 현실을 확인하게 된 건 실로 경이로운 변화였다.

산더미 같은 물건들 앞에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생각했다. “도대체 저 많은 물건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생산돼 이렇게 수많은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을까, 이런 변화는 언제 어디까지 가능할까.”

아파트공화국에서 아파트 생활을 한 지 25년이다.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마다 수백세대들이 내놓은 온갖 폐기물들에 놀라지 않을 때가 없다. 그 한편에서 매일매일 겹겹이 포장된 새로운 물건을 쏟아 붓는 택배차량들을 본다.

오늘도 혀를 끌끌 차며 집에서 겨우 서너 명이 쏟아낸 각종 플라스틱과 포장지, 캔과 병들을 가득 담아 나와서 분리배출함에다 대충대충 건성으로 던져 넣는다. 이 떳떳하지 못한 순환의 끝은 어디일까.

몇 해 전 시골 벽촌 고향 방문 길에서 저 너머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불타는 쓰레기 산을 목격했을 때의 두려움과 참담함을 잊을 수 없다. 저 연기와 냄새의 흉포함은 점점 더 우리를 포위하고 조여 올 것이리라.

머지않아 모종의 종착지 이를테면 말로(末路)를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빈도를 늘려가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물질 탐닉에서 비(非)물질의 추구로 개과천선하지 않는 한, ‘이러다간 정말이지 오래 못가지.’

오랫동안 옷, 자동차, 냉장고, 집 등등 ‘1인당 소비재 산출량’은 인간의 물질적 행복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로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 J. K. Galbraith는 ‘풍요한 사회(The Affluent Society, 1956년 초판)’에서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 경이로운 풍요를 구가하기 시작했던 미국사회에 드리운 어둡고 긴 그림자를 직시했다.

그것은 곧 풍요의 뒤안길에서 깊어지는 불평등과 빈익빈부익부, 그리고 ‘풍요 속에 빈곤’이었다. 오늘의 풍요는 우리 모두를 잘 살고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목도하는 풍요 속에 불평등, 불평등의 극대화, 양극화의 불만과 불안은 폭발의 임계점으로 다가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과연 이 풍요가 우리에게 청구하는 비용과 대가는 여기 즉, 인간(人間)들의 불평등과 양극화에만 그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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