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수연 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류수연 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류수연 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인천투데이|결국 인천 부평 조병창은 철거의 수순으로 돌입했다. 어쩌면 예상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떤 대안도 허락되지 않는, 일방향적으로 철거의 당위를 고집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간담회란 어찌 보면 그저 면피를 위한 허울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다는 말만큼 무책임한 말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이것은 우리 사회, 아니 보다 엄밀히 말하면 정치권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빈곤한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정치권이 개발주의자들의 담합에 손을 들어주는 일은 너무나 흔해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것은 비단 일상의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국가 주도의 정책이나 외교에서도 나타나는 역사의식의 부재는 부끄러울 지경이다.

멀리 되짚어볼 필요도 없다. 한일관계를 대하는 우리 정부의 굴욕적 태도는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의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한국기업과 정부가 대신하겠다는 발상은 제 몫조차 찾지 못하는 한국 외교의 후진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최근 발생한 독일 카셀대 ‘평화의 소녀상’ 기습 철거 사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른 아침에 기습적으로 감행된 소녀상 철거로 카셀대의 총학생회조차 적극적인 규탄 성명을 냈지만, 우리 정부의 태도는 묵묵부답이다.

아니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철거의 빌미를 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한국 정부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연일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 대한 규탄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친일사관을 넘어 매국사관이라는 시민단체와 진보단체의 비판이 연일 이어지고 있지만, 윤석열 정부는 오직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수 경향의 신문매체들은 약 4년 만에 이뤄지는 윤 대통령의 방일만 톱기사로 배치하면서, 경직됐던 한일관계의 물꼬를 텄다는 장밋빛 예찬으로 가득하다.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정부에겐 눈도 귀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다.

문제는 외교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전 영역에서 한국의 국가적 위상이 하염없이 몰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경쟁력의 추락, 세계 최저를 찍고 있는 출산율, 역사의식조차 부재한 외교정책까지. 온통 부정적인 전망으로 가득하다. 이 모든 것이 윤 정부 출범 이후 불과 1년도 안 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결과임을 정녕 모르는 것인가.

대의제 민주주의 안에서 대통령은 국민 다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그만큼 대통령의 입은 무겁고 엄중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1년 남짓의 시간 동안 대통령의 입이 만들어낸 수많은 파행을 목도해야 했다. 이번 3.1절 기념사는 그 파행의 정점이자 파국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더구나 이번 한일정상회담은 시작하기도 전에 결과가 예측된다는 점에서 더 씁쓸하다. 대통령실의 사전 언론 브리핑에 따르면 공동선언조차 없을 예정이라고 한다.

충분한 준비조차 없이 속행된 회담이라는 것이 다시금 드러나는 대목이다. 밑천조차 스스로 내버리고 시작한 회담이라는 점에서, 그저 두 정상이 만나는 쇼맨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지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파행 속에서 남겨진 것은 국민적인 분노와 부끄러움뿐이다. 보다 안타까운 것은 이미 그 몫을 나눌 수 없을 만큼 날로 커지고만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더할 수 없이 답답한 마음으로 오래된 격언을 떠올려 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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