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조여사 유고작 ‘바위에 새긴 눈물 삶으로 피어나다’
2월 24일 오전 11시 인천시교육청 북부교육문화센터

인천투데이=김갑봉 기자 | 지난해 10월 작고한 고 죽산 조봉암 선생이 장녀 고 조호정 여사의 유고작 출판기념회가 오는 24일 열린다.

(사)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가 오는 24일 오전 11시 인천시교육청 북부교육문화센터에서 고 조호정 여사의 유고작인 ‘바위에 새긴 눈물 삶으로 피어나다’ 출판기념회를 정기총회와 함께 개최한다고 밝혔다.

죽산의 장녀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고 조호정 여사는 작년 10월 26일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죽산기념사업회와 인천시는 죽산 평전과 죽산 만화, 고 조호정 여사 기록 등 죽산 조봉암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도서 3종을 발간했고, 조호정 여사의 유고작 ‘바위에 새긴 눈물 삶으로 피어나다’는 그 중 하나이다.

‘바위에 새긴 눈물 삶으로 피어나다’의 표지.(사진제공 인천시)
‘바위에 새긴 눈물 삶으로 피어나다’의 표지.(사진제공 인천시)

 

조호정 여사, 죽산의 비서이자 정치적 동반자로 활동

조호정 여사는 1928년 아버지 죽산이 항일 독립운동을 하던 때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조 여사는 죽산이 1932년 제포된 후 1933년 귀국했다. 죽산은 1938년까지 신의주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조 여사는 귀국 후 인천 박문여학교(현 박문여자중·고등학교)를 나와 1950년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했다.

죽산은 1948년 5월 초대 민의원(현 국회의원) 총선거 때 인천 을구(현재 인천 부평·계양·서구)에서 당선해 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주도했다.

조 여사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아버지 죽산의 비서로 활동했다. 죽산은 1956년 대선에서 진보당 후보로 출마해 200만표를 기록하며 이승만의 강력한 대항마로 부각했다.

1959년 이승만 정권은 죽산에게 간첩혐의를 씌웠고,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죽산은 1959년 7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살아졌다. 조 여사는 죽산의 억울한 죽음 후 평생 아버지의 복권을 위해 애썼다.

1991년 조 여사의 이모부인 윤길중 국회의원이 죽산 사면 복권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로부터 20년 만인 지난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죽산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조호정 여사의 유고작 ‘바위에 새긴 눈물 삶으로 피어나다’는 조호정 여사가 생전에 남긴 기록을 토대로 가족, 친구 등 구술을 더해 만들었다.

책은 죽산이 상하이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던 당시 조호정 여사의 기억, 귀국 이후 인천 학창 시절, 6·25 전쟁 등 죽산이 국회부의장일 때 비서 활동 당시 기억, 진보당 사건 이후 죽산의 복권을 위한 기록 등을 담고 있다.

청소년이 만나는 죽산 조봉암 표지 (사진제공 인천시)
청소년이 만나는 죽산 조봉암 표지 (사진제공 인천시)

죽산, 헌법을 기초하고 토지개혁 주도해 산업화 토대 마련

죽산은 1899년 강화군 선원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며 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와 제1차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며 사회주의 계열 항일혁명가로 활동했다.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뒤, 1938년 출소 후 박헌영이 이끌던 조선공산당과 선을 그었다. 해방 후 1948년 초대 국회의원 총선거인 1대 민의원 선거 때 인천을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죽산은 제헌 의원으로 헌법을 기초했다. 아울러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주도해 산업화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강제로 땅을 뺏는 것이 아니라 지주에게 농지채권을 주는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지주들이 이 채권으로 땅을 살 땐 시중 가격의 30%만 쳐줬다. 하지만 지주들이 일제 적산을 매입할 땐 채권 가격 그대로 인정했다. 지주들은 정부로부터 적산을 매입했고, 이는 자본축적의 토대가 됐다. 농민들에겐 무상에 가깝에 토지를 분배했다.

죽산은 1952년 8월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1956년 무소속으로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죽산은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를 노선으로 내걸고 30%가 넘는 지지(=216만표)를 얻었다.

이 같은 지지로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했고,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1958년 죽산에 간첩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그리고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비엔 묘비문이 없다. 죽산기념사업회와 유족은 그런 묘비를 아무런 내용을 채우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훗날 정부가 서훈을 하면 그 때 새로운 묘비를 세울 방침이다. 선생의 억울함을 미래세대에 알리기 위함이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비엔 묘비문이 없다. 죽산기념사업회와 유족은 그런 묘비를 아무런 내용을 채우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훗날 정부가 서훈을 하면 그 때 새로운 묘비를 세울 방침이다. 선생의 억울함을 미래세대에 알리기 위함이다. 

죽산이 일제에 부역했다면 일제가 왜 구속을 했겠나

1991년 조호정 여사의 이모부인 윤길중 국회의원이 죽산에 대한 사면과 복권을 청원하는 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로부터 20년 만인 지난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죽산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의 무죄 선고로 죽산의 억울한 누명은 풀렸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명예회복은 독립운동과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는 일이었다.

죽산기념사업회와 유족은 죽산의 항일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로 공로를 정부가 인정해야 한다며, 서훈을 신청했다. 하지만 기념사업회와 유족은 2019년 이후 신청하지 않기로 했다. 조호정 여사는 끝내 아버지 죽산이 서훈을 받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1941년 12월 23일 자 신문에 ‘인천 서경정(현 중구 내동)에 사는 조봉암 씨가 국방헌금 150원(현재 9000만원)을 냈다'는 단신 기사를 토대로 추서를 안 하고 있다. 죽산이 일제와 타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죽산의 주소는 소하정(현재 부평)이었고, <매일신보>에 실린 그만한 성금을 낼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국가보훈처는 2017년 유족에게 서훈에 필요한 보완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죽산은 1945년 1월 일제가 단행한 예비검속으로 구속됐다가 8월에 풀려났다. 일제에 부역했다면 구속됐겠냐는 게 기념사업회과 유족의 입장이다. 기념사업회와 유족은 2019년 이후 더 이상 서훈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 남은 건 이제 후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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