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10월 29일 참사가 있던 날, 동료로부터 소식을 들었냐는 연락을 받았다. 이태원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거였다. 무슨 소린가 싶어 포털사이트에서 ‘이태원’을 검색했고 압사 사고로 추정된다는 초기 보도를 보고도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기사에 적힌 사상자 수는 이미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많아서 설마 이보다 더 늘어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러기를 바랐다. 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난 뒤 후속 보도된 기사에서 사상자의 숫자는 처음 본 것보다 더 많이 집계돼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도 삶이 이어진다는 것이 종종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살아있는 자들이 그 죽음 ‘이후’를 자기의 삶의 한 편린으로 삼는 일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날은 밝았고 사람들의 생활은 지속됐으며 나 역시 그러했다. 어떤 가게에 예약을 해놓은 것이 있어 그곳으로 향한 나는 희한하고 무례한 이야기를 들었다.

고작 이틀이 채 지나지 않은 이 죽음에 대해서 가게에서 마주한 이는 그 나름대로 애도를 표하려는 듯이 말을 꺼내기 시작했는데,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역설하면서 부적절한 표현을 사용했다.

참사의 피해자 다수가 자기 나이 또래의 청년들이었다고 하니까 더더욱 놀랍고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말하면서 마치 그 죽음이 떳떳하지 않은 죽음인 양 언급했다. 그 과정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죽음이 비교되기까지 했다. 그의 기준 속에서 어떤 집단적 죽음은 부끄러운 일처럼 여겨지리라 상상되는 모양이었다.

놀러 가려던 게 무슨 죄가 되겠냐고 슬며시 불편한 기색을 비쳤던 나는 죽음의 경중과 가치를 비교하는 그의 말을 듣고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는 어쩌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 말하는 건 자신이 타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 이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타인의 죽음을 손쉽게 가치 평가하는 일은 그 죽음을 목격하는 공동체 일원이 해야 할 일로 적합하지 않다. 허나 그날 그 말을 들은 이후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그런 차원에서만 충격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무슨 대단한 정치적 야망이나 입장을 옹호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던 데다, 아마도 그가 거듭 주장하듯 그 자신 또한 피해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 또한 부분적으로 사실일 거라는 점에서였다.

그가 애도에 실패했음은 두말할 것 없는 진실이다. 다만 이 모든 사실이 한 데서 목격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애도에 필요한 최소한의 형식도 존중하지 않은 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몰두해, 필요하다면 타인의 집단적 죽음까지도 자기 감정의 정당화에 바쳐지는 이 상황. 그는 완전한 악인은 아닐 것이고 그 말을 할 때에는 악의조차 없었겠지만, 바로 그 사실이 나는 절망스러웠다.

그의 실패한 애도는 너무나 악의적이었으나 그가 너무 평범한 청년처럼 보인다는 사실. 애도에 실패한 것은 그만이 아니라 이걸 목격하는 사회 전체였을지도 모른다.

최근에 청년 정책과 관련한 라운드 테이블을 마무리하면서, 연구 기관의 시도 주관 청년 정책을 제안하는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왔다.

그 발표에서 ‘생애주기적 단계’를 고려해 청년 예술가에 대한 지원 정책을 정리하고 제안할 필요가 있다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곧 그것이 사회가 재생산하기를 승인하는 종류의 ‘생애주기’에 국한돼 있다는 인상을 받아 몇 가지 의견을 나눴다.

퀴어와 젠더 정체성에 따른 생애주기적 경험이 다르게 구성될 수 있으므로 그것을 고려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세월호에 이어 10.29 참사와 같이 집단적 죽음 사건에 대한 경험은 특히나 오늘날 청년 세대의 생애주기 안에서는 ‘공동체’를 상상하는 일에 있어 앞으로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사건이 돼버렸는데 이에 대한 고려 또한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타인의 죽음을 함부로 가치평가 하는 청년의 말을 두고 그가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서 그렇다는 말 또한 얼마간은 무책임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월호 이후에도 10.29 이후에도 살아남은 우리는 타인의 애도의 실패에 대해서도 어떤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닐까. 왜 어떤 이는 애도에 실패하는가. 어떤 현상의 결과에 값하는 이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종류의 인식의 매커니즘은 한 개인의 윤리적 결함에 의해서만 발생한 것인지 거듭 묻게 된다.

우리의 생애주기, 특히 앞으로 무사히 중장년이 돼 사회의 ‘어른’으로 성장할 청년의 생애주기에, 이 이상의 참사가 발생하지 않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동시에 이미 손쓸 수 없이 닥친 이 참사를 어떤 방식으로 애도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시민 윤리의 한 지점으로 고려하는 일에는, 뭐든 그에 ‘값하는’ 이유가 ‘설득’돼야만 합당하다는 종류의 여러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것 또한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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