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 한용단, 고려야구단으로 부활하다
인천 사람의 희망 '한용단' 창단 후 눈부신 활약
해방 이후 원점으로··· 1946년 조선야구협회 출범

인천투데이=박소영 기자│인천SSG랜더스의 홈구장은 인천 미추홀구 소재 인천SSG 랜더스필드, 광주KIA타이거즈의 홈구장은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 서울LG트윈스의 홈구장은 서울 잠실야구장이다. 이렇듯 프로야구팀은 본거지에 홈구장을 두고 있다.

인천 야구단 한용단의 홈구장은 웃터골 운동장(현재 제물포고등학교)였다. 한용단은 원정 시합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곳에서 경기를 벌였다. 이 홈구장에서 시합을 벌일 때면 웃터골은 인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웃터골은 단순한 운동 경기장이 아니었다. 식민지 민중들이 울분을 삭이는 공간이자 항일의식을 모으고 크게 분출하는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경기를 벌이는 한용단은 당시 인천 사람들의 희망이자, 우상이었다.

다음은 인천‧동산‧제물포고등학교 총동창회가 뜻을 합쳐 2005년 집필한 ‘인천야구 한 세기’를 정리한 내용이다.<기자 말>

1920년 개설된 인천 최초 종합경기장 '웃터골 운동장' 현재 제물포고 교정으로 쓰이고 있다.(사진출처 인천야구 한 세기)
1920년 개설된 인천 최초 종합경기장 '웃터골 운동장' 현재 제물포고 교정으로 쓰이고 있다.(사진출처 인천야구 한 세기)

인천 부민의 희망 '한용단' 창단 이후 눈부신 활약

한용단은 창단 이듬해인 1921년부터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본격적인 야구 시즌을 개막하기 전 1921년 4월 21일 웃터골 운동장에서 벌어진 인천실업야구단과 시합에서 한용단은 실업단을 5대 1로 물리쳤다. 오후 2시에는 ‘미가도’ 팀을 9대 6으로 제압하는 실력을 보였다.

한용단은 1921년 제2회 전조선야구대회 청년부에 출전했다. 천도교청년회와 시합에서 판정 시비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9대 8로 석패했는데 이게 전조선야구대회에 한용단의 처음이자 마지막 출전이었다.

인천 향토사가로 유명한 한옹 신태범(愼兌範, 1912~2001)박사가 전하는 말을 인용하면, 한용단이 나온다는 소문만 돌면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웃터골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째지는 목청으로 떠들어댔고 지게를 세워 놓고 구경을 하다가 생선을 썩혀 버린 장사치들도 허다했다.

1924년 억울한 심판 때문에 한용단이 우승을 놓쳤다고 흥분한 응원 군중들이 본부석으로 달려들어 충돌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삼연(三然) 곽상훈 한용단 단장과 청전(淸田)이라는 인천서 검도 사범의 실랑이가 발단이었다.

여러 사람이 경찰서로 연행된 후 간신히 진압됐으나 이 사건을 화근으로 야구대회는 중지됐다. 한용단은 이 사건의 여파로 해체됐다.

1928년 고려야구단. 동아일보 인천지국 앞에서 포즈를 잡고 있다. 가운데 나비 넥타이를 맨 사람이 삼연(三然) 곽상훈 단장.(사진출처 인천야구 한 세기)
1928년 고려야구단. 동아일보 인천지국 앞에서 포즈를 잡고 있다. 가운데 나비 넥타이를 맨 사람이 삼연(三然) 곽상훈 단장.(사진출처 인천야구 한 세기)

한용단, 고려야구단으로 부활하다

그 후 야구를 좋아하는 요코다 카쓰미(横田克己)라는 일본인 부윤(府尹, 일제시대 행정체계인 인천부의 우두머리)가 부임해 1926년 웃터골 운동장을 확장‧정비했다. 이후 인천체육회가 주관해 야구대회를 다시 열었다.

그러나 주최 측이 ‘민족 분규’를 일으킨 ‘한용단’이라는 명칭으로는 더 이상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웠다. 한용단은 ‘고려야구단(高麗野球團)’으로 개명해 대회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한용단의 맥을 그대로 이은 고려야구단의 멤버는 이수봉(李壽奉), 지성룡(池成龍), 김태봉(金泰奉), 장귀남(張貴男), 박칠복(朴七福), 김수영(金壽永), 황창성(黃昌成), 김영길(金永吉), 강세희(姜世熙), 윤삼룡(尹三龍), 이재순(李在淳)과 그 외 안경석, 김덕수, 최정석 씨 등이다. 단장은 그대로 곽상훈 씨가 맡았다.

재정을 후원하던 장인수(張仁秀) 씨와 <동아일보> 인천지국장 서병훈(徐丙薰) 씨는 숨은 공로자이다.

이들은 1927년부터 1931년 사이 세 차례나 우승을 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일제가 전시 체제를 강화하면서 식민지 국민들은 강제징용‧근로동원‧공출 등에 시달렸다.

일제가 '영미귀축(英美鬼畜, 가축과 다를 바 없는 영국과 미국)의 운동‘이라며 야구를 매도하고 대회 개최까지 중지하는 지경에 이르자 야구는 쇠퇴일로를 걸었다. 결국 야구는 동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1945년 8월 15일 인천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해방의 감격을 누리고 있다.(사진출처 인천야구 한 세기)
1945년 8월 15일 인천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해방의 감격을 누리고 있다.(사진출처 인천야구 한 세기)

해방 이후··· 1946년 조선야구협회 출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계기로 한반도에서 일제도 힘을 잃었다.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다. 국권과 자유를 되찾은 순간 한민족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를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일제가 주도했던 조선체육계도 체육회의 재건은 물론, 각 경기 분야 일대 재건, 재편성의 시점에 서 있었다. 조선체육회는 해방과 더불어 가장 발 빠르게 움직였던 사회단체 중 하나였다.

1920년 7월 창립해 1938년 7월 강제 해산당하기까지 전 조선인의 우수성과 민족자주성을 은연중 과시하던 조선체육회는 해방을 맞이해 놀라운 에너지를 표출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지 불과 20일 만에 조선체육회(11대 회장 여운형)는 '민족 체육 재건'이란 대의(大意)를 내걸고 각계를 망라한 인사가 '조선 스포츠'를 위해 결집했다.

이상백, 장권, 이영민, 권태하, 정상윤, 이종구, 정상희, 임동수 등이 주동해 조선체육회 재건을 위한 전초 모임 '조선체육동지회'를 구성했다.

조선체육동지회를 구성한 인물 중에 조선야구의 대부 이영민,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을 비롯해 서상국, 손효준, 김영석, 민용규, 손희준, 이순재 등 다수의 야구인이 참가했다. 이후 조선야구협회도 대부분 이들의 주동 하에 결성됐다.

같은해 11월 26일 조선체육회는 종로 기독청년회관(현 YMCA회관)에서 몽양 여운형(呂運亨)을 제11대 조선체육회장으로 추대하고 공식 출범했다.

조선체육회가 출범하자 잇따라 산하경기 단체가 결성됐다. 야구협회는 위에 밝힌 인물들이 주축이 돼 다음 해인 1946년 3월 18일 오후 3시 을지로입구 식산은행(산업은행 전신) 회의실에서 정식 출범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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