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11)
[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11)
  • 인천투데이
  • 승인 2019.09.0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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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와 항일이 둘이 아니다
이수봉

[인천투데이] 1930년 3월 1일을 전후해 ‘3ㆍ1운동 11주년 기념을 맞아 전조선 민중에게 격함’이란 격문을 인천 시내에 뿌리고, 경성에서 우편으로 전국 노동ㆍ청년단체에 발송하려던 사건이 있었다. 이미 소개한 김점권과 이두옥이 관련된 사건이다. 이 사건에 가담해 체포된 이들 중에 26세 청년 한 명이 있다. 이수봉(李壽奉)이다.

1930년 2월 28일 서대문경찰서에서 촬영했다고 기재한 이수봉의 사진.
1930년 2월 28일 서대문경찰서에서 촬영했다고 기재한 이수봉의 사진.
매일신보 1926년 6월 10일 ‘결승전은 고려 대 전인상’ 기사.
매일신보 1926년 6월 10일 ‘결승전은 고려 대 전인상’ 기사.

이수봉 관련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가 모두 세 장 있는데, 이수봉은 1905년 2월 7일생으로 본적과 출생지는 인천부 외리(外里) 95번지, 주소는 인천부 화정(花町) 1정목(丁目) 20-19번지였다. 1931년 다른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재판을 받았을 때는 주소가 일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키는 160cm가량이고, 모친은 김씨이며 직업은 무직과 고물상이다.

이때 이수봉은 기소돼 1930년 9월 4일 징역 8개월 구형, 이틀 뒤인 9월 6일 구형대로 징역 8개월이 확정됐다. 미결수 신분의 구류기간 130일을 합쳐서 1930년 12월 27일 출소했다.

<조선중앙일보> 1934년 11월 12일, 영화보통학교 학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동창회에서 구성한 대책회의에 참석해 다른 학교 출신 인사의 동창회 참석 문제를 제기하고, 진상 보고 위원 5명 중 한 명이 된 것으로 보아 영화보통학교 출신이 틀림없다. 영화보통학교를 나온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 이길용이 이수봉과 같이 진상 보고 위원인 것도 그 이유다.

신태범 선생의 ‘인천 한 세기’에는 경인기차 통학생이 중심이 돼 조직한 인천 야구팀 ‘한용단’의 한 사람으로 배재학당에 다니던 이수봉을 꼽고 있어, 영화보통학교 졸업 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것으로 보인다.

이수봉의 행적에서 관심을 끄는 부분이 바로 야구다. 각종 신문 기사에서 확인되는 이수봉의 행적은 1920년대 중ㆍ후반과 1930년대 중ㆍ후반의 야구다. 둘 사이의 간격을 잇는 1930년 전후 약 5년간은 체포와 투옥을 반복한 항일투사였다. 혹여나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지만, 야구를 비롯한 체육계에서 활동한 동지들과 항일 투쟁 동지들이 크게 다르지 않아, 그 가능성은 적다.

1926년 5월 8일 <매일신보> 기사에는 조선인 유일의 야구팀 ‘고려단’과 일본인 야구 강팀 ‘미나토(港)’의 경기가 5월 9일 열릴 것이라 전하며 ‘고려단’의 진용을 특별히 보도했는데, 감독은 왕년에 ‘한용단’을 이끈 일제의 요시찰 인물 곽상훈(郭尙勳)이고, 이수봉은 외야수였다. 같은 신문 6월 10일 기사에는 결승전에 오른 ‘고려단’의 수비 위치를 구체적으로 전하는데, 이수봉은 라이트필더, 즉 우익수였다. 역시 같은 신문 1926년 10월 3일 기사에는 ‘고려단’과 ‘미나토’가 야구 대항전을 10월 4일 오후 3시에 연다며 ‘고려단’ 선수명단을 게재했는데, 이수봉은 6번 타자, 좌익수였다.

20대 초반의 이수봉은 일본인 야구팀과 대항하는 유일한 조선인 야구팀 ‘고려단’의 주전 선수로 활약했고, ‘당일의 격전은 관중으로 하여금 다대한 흥미를 끌 터인바’라는 기사 내용처럼 식민지 인천의 조선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음껏 환호하는 마당의 한가운데 서있었을 것이다.

<동아일보> 1929년 5월 2일 기사에 인천청년동맹에서 각반 대항 야구대회를 4월 28일 열었는데, 아침 일찍부터 몰려든 관중으로 광활한 운동장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뤄으며, 외리와 화평리의 공동 우승으로 끝났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인천에서 야구는 단순한 운동경기가 아니었다. 야구 선수 이수봉이 항일투사로 거듭나는 배경에 역시 인천청년동맹이 있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가 주요 단체와 구성원을 조사해 작성한 단체표에 따르면, 1934년에 이수봉은 이창식ㆍ심만택 등과 인천청년동맹 임원이었기 때문이다.

인천 격문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1930년 12월 27일 출소한 이수봉의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매일신보> 1931년 7월 29일 기사에는 ‘인천○○음모사건’ 관계자로 잠적한 사람을 잡기 위해 급히 일본 오사카로 출장 간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 2명이 7월 27일 오후에 용의자인 인천노동조합원 이수봉을 포박해 인천경찰서로 돌아왔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천○○음모사건’은 ‘만보산 사건’으로 인해 인천에서 벌어진 조선인과 중국인의 충돌을 일본인에 대한 습격으로 ‘전환’하려는 계획을 말한다. 실제 이런 계획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일제 경찰은 이를 명분으로 인천의 노동ㆍ청년 부문 관계자인 권문용ㆍ권평근ㆍ이창식ㆍ김성규ㆍ심경원 등 6명을 체포해 재판에 넘겼는데, 이수봉이 그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사건의 배후 인물로는 이승엽을 지목했다.

이수봉은 이 사건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아 1934년 3월 26일까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1905년생이니 20대 중ㆍ후반을 거의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기 시작하는 1930년대 중반에 이수봉의 나이도 서른을 넘었다.

1930년 9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이수봉 사진과 1931년 9월 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이수봉 사진.
1930년 9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이수봉 사진과 1931년 9월 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이수봉 사진.

<매일신보> 1935년 10월 9일 기사에 인천 조선인의 유일한 체육기관으로 ‘인천체육회’ 설립을 준비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수봉은 여기에 발기인이자 창립 준비위원으로 선임됐다. 이어서 1936년 1월 11일 인천공회당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이사이자 야구부장이 됐다. 이때 감사로 선임된 이가 이승엽이다. 같은 해 8월 1일부터 경성에서 열리는 전조선 도시대항 야구전에 참가할 인천팀을 구성하는 문제와 관련해 일본인의 ‘인천체육협회’에서 각 팀에서 우수한 선수를 뽑아 인천대표팀을 만들자고 하자, 팀별 리그전을 벌여 우승팀이 인천 대표로 출전해야한다고 맞섰다. 이때 감독으로 ‘애관’팀을 이끌던 이수봉은 끝내 협회의 주장이 관철되자 인천대표팀 구성에서 애관팀을 이끌고 탈퇴해 버린다.

이수봉에게 야구는 또 다른 항일의 수단이자 방법이 아니었을까. 한동안 사라졌던 이수봉의 행적은 1949년 3월 24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기도 인천조사부에 출석한 것으로 다시 드러난다. 당시 인천자유노조 수송부장으로 송월동 3가 16번지에 살고 있던 이수봉은 증인으로 출석해 인천 격문 사건으로 체포됐을 당시 친일 경찰 이중화 등에게 구타당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진술했다.

해방 후에까지 생존했으니, 그 후손도 분명 인천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이다. 문학야구장 1루 응원석에는 언제나 까만 바탕에 흰 글씨로 ‘구도인천(球都仁川)’이라 큼지막하게 쓴 깃발이 휘날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야구를 시작했고, 고교야구와 프로야구의 성적에 따라 웃고 울었던 인천 사람들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수봉의 후손이 ‘구도인천’의 깃발 아래 시구(始球)하는 장면은 그저 꿈에 불과한 것일까?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