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타국 견제 우려해 조심스럽게 접근
프랑스, 조선보다 동남아시아 식민지 집중
미국, 일본 협력 바탕으로 조선 개방 노려

인천투데이=이형우 기자 l 1871년 6월 10일. 강화도에서 조선과 미국 간 첫 공식 만남이자 전쟁인 신미양요가 시작됐다.

신미양요는 겉으로 보면 조선과 미국의 전쟁이지만 큰 틀에서 보면 제국주의를 상대한 동아시아의 투쟁이었다.

인천문화재단은 신미양요 150주년을 맞아 지난 12일 유튜브 채널 ‘인천문화재단IFAC’에서 ‘19세기 국제 정세와 신미양요’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이날 발표자 5명은 신미양요와 관련한 제국주의 국가의 19세기 상황을 설명한다. 국제 정세를 보며 다양한 시각으로 신미양요를 해석했다. 아래는 학술대회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ㆍ[관련기사] [신미양요 150주년] 조선, 한반도 침범 미군 맞서 결사항전

조선 관리를 태운 범선. (사진제공 강화군·안양대)
조선 관리를 태운 범선. (사진제공 강화군·안양대)

제국주의 국가들의 동아시아 침략

영국은 1842년 1차 중영전쟁(아편전쟁)을 기점으로 동아시아 패권을 다른 국가보다 먼저 장악했다. 정치·군사력으로 청나라를 제압하고 자유무역체제를 갖췄다.

1865년 영국 상인 모리슨(Morrison)은 조선 서해안에서 교역을 요구하다 거부당해 청나라로 돌아갔다.

모리슨은 이때 '조선 정부는 서양인과 교역은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인들은 중국 상인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밀거래하고 있어 교류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주청 영국공사 웨이드(Wade)는 모리슨의 보고를 받고 조선과 통상 관계로 나갈 방법을 고심했다. 웨이드는 조선 개항을 위해 첫 단계로 조선 서해안 측량을 먼저 추진했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식민지화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 개방에 집중했다.

영국도 식민지와 청을 적극적으로 점령하려한 것과 달리 조선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타 열강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조선과 관련한 이권을 균점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당장 조선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양 열강들은 점차 아시아 내 식민지 또는 교류국가에 자리 잡으며 조선으로 눈길을 돌렸다.

미국 모노카시호. ​(사진제공 강화군·안양대)
미국 모노카시호. ​(사진제공 강화군·안양대)

제너럴 셔먼호, 대동강 침범하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기 전 조선은 자국에 표류한 서양인을 대접했다. 조선은 먼 곳에서 온 사람을 대접해야 한다는 관례가 있었다.

셔먼호 사건 두달 전 1866년 5월, 난파된 미국 배 선원들이 자신들을 구해준 조선에 인도적 구호 조치에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 기록도 있다.

조선은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침범했을 때 호의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적대적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조선은 셔먼호 선원들을 대접했지만 통상과 개방 요구는 거절했다.

협상이 잘 풀리지 않자 셔먼호 선원들은 약탈과 납치 행위를 했다. 조선은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를 앞세워 셔먼호를 불태워버렸다.

사건 조사 과정에서 미국과 영국은 셔먼호가 많은 무기를 싣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셔먼호가 1866년 10월 프랑스 침략(병인양요)에 직면한 조선에 무기를 팔기 위해 조선을 향했다는 것이다.

즉, 셔먼호는 민간 상선이었다. 무기를 팔려고 왔다가 일이 안풀리자 행패를 부렸고 끝내 불타버렸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마치고 수습하던 시기로 민간 상선 한척이 실종된 것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켰을 때 조선인 천주교 신자에게 셔먼호 사건을 들었고 이후 소식을 접한 미국이 조사를 시작해 사건을 알게 됐다.

미국이 두차례 걸쳐 조사했는데 상반된 결과 보고서가 나왔다. 셔먼호가 행패를 부리고 선제공격을 했다는 보고서와 조선의 선제 공격으로 정당방위였다는 보고서다.

미국은 후자를 택하고 조선을 개방할 명분으로 활용하기로 한다.

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 (사진제공 강화군)
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 (사진제공 강화군)

두번째 조선 침략, 프랑스 

영국은 조선과 국가 간 공식 통상관계를 수립하길 원했다. 하지만 셔먼호 사건과 더불어 병인양요로 영국의 계획은 무산됐다.

조선은 천주교 신자들과 프랑스 신부를 탄압했고 프랑스는 이를 보복하기 위해 함대 출병계획을 세웠다.

조선은 프랑스 출병 계획을 듣고 전쟁 준비를 했다. 조선은 서양인을 처벌하진 않았지만 서양인과 내통하는 자국민들을 엄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셔먼호가 무기거래에 실패한 이유다.

조선은 청과 일본이 서양 열강에게 패배한 소식을 바탕으로 전쟁을 준비했다. 조선은 이야기만 듣고 서양 함대와 전투를 준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프랑스는 1866년 조선 서해안에서 서울로 흐르는 강과 통로를 봉쇄하고 강화도를 점령했다. 최신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는 방심한 사이 조선의 반격으로 철수하긴 했지만 외규장각 문서 등 서적과 문화재, 무기 등을 약탈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 정부는 더 단호하게 통상을 거부하고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민간인들도 서양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다. 특히 밀수·밀매 거래량도 떨어졌다.

조선 홍삼은 당시 서양인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청나라 기록을 보면 조선 홍삼 수입량이 30배 가까이 떨어졌다고 나와 있다.

한편, 2년 뒤인 1868년 독일의 오페르트 도굴사건으로 서양에 대한 인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 요구를 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조선은 일련의 사건으로 서양을 배척하고 문호를 굳게 잠궜다.

일본 나가사키항에 정박한 미국 함대(콜로라도호, 알래스카호, 베니시아호, 모노카시호, 팔로스호). (사진제공 강화군·안양대)
일본 나가사키항에 정박한 미국 함대(콜로라도호, 알래스카호, 베니시아호, 모노카시호, 팔로스호). (사진제공 강화군·안양대)

미국, 강화도 점령... 영국과 합동공격은 무산

주청 미국공사 로우(Low)는 셔먼호 손해배상을 조선에게 청구하고 조선을 개방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로우는 청을 이용하려 했으나 청은 조선이 독립국이라며 나서지 않았다.

결국 로우는 영국과 함께 함대를 파견하자고 제안했고 영국공사 웨이드는 이를 승낙했다.

자칫 조선과 영·미 연합군의 전쟁이 될 뻔 했지만 영국 컬렛(Keellet) 제독이 영 해군 지시를 받은 게 아니라며 작전을 거부했고 합동 작전은 무산됐다.

미국은 일본을 기반으로 신미양요를 준비했다. 일본은 신미양요 당시 미국함대가 출발하기 전 주일 미국공사 드롱(De Long)에게 함대 파견 소식을 듣고 수시로 전개 상황을 공유했다.

또 전쟁이 끝난 뒤 신미양요에 참전한 모노카시호 함장 맥크리어(Mc Crea)는 당시 노획한 무기와 지도를 일본사절단에게 보여줬다.

이처럼 일본과 미국은 조선을 개방하려는 목적이 같았다. 또 두 나라는 공식적 외교관계로 서로 도왔다. 다만 일본은 미국과 공모한다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 주의했다.

미국은 군함 5척과 병사 1200명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범했다. 미군은 사망자 3명, 부상자 10명을 낸 데 반해 조선군은 사망자 350명, 부상자 20명을 기록했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을 고수했지만 12년 뒤 1883년 결국 일본과 서양 열강들에게 강제로 문호를 개방했다.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과 불평등 조약이 체결됐다.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노림수에 국내 정치의 혼란까지 더해져 식민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