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주년 인천 5.3민주항쟁, 민주화운동 포함부터 ③
[인터뷰] 시민단체로 참여한 이우재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

인천투데이=장호영 기자│

1986년 5월 3일 인천 미추홀구 소재 인천시민회관(현 주안쉼터공원)에서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인천 5.3민주항쟁은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룬 1987년 6월 항쟁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3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에서 인정하는 민주화운동에 포함되지 않고 있다. 인천의 시민사회단체들과 정치권은 민주화운동에 포함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지난해 6월 윤관석(더불어민주당, 남동구을) 국회의원도 인천 5.3 민주항쟁을 민주화운동에 포함하는 내용이 담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계류 중이다. <인천투데이>는 5.3 민주항쟁 배경과 의의, 당시 참가자 인터뷰, 민주화운동 포함 당위성 등을 정리하고자 한다.<편집자주>

인사련 집행국장으로 인천 5.3민주항쟁 참여

이우재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
이우재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

이우재(64, 사진)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은 인천 5.3민주항쟁 당시 시민단체 간부로 참여했다. 이 이사장은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 집행국장이었다. 인사연은 문익환 목사와 백기완 선생 등이 결성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지역 산하 조직이다.

1983년 12월 학원자율화 조치 후 전두환 정권이 유화조치를 취하자 그동안 분산됐던 재야세력들은 역량 결집을 위해 협의체 건설을 추진했다. 그렇게 1984년 6월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 결성됐고, 같은해 10월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가 생겼다.

1985년 2월 총선 이후 신한민주당(신민당)이 강력한 야당으로 부상하자, 이에 상응하는 강력한 재야세력 통합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높아졌고 같은해 3월 민민협과 국민회의가 통합하며 민통련이 탄생했다. 향후 민통련은 청년단체와 노동단체, 개신교 운동단체 등이 참여하며 폭넓게 계층·부문·지역을 망라하는 운동 연합체로 성장했다.

민통련은 신민당이 1985년 3월부터 추진한 직선제 개헌운동과 연대해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신민당이 국내 주요 대도시에서 개헌추진위원회 지부 결성대회와 현판식을 진행하면 민통련은 공식행사가 끝난 후 지역조직 주도로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그런데 신민당이 인천대회 전 다른 지역에서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 구호가 나온 뒤 재야세력을 과격 집단으로 규정하고 급진 세력 단절을 선언했다. 재야세력 사이에선 신민당이 전두환 군부정권과 야합한다고 판단하고 신민당을 응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커졌다.

이 이사장은 1986년 5월 3일 날씨가 매우 더웠던 것으로 기억했다.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시민회관 일대는 평온했다. 하지만 주변을 살피는 사복경찰들로 긴장감은 감돌았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 시민회관 건너편 주안1동 성당에서 현수막을 든 인사연과 민통련 주축의 시위대가 나타나며 긴장감이 깨졌다.

애초 인사연은 민통련과 시민회관 앞 사거리를 점거한 뒤 신민당 행사와 별개로 국민대회를 열어 직선제 개헌이 관철될 때까지 철야농성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인사연 시위대가 나오자 시위에 동참하기 위해 수도권 곳곳에서 모인 학생·노동자·시민들이 모였고 각자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담긴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 이사장은 “인사련에는 당시 학생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많이 함께 했다”며 “5.3항쟁 당시에는 인사련 간부로 실무적인 것을 총괄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또한 “1980년 광주시민들이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미국의 묵인 하에 군인들로부터 총을 맞았다는 사실은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며 “민주화운동에 나서려면 총을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가 있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수도권 일대 재야세력 총 집중··· 다양한 목소리 나온 5.3항쟁

인천 5.3민주항쟁 당시 시위 상황도.(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천 5.3민주항쟁 당시 시위 상황도.(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5.3항쟁에는 수도권 일대 재야세력이 모두 모였다. 그룹별로 나눠져 시위를 진행하는 방식이었기에 통일된 대오가 형성되지는 않았다. 이 이사장은 “이날 5.3항쟁에 참여하지 않은 운동가는 감옥에 간 사람 밖에 없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인사연과 민통련은 시민회관 앞 사거리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죄하라’ ‘저임금, 실업 강요하는 재벌정권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인천지역노동자연맹과 서울노동운동연합은 신민당의 개헌 생색을 믿지 말자고 주장하며, ‘노동자 농민 피땀 짜는 미국놈을 몰아내자’ ‘노동자가 주인되는 삼민(민족·민중·민주) 헌법 쟁취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인천과 서울지역 대학생들은 4월 28일 ‘반전반핵 양키고홈, 미제국주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치고 분신한 김세진·이재호 열사의 죽음을 두고 미제국주의와 전두환 정권은 물러나라고 주장하며 곳곳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이 이사장은 “다양한 목소리가 나와 통일된 대오를 형성하지 못하는 모습이기는 했지만 군부독재를 타도해야 한다는 공통의 목표는 있었다”며 “지금은 선거를 통해 정권을 바꿀 수 있지만 그때는 거리에서 투쟁을 벌이는 것만이 군부독재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직선제를 하더라도 선거 제도만으로 개혁이 이뤄지는 것은 민주적인 제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사회 전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민주헌법을 쟁취해야한다고 주장했던 걸로 기억한다”며 “광주에서 그렇게 많은 희생이 있었는데 단순히 직선제 쟁취만으로는 민주화된 사회를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라고 전했다.

5시 경찰 진압 시작, 30분 만에 해산돼

대회 개최 예정이던 오후 2시가 되기 전 이미 시민회관 앞 사거리는 시위대와 최루탄 연기로 가득 차 신민당 현판식 대회는 진행이 불가능했다. 경찰은 시위대가 바깥으로 진출하려는 행위를 할 때만 최루탄을 쏘며 진압하고 시민들의 진입을 통제하지는 않았다.

오후 1시께 주안사거리에 있던 민정당 지구당사에서 검은 연기와 화염이 치솟았고, 길거리에는 최루탄 분말과 깨진 보도블럭, 유인물이 가득 깔려 있었다. 신민당 지도부는 시위대의 위세와 최루탄으로 시민회관에 들어갈 수 없었고 현판식 대회는 무산됐다.

오후 5시께 경찰의 진압이 시작됐다. 그동안 수수방관하던 모습과 달리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하며 곤봉을 휘둘러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연행됐다. 강제 해산된 시위대는 제물포역과 동인천역 일대에서 오후 늦게까지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 이사장은 애초 철야농성을 벌이다 잡혀간다는 각오였지만, 경찰의 폭력 진압을 피해 시위 현장을 벗어날 수 밖에 없었다.

5.3항쟁으로 2년 가까이 수배생활, 소요죄로 구속
“6월 항쟁을 이끌어낸 투쟁, 정당한 평가받아야”

인천 5.3민주항쟁 이후 중구 답동성당에 모여 정권의 폭력 탄압을 규탄하며 가두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들.(자료출처 인천민주화운동센터)
인천 5.3민주항쟁 이후 중구 답동성당에 모여 정권의 폭력 탄압을 규탄하며 가두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들.(자료출처 인천민주화운동센터)

전두환 군사정권은 민주화 열기에 밀린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해 이날 시위에 나온 일부 시위대의 ‘반미 주장’ 등을 문제삼아 좌경폭력세력에 의한 체제 전복 기도로 규정하고 가혹한 탄압을 시작했다.

검찰은 형법 115조 소요죄를 적용해 시위에 참여했다가 연행된 129명을 구속했고 60여 명을 지명수배했다. 소요죄는 일제시대 독립운동 탄압을 위해 널리 사용한 법으로, 이후 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하는 데 주로 쓰였다.

소요죄는 다중이 모여 폭행·협박·손괴의 행위를 하면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또는 1500만 원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이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상 같은 행위를 했을 경우 1년 이하 징역이나 100만 원 이하 벌금 규정에 비해 형량과 벌금이 훨씬 높다. 집회나 시위 참가자들에게 소요죄를 적용한 것은 5.3항쟁이 마지막이다.

이 이사장도 당시 지명수배자에 포함됐다. 수배생활을 하며 1987년 6월 항쟁과 6.29선언을 맞이했다. 하지만 수배는 풀리지 않았고 2년 가까이 수배자로 살아야 했다. 그러다 1988년 3월 경찰의 검문에 붙잡혀 구속됐고 1심에서 집행유예형을 받고 풀려났다.

이 이사장은 “5.3항쟁은 재야세력 중심의 투쟁이 아닌 국민대중과 함께 해야 승리를 할 수 있다는 시사점을 남겨준 투쟁이었다”며 “1980년 광주항쟁에서 1987년 6월항쟁을 향하는 중간의 허리역할을 한 최대 사건으로, 직선제 개헌 쟁취의 도화선이 됐고, 재야세력 내부의 반성 뒤 국민과 결합하는 물결을 만들게 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6월 항쟁을 이끌어낸 투쟁이기에 반드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며 “그 시작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에 포함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참고 자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발간 ‘다시보는 5.3 인천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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