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주년 인천 5.3민주항쟁, 민주화운동 포함부터 ①

인천투데이=장호영 기자│

1986년 5월 3일 인천 미추홀구 소재 인천시민회관(현 주안쉼터공원)에서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인천 5.3민주항쟁은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룬 1987년 6월 항쟁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3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에서 인정하는 민주화운동에 포함되지 않고 있다. 인천의 시민사회단체들과 정치권은 민주화운동에 포함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지난해 6월 윤관석(더불어민주당, 남동구을) 국회의원도 인천 5.3 민주항쟁을 민주화운동에 포함하는 내용이 담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계류 중이다. <인천투데이>는 5.3 민주항쟁 배경과 의의, 당시 참가자 인터뷰, 민주화운동 포함 당위성 등을 정리하고자 한다.<편집자주>

5.3 민주항쟁 전 인천의 민주화운동과 노동자 투쟁

1986년 5월 3일 옛 인천시민회관 사거리에 몰려든 시위 인파.
1986년 5월 3일 옛 인천시민회관 사거리에 몰려든 시위 인파.

인천에선 시민들과 민주화운동세력들이 해방 후 지속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전개해왔다.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1960년 4.19 혁명, 카톨릭노동청년회와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이 있었다.

4.19 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 선거에 항의하며 민주적 절차로 정권 교체를 요구하며 국내 곳곳에서 학생들이 중심이 된 민주주의혁명이다. 당시 인천에선 현재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이 먼저 횃불을 들었다. 이들을 기리는 ‘4.19학생의거기념탑’이 1961년 6월 인천기계공고에 세워져 지금도 기리고 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때는 인천 종교계의 민주화운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긴급 조치 철폐 운동이 계속됐다. 1980년대 신군부체제가 강화되고 난 뒤에는 비상계엄 하의 저항,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독재 투쟁이 산발적으로 있었고 1986년 5월 3일,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인천 5.3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인천은 대표적인 산업도시로 1980년대 당시 인구의 30% 이상이 노동자였던 노동자의 도시이기도 했다. 1970년대 동일방직과 반도상사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이 축적돼있었고 카톨릭노동청년회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등의 활동 성과로 노동자 권리 의식도 높아 있었다.

1984년부터 인천을 포함한 수도권 지역에서 대량해고 사태가 발생하자 노동자들은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와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인천지역협의회, 인천지역노동3권쟁취위원회 등을 결성해 지역 내에서 연대 투쟁을 전개했다. 같은해 11월 인천지역 학생운동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이 결성되기도 했다.

1986년 2월에는 노동자들이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을 결성해 지역 내 연대투쟁을 선도했고 서울노동운동연합과 공조하며 노동운동 연대를 모색했다.

1986년 인천 5.3 민주항쟁의 배경

1986년 인천 5.3민주항쟁 당시 인천시민회관 앞에 모인 시민들.(사진출처 인천민주화운동센터)
1986년 인천 5.3민주항쟁 당시 인천시민회관 앞에 모인 시민들.(사진출처 인천민주화운동센터)

1985년 2월 총선에선 대통령 직선제를 공약으로 내건 야당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켰다. 이후 신민당은 김영삼·김대중이 주도하는 민주화추진협의회와 함께 전두환 신군부독재에 맞서 직선제 개헌을 위한 1000만 명 서명운동을 개신했다. 하지만 집권당인 민정당은 현행 헌법이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한 최선의 것이라 주장하며 아예 국회에서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신민당은 국회 밖에서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겠다며 3월 11일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대회’를 출발로 광주·부산·대구·대전·인천·마산·전주 등 국내 주요 대도시에서 개헌 현판식을 추진했다.

그런데 30만 명이 운집한 광주대회에서 ‘광주학살 책임자처벌’ 구호가 나왔고, 10만 명이 모인 대구대회에선 재야세력의 독자적인 현수막이 등장했으며 별도의 군중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에 신민당은 이런 목소리를 내는 재야세력을 과격한 집단으로 규정하고, 당시 신민당 총재는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좌익 학생들을 단호하게 다스려야 한다거나 급진 세력과 단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분개한 재야세력은 5월 3일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가 열리는 인천시민회관 앞에 결집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과 인사연, 인노련 등 단체 관계자들, 노동자·학생과 시민 등 5만여 명이 결집했다.

이들은 정오부터 오후 10시까지 시민회관 사거리를 중심으로 주안역·제물포역·동인천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며 ‘군부독재 퇴진’ ‘민주 헌법 제정’ 등 민주화 조치, 노동자·농민 등의 노동3권 보장과 생존권 보장을 요구했다.

6월 항쟁의 도화선, 5.3 민주항쟁

1986년 인천 5.3민주항쟁 당시 참가자들이 내건 구호 현수막들.(사진출처 인천민주화운동센터)
1986년 인천 5.3민주항쟁 당시 참가자들이 내건 구호 현수막들.(사진출처 인천민주화운동센터)

이날 시민회관 앞 사거리는 신민당의 대회가 시작되는 오후 2시 전부터 노동자·학생·시민들로 가득찼다. 시위대와 최루탄 연기로 가득 차 대회는 무산됐다.

그런데 전두환 군사정권은 민주화 열기에 밀린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해 이날 시위에 나온 일부 시위대의 ‘반미 주장’ 등을 문제삼고 좌경폭력세력에 의한 체제 전복 기도로 규정한 뒤 가혹한 탄압을 자행했다.

검찰은 형법 115조 소요죄를 적용해 129명을 구속하고 60여 명을 지명수배했다. 재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으로 구속·수배·고문 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무리한 탄압으로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는 전국민적 분노와 저항을 일으키며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져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직선제 개헌을 성취하는 성과를 거뒀다.

*인천민주화운동센터가 관련 자료와 사진 등을 제공하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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