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 천혜의 요새 삼랑성과 전등사 (4)

전등사 대웅보전.
전등사 대웅보전.

조선 중기 대표적 건축물인 전등사 대웅보전

어떤 대상을 극도로 존경하면 한편으로는 스스로 위축돼 두려움도 생기게 마련이다. 이를 외경심(畏敬心)이라 한다. 외경심을 가진 대상을 만나면 자연스레 자신을 숙이고 대상을 우러러 보게 된다. 전등사 대조루 밑을 통과하며 대웅보전을 보는 심정이 바로 그렇다. 계단 위 정면으로 고개를 들고 우러러볼 수 있게 절묘한 자리에 현세불인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보전이 위치하고 있다.

대웅보전이 만들어진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1266년(원종 7)에 중건됐다는 ‘전등본말사지’의 기록으로 보아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1614년(광해군 6)에 불에 모두 타버려 1621년에 새로 지었고, 그 후에 여러 번 중수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규모가 큰 건축물은 아니지만, 건물 외부와 내부가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전등사 대조루 밑에서 바라본 대웅보전.
전등사 대조루 밑에서 바라본 대웅보전.
대웅보전 측면 모습. 정면에 비해 날렵한 기단과 배흘림기둥, 팔작지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대웅보전 측면 모습. 정면에 비해 날렵한 기단과 배흘림기둥, 팔작지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대웅보전의 기단과 기둥

대웅보전 기단 형태는 장방형으로 돼있는데, 산지의 경사를 이용해 건물을 지었기에 앞에서 뒤로 갈수록 기단의 높이가 낮아지며 수평을 맞추고 있다. 기단 정면은 매우 큰 자연석 몇 개를 그대로 맞춰놓아 육중한 느낌을 준다. 이에 비해 측면은 가로로 얇은 자연석으로 허튼층쌓기를 해서 날렵한 느낌이 들게 했다.

계단은 원래 기단 정면 왼쪽과 오른쪽, 두 곳으로 올라가게 돼있었는데 기단 왼쪽은 허물고 기단 바깥으로 계단을 만들었다. 그래서 기단 왼쪽은 정면의 큰 자연석들과 어울리지 않게 작은 돌들로 쌓여있다. 정면 가운데 장대석으로 쌓은 넓은 계단은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에 없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이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깔끔하게 깎아 자연스럽게 쌓은 기단석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기단 상단부는 검은색의 방전(方甎, 네모난 벽돌)을 깔아 마감했다.

주춧돌(초석)은 모두 자연석을 사용했는데 건물 네 모서리에 있는 것들이 대체적으로 나머지 주춧돌보다 큰 편이다. 자연석 주춧돌은 윗면이 고르지 않고 울퉁불퉁해 위에 올리는 기둥밑동을 돌에 맞춰 깎는 ‘그렝이질’ 기법을 사용했다.

그렝이질을 한 기둥과 기단 상단부의 검은색 방전.
그렝이질을 한 기둥과 기단 상단부의 검은색 방전.

자연석 초석(막돌초석) 위에 올린 배흘림기둥은 기둥 밑에서 3분의 1이 되는 곳의 지름이 가장 크며, 밑동 지름은 기둥머리보다 크다. 마치 항아리를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인데 정면 기둥에는 주련(柱聯, 시구나 문장을 종이나 판자에 새겨 기둥에 걸어둔 것)을 걸어 측면에서 기둥의 모양을 살피는 것이 좋다. 배흘림기둥은 거대한 지붕의 무게를 안정적이고 탄력적으로 받치고 있어 지붕이 내리누르는 느낌을 없애주는 효과가 있다.

건물 네 귀퉁이에 서있는 귀기둥(우주, 隅柱)은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했다. 이 기법들은 착시를 교정해줘 건물 전체의 균형을 잡아 안정적으로 보이게 한다. 귀솟음은 건물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중앙에 있는 기둥보다 좌우 모서리로 갈수록 기둥의 높이를 조금씩 높여 지붕면이 하단으로 쳐져 보이지 않게 한 기법이다. 안쏠림은 오금법이라고도 하는데 기둥머리를 건물 안쪽으로 약간씩 기울여 건물이 바깥쪽으로 벌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바로잡는 방법이다. 이 두 방법은 매우 정교한 것이어서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데 귀솟음은 눈으로 쉽게 살펴볼 수 있으나 안쏠림은 기울이는 각도가 크지 않아 시각적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대웅보전 가구 명칭.
대웅보전 가구 명칭.

대웅보전 공포(栱包)와 창호, 지붕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면 이를 기둥머리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건축부재가 필요한데 이를 창방(昌防)이라고 한다. 이는 공포를 거쳐 전달되는 지붕 하중을 받아 버티며 기둥으로 하중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평방(平防)은 다포계 건축에서 창방 위에 설치해 공포를 직접 받고 있는 부재이다. 대웅보전은 다포계 건축이기에 창방과 평방을 모두 갖추고 있다.

공포는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춰 댄 나무들을 일컫는다. 건물 지붕의 무게를 분산해 구조적으로 안전하게 하며, 건물의 높이를 높여주고 처마를 더 길게 뽑을 수 있게 해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장식적인 면에서는 그 구성과 공작이 섬세하고 화려해 건물의 격식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공포의 종류는 보통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리는 주심포(柱心包)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올리는 다포(多包), 주심포 양식을 간략화한 것으로 새 날개 모양의 부재를 끼운 익공(翼工) 양식이 있다. 대웅보전은 다포양식인데 바깥은 2출목, 안쪽은 4출목을 사용해 내부 공간을 더 확장했다.

백자연봉.
백자연봉.

공포와 공포 사이에는 좌불 형상의 불상을 그려 넣었다. 창방의 양끝 좌우에 빠져나온 구름과 같은 조각 부분에는 연꽃봉오리를 새겼고, 대웅보전 현판 좌우로 도리(道里, 서까래를 받는 기다란 나무로 원형인 굴도리와 방형인 납도리가 있다)를 받치는 장혀에는 귀면과 용을 새기는 등, 장식적 요소를 증가시켰다.

대웅보전의 창호는 정면 3개소, 우측면 1개소, 좌측면 2개소, 뒷면 2개소가 설치돼있다. 이 창호들 중 빗살문(살대를 45°와 135°로 짜 맞춘 창호)의 문짝을 보면 정면에는 칸마다 세 쪽의 문인 삼분합문을 달아, 들어 올려 걸쇠에 걸 수 있게 만들었다. 고온다습한 여름을 이겨내는 선조들의 지혜가 반영된 것이다. 좌측면과 우측면은 외여닫이로, 뒷면은 이분합 쌍여닫이로 구성됐다. 나머지 좌측면 뒤와 뒷면 서쪽의 문은 문틀을 짜고 널판을 댄 우리판문을 달았다.

지붕의 뼈대를 이루는 서까래는 부연을 달아 보통 격이 높은 건물에 사용하는 겹처마 형태를 보인다. 지붕 역시 대웅보전의 격에 맞게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처마 선을 보면 양쪽 처마 끝을 들어 올려 완만한 곡선을 이루게 했는데 부드러움보다는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처마 끝에 올린 기와는 빗물이 나무 부재에 흘러드는 것을 막기 위해 막새기와로 마감했다. 수막새 위에는 하얀 연꽃봉오리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이를 백자연봉이라 한다. 많은 사람이 이를 보고 혹시 피뢰침을 올린 것 아니냐고 묻는다. 백자연봉은 막새기와가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못(와정)을 박아 고정하는데, 못의 부식을 막기 위해 백자연봉으로 덮은 것이다. 주로 사찰의 대웅전에 사용하는데 실용적인 기능 외에도 법당을 연꽃으로 장식한다는 종교적 의미도 갖고 있다.

대웅보전 나부상. 왼쪽부터 정면 동쪽, 뒷면 동쪽, 정면 서쪽, 뒷면 서쪽.
대웅보전 나부상. 왼쪽부터 정면 동쪽, 뒷면 동쪽, 정면 서쪽, 뒷면 서쪽.

대웅보전을 떠받치고 있는 조각상은 나부상(裸婦像)인가?

대웅보전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귀기둥의 귀포(네 모퉁이에 있는 공포) 위에 있는 나부상이다. 마치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장식적인 기능만 한다. 정면 동쪽 앞과 뒤의 나부상은 왼손과 오른손 하나씩 들어 처마를 받치는 모습이고, 정면 서쪽 앞과 뒤의 나부상은 둘 다 양손을 들어 받치는 모습이다. 여기에는 구슬픈 전설이 있다.

옛 전등사 법당을 지은 목수는 세상에 이름난 도편수(집을 지을 때 총책임을 맡는, 목수의 우두머리)였다. 고향을 멀리 떠나온 그는 대웅보전 공사 중에 절 아래 마을 주막을 드나들다 주모와 눈이 맞았다. 그는 공사가 끝나면 주모와 살림을 차릴 생각에 공사 노임을 모두 여인에게 맡겼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공사가 끝나갈 무렵 주모는 달아나버렸다. 이에 목수는 그 주모를 닮은 여인상 네 개를 조각해 법당 추녀 끝 네 귀에 앉혀 무거운 법당 지붕을 떠받치게 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을 처음 들었을 때 도편수의 저주도 무시무시하지만 이런 파격을 받아들인 주지스님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이 나부상이 동자상 혹은 인도의 야차(夜叉)에서 유래한 불법수호신이라는 연구가 있다.

‘조선고적도보’에 황해도 황주군 구락면(현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에 위치한 심원사 보광전에 전등사 나부상처럼 한 손을 들고 처마를 받치고 있는 조각상 사진이 있다. 처마를 받치고 있는 조각상을 귀포에 올리는 방식이 법당을 짓는 양식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이를 모른 호사가들이 벌거벗은 나부상으로 보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아닐까?

황해도 황주군 구락면 심원사의 보광전.(사진출처 조선고적도보)
황해도 황주군 구락면 심원사의 보광전.(사진출처 조선고적도보)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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