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천혜의 요새 삼랑성과 전등사②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ㅣ

 

노승나무(왼쪽)와 동자승나무.
노승나무(왼쪽)와 동자승나무.

전등사 노승나무와 동자승나무 이야기

삼랑성 역사가 깊듯이 이곳을 수백 년간 지켜온 나무도 많다. 나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곳에서 일어난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텐데, 아쉽게도 아무 말이 없다. 다만 700여 년과 350여 년 된 은행나무만 과거를 들려준다.

전등사 마당에는 두 은행나무가 있는데 노승나무와 동자승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암컷, 수컷이라 해서 애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정성을 드리기도 하는데, 이 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는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나무들은 전통차를 파는 죽림다원 아래쪽에 있다. 바로 아래에 있는 나무가 350여 년 된 동자승나무, 그 아래 있는 나무가 700여 년 된 노승나무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전통찻집 죽림다원.
전통찻집 죽림다원.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는 탄압을 받았다. 유생이나 관원들이 마음만 먹으면 탄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승려들은 성곽을 쌓거나 다리를 놓는 일에 사역을 나가는 등 노예처럼 부림을 당했고, 사찰에서는 특산물을 공물로 바쳐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등사에 관가 사람들이 찾아와 아주 어려운 요구를 했다. 은행나무에 열매가 열릴 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열릴 수 있는 은행 열 가마니를 가져갔는데, 이번에는 스무 가마니를 요구했다. 동자승이 이 사실을 노승에게 알렸다. 노승은 동자승에게 그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백련사의 도술이 뛰어난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얼마 후 도착한 추송 스님은 은행나무가 더 열리게 하는 3일 기도를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모이고 관리들도 찾아왔다. 한 관리가 그게 가능하겠냐고 비아냥거리자 그의 눈이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부었다.

드디어 3일 기도의 마지막 날, 추송 스님은 염불을 멈추고 축원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축원 내용은 나무 열매를 맺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뜻밖의 축원에 모인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원이 끝나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며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 노승, 동자승 모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은행나무는 은행을 맺지 않았고, 전등사는 관가의 탄압에서 벗어났다. 이런 연후로 은행나무들은 노승나무와 동자승나무로 불렸다.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설화가 흥미와 교훈을 주기 위한 구연예술이라고 할 때 이 이야기는 설화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 탐관오리나 조세의 불합리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진무중군 이용의 영세불망비.
진무중군 이용의 영세불망비.

삼랑성 안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느티나무

은행나무 앞 길가 큰 바위 위에 비석이 하나 있다. ‘진무중군이공용의애휼승도영세불망비(鎭撫中軍李公容儀愛恤僧徒永世不忘碑)’이다. 진무(鎭撫)는 진무사(鎭撫使)의 준말로 강화도 진무영(鎭撫營)의 으뜸 벼슬을 말하는 것이고, 중군(中軍)은 종2품 무관직으로 각 군영(軍營)의 대장을 의미한다. 진무중군인 이용의가 승려들을 구휼한 것을 영원히 잊지 말자며 이 비를 세웠다.

비의 뒷면에 ‘동치칠년무진십이월 립(同治七年戊辰十二月 立)’이라 썼는데, 동치(同治)는 청나라 연호로 고종 5년(1868) 12월에 세웠다는 뜻이다. 병인양요(1866) 2년 후다. 전등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이용의가 정족산성을 수리했다. 아마도 병인양요 때 훼손된 삼랑성을 보수하는 것이 전등사를 지키는 방편이라 생각했으리라.

비의 앞면에 이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적혀있다. ‘저서루노 영보불우 용귀지공 비아청상(儲胥樓櫓 永保佛宇 傭鬼之工 庇我淸象)’. 저서(儲胥)는 군중(軍中)에 설치돼 적(敵)을 막는 데 쓰이는 울타리이고, 누로(樓櫓)는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성 위에 설치한 지붕이 없는 전망대 또는 망루를 의미한다. 해석하면 ‘삼랑성 망루를 수리한 것은 불당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고, 넋을 고용한 공사로 나의 청상을 덮는 것이라’이다.

이 비석 건너편에는 400여 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늠름한 자태를 자랑한다. 1614년(광해군 6년)에 전등사가 화재로 모두 타버려 이듬해 중창을 시작해 6년 만에 완료하고 상량식을 거행했다. 이 느티나무는 중창할 때 풍치목으로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등사를 중창할 때(1610년대) 풍치목으로 심은 느티나무.
전등사를 중창할 때(1610년대) 풍치목으로 심은 느티나무.

전등사(傳燈寺)의 유래와 배치

1942년에 편찬된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를 보면, 전등사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 그 이름을 진종사(眞宗寺)라 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전등사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그러나 당시 강화도는 백제의 영토였고, 백제가 불교를 공식 승인한 때가 384년인 것을 볼 때 강화도에 전등사가 세워지지는 않았다고 추정된다. 혹시 사찰의 격을 높이려는 후대의 윤색은 아닐는지. 그러나 1366년(공민왕 15년)에 제작된 향로에 ‘진종사’라는 절 이름이 나와, 단정적으로 부정할 수만은 없다.

‘고려사’에는 1259년(고종 46년)에 삼랑성 동쪽에 가궐(假闕)을 지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가궐이란 임금이 대궐 밖으로 멀리 떠났을 때 머물던 임시 궁궐을 말한다. 이런 관계로 고려 왕실은 1266년에 진종사를 크게 중창했으며,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인기(印奇) 스님에게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고 옥등을 시주했다. 이를 계기로 ‘진종사’에서 ‘전등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재 전등사 가람 배치도.
현재 전등사 가람 배치도.

불가에선 등불을 진리에 비유한다. 그 이유는, 진리는 어두운 곳을 환히 비추는 등불처럼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지혜롭게 하기 때문이다. 전등(傳燈)이란 ‘진리,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승이 제자에게 서로 전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불가의 법맥(法脈)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일을 마치 등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에 비유한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전등사라는 이름은 정화궁주가 옥등을 건네줬기 때문에 붙은 것이라기보다는 인기 스님이 송나라에서 가져온 대장경 중 송나라 승려 도원이 역대 부처와 조사들의 어록과 행적을 모아 엮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근거가 더 있다. 이밖에도 전등사의 대조루를 중건할 때 시주에 동참해주기를 바라는 모연문(募緣文)에 ‘육조의 의발을 상수(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등사의 가람 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山地伽藍) 형태를 따랐다. 절 입구인 대조루 아래를 통과하면 정면으로 남향의 대웅전이 중심을 잡고 있다. 대웅전 왼쪽으로 나란히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이 남쪽을 바라보며 있다. 명부전 앞쪽으로 멀찌감치 담장을 둘러싸서 일곽을 이루고 있는 곳은 적묵당이다. 대웅전 오른쪽으로는 강설당이 있다.

이와 같은 가람 배치와 구성은 전등사의 역사와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린 사진을 비교해볼 때 사찰의 본래 모습에서 많이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전등사가 강화도의 관광지로 각광받으면서 사세(寺勢)가 늘어 사찰 규모를 확장한 것이리라.

 

전등사 대웅보전 내부 모습.
전등사 대웅보전 내부 모습.

전등사의 문화유물

전등사는 등록된 문화유물을 꽤 많이 보유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건축물로 대웅전과 약사전이 있다. 송나라 때 범종과 대웅전에 있는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명부전에 있는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일괄, 묘법연화경(법화경) 목판 등도 보물로 지정돼있다.

삼랑성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돼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로는 약사전 현왕탱, 약사전 후불탱, 청동수조, 대웅보전 업경대와 수미단, 약사전 석불좌상 등이 있다.

대조루와 대웅보전 후불탱, 강설당 아미타불탱 등은 인천시 문화재 자료로 지정돼있다. 이밖에 인천기념물인 양헌수 승전비와 인천향토유적인 정족산가궐지와 선원보각지가 있다.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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