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양안 접경 진먼에서 남북 접경 인천의 미래를 찾다③

[인천투데이]

중국의 샤먼(廈門)과 마주보고 있는 대만의 최전방 군사요충지 진먼(金門)은 탈냉전의 흐름에 발맞춰 분단된 양안을 잇는 가교이자 평화의 섬으로 변모했다.

이 같은 진먼의 변화요인을 단순히 국제정세 등 외부 환경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접경으로서 갖는 지리ㆍ경관, 역사ㆍ문화·생태 등 고유의 장소자산을 활용한 지역 차원의 노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냉전의 최전방에서 평화의 섬으로 탈바꿈한 진먼의 경험을 살펴보고, 여전히 군사안보 충돌과 정치적 갈등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대만외교부의 2020 Taiwan Fellowship 지원으로 현지에 체류하며 동아시아 접경지역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인천연구원 김수한 박사가 진먼 현지조사(2020.6.14.~19.)로 체험한 진먼의 모습을 독자들과 공유한다.

양안 분단으로 닫힌 섬이 된 진먼
 

진먼의 대표적 양루인 득월루(得月樓). 도적떼를 막기 위해 사방으로 총구를 낸 높이 11m의 망루까지 갖추고 있다.
진먼의 대표적 양루인 득월루(得月樓). 도적떼를 막기 위해 사방으로 총구를 낸 높이 11m의 망루까지 갖추고 있다.

1949년 12월 10일, 장제스(蔣介石)는 타이완 행 군용기에 올랐다. 1945년 일본 패망 직후 시작된 국공내전은 국민당의 패배로 막을 내렸고, 양안은 분단됐다. 진먼은 210km나 떨어진 타이완 본섬을 지키는 최전방 방어선이자 반공 진영의 첨병 역할을 맡게 됐다.

주민들의 섬 밖으로 이동은 물론 서신 왕래도 금지됐다. 적과 내통을 우려한 군 당국은 주민들이 통신장비는 물론 라디오도 소지하지 못하게 했다. 대륙이 고향인 진먼 주둔군의 탈영이 속출했다. 탈영병이 야음을 틈타 바다를 헤엄쳐 건너는 데 이용할까봐, 군 당국은 집에 농구공이나 자전거 타이어마저 놔두지 못하게 했다.

진먼의 혈연ㆍ문화적 뿌리, 푸젠문화

진먼도는 세상과 격절(隔絶)된 섬이 됐다. 원래는 중국 동남권역의 연해지역과 사회ㆍ경제적 교류가 빈번한 곳이었다. 또한 해외 진출 화교의 발원지로서 매우 개방적인 사회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진먼은 문화적으로 푸젠(福建)권역에 속한다. 4세기 초부터 시작된 서진(西晉) 유목민족의 중원 진출, 몽골에 의한 남송의 멸망, 그리고 명말청초 시기 등, 북방지역이 전란에 휩싸일 때마다 중국에서는 한족의 대규모 남하가 이뤄졌다. 남쪽으로 피란 온 한족 가운데 일부 집단은 바다를 건너 근해의 섬으로까지 진출했다.

진먼 주민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천(陳)ㆍ리(李)ㆍ황(黃)ㆍ이(蔡)ㆍ차이(蔡) 씨 등의 씨족 집단들도 바로 이때 진먼에 정착했다. 이처럼 진먼은 혈연적으로 같은 뿌리를 갖고 언어ㆍ문화적 습속이 같은 중국 동남권역의 푸젠과 깊은 유대를 지니고 있으며, 연해지역과 일상적으로 사회ㆍ문화ㆍ경제를 교류했다.

진먼인, 남양(南洋)의 화교가 되다

겨울의 매서운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진먼의 전통 수호신상인 바람사자상(風獅爺)이 전통 촌락의 입구마다 세워져 있다.
겨울의 매서운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진먼의 전통 수호신상인 바람사자상(風獅爺)이 전통 촌락의 입구마다 세워져 있다.

진먼이 가진 개방성은 근대에 이뤄진 대규모 해외 진출에서도 엿볼 수 있다. 1840년 발발한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청나라는 홍콩을 할양하고 샤먼을 포함한 연해지역 항구 5곳을 개항한다.

남중국해와 맞닿아 있는 샤먼이 서방과 중국, 동남아를 잇는 무역항으로 번성했다. 진먼 사람들은 샤먼을 통해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된 싱가포르ㆍ말레이시아ㆍ인도네시아ㆍ필리핀 등 동남아시아는 물론, 일본의 개항장인 나가사키ㆍ고베 등으로 진출했다.

진먼은 소금기가 많은 척박한 토질에다 겨울이면 세차게 불어오는 모래바람 때문에 농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1910년대 초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기근까지 겹치면서 많은 진먼인이 살길을 찾아 동남아 등지로 떠났다. 진먼인들의 이 같은 해외 진출은 1915~1929년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 기간에 진먼 인구의 41.45%가 감소했다.

챠오휘(僑匯)와 양루(洋樓)

진먼 화교들은 근대의 우정(郵政)제도를 이용해 고향 집으로 돈을 보낼 수 있었다. 챠오휘(僑匯)로 불린 화교들의 송금으로 진먼의 가족들은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해외 진출 초기 진먼 화교들은 주로 개항장 부둣가에서 짐을 나르는 등, 단순 노무에 종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업과 무역 등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가난한 집안 출신인 진먼 화교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성공을 이웃들에게 알리고 집안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고향에 동ㆍ서양 건축양식이 혼합된 저택을 지었다. 이 저택은 양루(洋樓)로 불렸다. 1949년 이전까지 마을 56곳에 양루 총 161개가 세워졌다. 진먼 화교들은 종족 사당 정비와 신식 학교 건립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공적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0~30년대 세계 공황이 발발하고 동남아 현지의 반화(反華) 조류가 고조되면서 많은 화교가 진먼으로 귀향했다. 귀향한 화교들은 서구 열강의 문화를 진먼에 전파하기도 했다. 진먼 주민들은 양복을 입고 커피를 마시며 파티를 즐기는 귀향 화교들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1969년 조사 자료를 보면, 당시 귀향한 화교 수는 진먼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만3782명(2335가구)으로 집계됐다.

시간이 멈춘 섬, 전통 역사ㆍ문화 자산 활용한 명소로

진먼 출신 화교들의 기부로 지어진 진수이(金水)초등학교. 현재는 화교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진먼 출신 화교들의 기부로 지어진 진수이(金水)초등학교. 현재는 화교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양안 분단과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진먼이 가진 개방적 특성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고 있던 푸젠과의 혈연ㆍ문화적 유대관계는 단절됐다. 동남아와 연결돼있던 화교네트워크는 끊어졌으며, 귀향한 화교는 해외에 친인척을 둔 요주의 감시 대상으로 전락했다.

진먼은 세상과 격절된 접경이 됐다. 군사안보를 이유로 개발이 지체되고 사회적 인구이동이 억압된 탓에 진먼의 시간은 멈췄다. 그러나 그 덕분에 진먼의 유ㆍ무형 전통 문화자산의 원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수백 년 역사의 민난(閩南) 전통가옥과 촌락, 과거 동남아 곳곳으로 진출한 진먼 화교들이 지은 양루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 전통 문화자산은 지금 진먼 곳곳을 명소로 만드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물머리라는 뜻을 가진 수터우(水頭) 마을은 황(黃) 씨 집성촌으로 700여년 전에 형성됐다. 수터우 마을은 주민들이 실제로 거주하며 살아가는 생활공간인 동시에 역사ㆍ문화자산을 전시하는 진먼의 대표적 거리박물관이 됐다.

면적 1.5㎢의 마을 전역에는 하늘로 치솟은 제비꼬리 모양의 처마 또는 말안장 모양의 붉은 색 지붕을 얹은 정방형의 민난 전통가옥이 빽빽하게 들어차있다.

화교 발원지로도 유명한 수터우 마을의 중심에는 1931년 황 씨 가문에서 세운 양루인 ‘득월루(得月樓)’가 자리 잡고 있다. 당시 극성을 부리던 도적떼를 막기 위해 높이 11m의 망루를 갖춘 이 건축물은 진먼의 화교문화를 상징한다. 2001년엔 ‘대만 역사 건축 100선’에 선정됐다.

1932년에 진먼 화교의 기부금으로 지은 서양 건축양식의 진수이(金水)초등학교가 지금은 화교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수터우 마을처럼 전통 역사ㆍ문화자산을 간직한 마을이 섬 전역에 흩어져있다.

종친회 교류활동, 양안 간 문화동질성 회복에 기여

제비꼬리 모양의 처마를 얹힌 민난(閩南) 전통주택.
제비꼬리 모양의 처마를 얹힌 민난(閩南) 전통주택.

계엄령 체제에서 진먼의 사회활동은 극도로 통제됐지만, 종친회 등의 종족 제례 등 회합활동은 예외적으로 허용돼 진먼의 종족 질서는 유지될 수 있었다. 1992년 계엄령이 해제된 이후 진먼의 각 씨족을 대표하는 종친회는 지역사회 거버넌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 됐다.

2001년 양안 교류가 시작되면서 진먼의 접경 연결기능이 강화되고 있는데, 특히 종친회를 중심으로 한양안 간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양안 종친회는 1960~70년대 문화대혁명 등으로 인해 소실된 중국 측 족보 복원 지원으로부터 출발해 종족 제례를 공동으로 주관하는 등, 양안 간 혈연ㆍ문화적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군사 갈등과 대치 상황에서 진먼은 폐쇄된 접경으로서 특성이 강화됐다. 그러나 탈냉전 흐름 속에서 접경이 갖는 ‘연결과 접촉’ 기능이 확대됐고, 원형이 유지된 역사ㆍ문화자산은 분단지역을 연결하고 동질성을 회복하는 토대 역할을 하고 있다.(다음 호에 계속)

글ㆍ그림 / 김수한(인천연구원 연구위원) 시민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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