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인천투데이 이보렴 기자] 1920년에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가 두 개 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다. 봉오동전투는 6월, 청산리전투는 10월에 일어났다. 우리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로 기억하고 있다. 봉오동ㆍ청산리전투의 숨은 주역인 최진동 장군과 서일 총재, 이청천 장군에 관한 책 ‘민족지도자 석주 이상룡’을 쓴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1919년 5월 31일 신축 신흥무관학교 본교 자리,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 위치.(사진제공ㆍ이태룡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1919년 5월 31일 신축 신흥무관학교 본교 자리,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 위치.(사진제공ㆍ이태룡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봉오동전투와 대한북로독군부

봉오동전투 하면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홍범도 장군을 떠올린다. 그러나 홍 장군은 봉오동 전투 직전까지 대한독립군을 이끌었다. 이 대한독립군과 안무 장군이 이끈 국민회군, 최진동 장군이 부장(府長)이었던 독군부(督軍府)가 연합해 독립군단인 대한북로독군부를 형성했다. 사령관은 최진동 장군이 맡았다.

최 장군은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북간도 옌볜 책임자(도태) 최우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08년 동생 최운산ㆍ최치홍과 함께 옌볜으로 이주해 청국 군대 군관으로 입대했다.

대한북로독군부 형성 직후인 1920년 6월 4일, 홍범도 부대의 1개 소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헌병 국경 초소(1개 소대 규모)를 습격해 격파했다. 당시 일본군 제19사단장은 보병 소좌 야스카와(安川二郎)가 지휘하는 보병과 기관총대 1개 대대를 출동시켰으나 두 차례 전투에서 전사자 120명을 냈다.

뒤이어 6월 7일 대한북로독군부는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 깊숙이 유인한다. 그곳에서 서너 4시간에 걸친 교전이 벌어지는데, 이게 봉오동전투다. 이때 전사자 157명과 부상자 200여 명이 발생했다. 봉오동전투는 대한북로독군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반일무장투쟁사에 빛나는 전과 중 하나였다.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무장독립투쟁이 어려워진 상황 속에서도 독립군을 이끌고 있던 최진동 장군은 1925년 말 독립군에게 설을 쇠고 오게 당부한 후 수뇌부 20여 명과 함께 지내다가 일본군에 체포됐다. 이 사건으로 최 장군은 수차례 회유와 협박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최 장군이 일제에 귀순했다고 이태룡 소장은 설명했다.

“당시 일본군이 최 장군을 체포한 후 함께 체포한 부하 20여 명을 살리려면 귀순하라고 회유와 협박했을 것이고, 최 장군은 함께 붙잡힌 부하들을 보호하기 위해 귀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산리전투에서 발생한 부상병을 후송하는 일본군.(사진제공ㆍ이태룡 소장)
청산리전투에서 발생한 부상병을 후송하는 일본군.(사진제공ㆍ이태룡 소장)

청산리전투의 잊힌 영웅, 서일 총재와 이청천 장군

봉오동전투에서 기억해야할 인물이 최진동 장군이라면, 청산리전투에서는 서일 총재와 이청천 장군을 기억해야한다. 서일 총재는 흑하사변, 즉 자유시 참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2015년 ‘3월의 호국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서일 총재에 대해 이 소장은 “청산리전투의 주역인 대한군정서 총재였으며, 자유시 참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무호흡으로 자결했다”고 했다.

대한군정서는 1919년 10월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가 통합해 만든 대한군정부의 후신이다. 대한군정부가 만들어진 그해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로 서간도에 군정서(총재 이상룡, 통칭 서로군정서)가 있으니, 북간도의 군정서를 대한군정서(통칭 북로군정서)로 했다.

황학수(1879-1953) 장군은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나왔으며, 안동진위대장 출신으로 서로군정서 참모장과 대한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냈다.(사진제공ㆍ이태룡 소장)

이 북로군정서의 총재가 서일이다. 서 총재는 북로군정서에도 서로군정서처럼 사관학교를 세우고자 했다. 때마침 김좌진이 1918년 서울에서 망명해 대종교 지도자들을 찾아왔다. 서일은 김좌진을 서로군정서 총재인 석주 이상룡에게 보내 신흥무관학교 교장과 교관 파견을 허락받아 1920년 3월 사관연성소를 개교했다. 6개월 과정으로 첫 졸업생 298명을 배출한 것이 그해 9월 8일인데,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나와 있다.

사관연성소에서 첫 졸업생을 배출한 그해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활동한 사람들과 관련해 이 소장은 “청산리전투에 참여한 서로군정서 부대 병역은 최소한 이청천 사령관이 이끈 5개 중대 900명과 홍범도 부대와 연합작전을 펼친 교성대(신흥무관학교 교관과 학생) 300여 명 등 총 1200명 이상이었다”고 설명했다.

‘석주유고’에는 다음과 같이 간략히 서술돼있다.

“경신년(1920)에 왜적이 삼로(三路)로 나누어 군대를 전진시켰다. 한 부대는 흥경(興京)으로부터 신개령(新開嶺)을 넘어 영춘원(永春源)으로 들어오고, 한 부대는 철령(鐵嶺)으로부터 산성자(山城子)를 경유하여 유하현을 치고, 또 대군으로 훈춘・연길 등의 현으로 곧장 향하였다. 왜적이 지나가는 곳마다 한인 촌락이 잔멸(殘滅)하여 거의 다 없어졌다. 이청천이 5단(團)의 군사를 통솔하고 왜적과 청산(靑山)에서 만나 크게 승첩하여 수백여 명을 죽였다.”

1919년 5월부터 1920년 9월까지 서로군정서 예하의 신흥무관학교는 본교 외 분교가 통화현과 유하현에 있었는데, 생도 2000여 명을 배출했으며, 생도 외 군사 활동의 주력부대로 의용대 5개 중대가 있었다. 석주는 그 5개 중대를 “이청천이 5단의 군사를 통솔하고 청산에서 크게 승첩하여”라고 기록했다.

청산리전투는 서간도 화룡현 청산리에서 벌어졌다. 이곳에서 이청천이 이끈 서로군정서 5개 중대와 교성대,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 서일 총재가 이끈 북로군정서 부대 등이 약 2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과 싸워 1200~1300명을 살상했다. 반일무장투쟁사에 빛나는 전과였다.

중국 화룡시에 있는 대종교 3종사의 묘.(사진제공ㆍ이태룡)
중국 화룡시에 있는 대종교 3종사의 묘.(사진제공ㆍ이태룡)

서일 총재는 대종교 지도자이기도 했다.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서재운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2년 함경북도 경성군의 ‘유지의숙’을 졸업해 소학교 교사로 10년간 근무했다.

일제의 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만주로 망명한다. 백포 서일은 그해 3월 중광단을 조직하고 다음해 10월 대종교에 입교한다. 대종교는 나철이 1909년에 창시했다. ‘대종’이란 한얼님(하느님)이 세상을 널리 구제하기 위해 사람이 돼 내려오셨다는 뜻이다. 서일은 1918년에 대종교 교리와 자신의 저술을 엮은 ‘사책합부(四冊合附)’를 출간하기도 했다.

서일 총재는 독립군단 수뇌부의 괴멸 사건으로 불리기도 하는 흑하사변(자유시 사변)이 발생하고 난 후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한다. 자유시 사변은 1921년 6월 27일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발생한 독립군 괴멸 사건이다.

사건 발생 과정과 결과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이태룡 소장은 “흑하 방면에 집결한 독립군 지도자들 사이에서 지휘권을 누가 쥘 것인가를 두고 갈등이 발생했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총괄 지휘권을 두고 독립군 지도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졌고 이는 패싸움으로까지 번졌다”며 “이를 막는다는 핑계로 러시아 군대가 개입해 참변이 생겼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단 지도자들은 서로 반목했고, 독립군은 흩어지게 됐다. 이 소장은 “서일 총재는 이 사건에 북로군정서 간부들이 개입된 것으로 자책해 자결했다”고 설명했다.

청산리전투 기념비.(사진제공ㆍ이태룡 소장)
청산리전투 기념비.(사진제공ㆍ이태룡 소장)

이청천 장군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2학년 때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런데 유학 도중 경술국치를 당했다. 그는 1913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중위가 되면서 1919년에 만주로 파견됐다. 이때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됐다. 당시 신흥무관학교 교장은 전 육군 참령 출신이자 1906년 홍주의병 때 홍주의진의 참모장으로 활약한 후 종신유배형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청천 장군의 본명은 지청천이다. 그는 비록 일본군 중위이지만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서 군 경력이 10년을 훨씬 넘었다. 또, 김경천(본명 김광서), 신동천(본명 신팔균)과 함께 ‘만주벌 삼천(三天) 장군’이라 불리기도 했다.

1920년 9월, 만주 당국으로부터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를 당하자 이청천 장군은 서로군정서 5개 중대 900여 명을 이끌고 간도성(間島省) 안도현(安圖縣)으로 이동했다가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다.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고려혁명군을 1개 여단으로 재편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해 10월 여단 안에 설치한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며,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 등을 거쳐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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